'소통'에 대한 소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자기 의견, 자기 과거, 자기 주장, 자기를 관철시키려
'내 이야기 좀 들어주소'
참... 좀... 시끄럽다...어지럽고...
남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비법까지 등장했고
남과 협상에 능한 방법은 조목조목 참으로 노하우도 다양하다.
남의 노하우와 방법과 비결은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하는데도 이래저래 그걸 배우려 안달이다.
'내 이야기'를 '남'에게 공감받기 위해
'내 주장'으로 '남'의 의견을 덮기 위해
'내 조언'으로 '남'의 정신을 휘젓기 위해
심지어
'내 명령'으로 '남'을 조종하기 위해 다들 너무나 치열하다.
핑퐁게임같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저기서 듣는 것 같지만 자기해석이 난무하고
그 결과를 따지려 다시 얘기하면 들어가는 듯 싶다가도 뒤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소리는, 하나의 언어에 천만가지 해석을 담아 이리 튀고 저리 내쳐지고.
수학보다 복잡하고 물리보다 난해한,
우리에게 소통이란, 불가능한데 가능하다 착각되어진 소리의 진통같다.
나는.
나를 빼버리기로 했다.
거죽만 남기고 몽땅 다.
내 정신, 내 마음, 내 감정, 내 이성 모조리 다 들어내고
내 거죽 속에 세상을 담아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개자가 되어야겠다.
먼지같은 내가 내 소리로 살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무섭고 길고 광활하고 냉정하고 시끄럽고 복잡하다.
너무 많은 소리들 속에서 내 소리 찾기도 어렵고
남의 소리를 거부하기도 불안하고
잡음 걷어내고 세상의 소리만 듣기에 나는 지나치게 강제된 것들로 채워져 버렸다.
내 덜떨어진 귀는 아무 소리나 받아내고
내 촐싹맞은 혀는 그 소리에 감각적으로 반응하고
내 흐리멍텅한 눈은 모든 것을 뿌옇게 보고 있어
내가 나를 고쳐쓰려 해도 나에게 버릇된 것들이 너무 고집을 피워대니
내가 나를 비워버리는 쪽이 한결 수월한 듯하다.
이런 이유로,
내가 세상속으로 들어가려면
세상을 내 속에 품거나
내가 세상의 소리를 입는 것뿐이어서
나는 거죽만 남기기로 결정하련다.
내 소리를 삼키고 세상이 나에게 할 소리들로 나를 채워보는거다.
내 것을 버리고 세상이 담아내야 할 것들로 나를 채워보는거다.
'더운 음식에서 더운 김이 빠져나가 듯'(릴케, 비가)
지난 시간들이 나에게 입혀놓은 버릇들을 조금씩 내게서 들어낸 뒤
다시 새로운 것으로 꽉...
어떠한 빈곳도 없이, 여백도 주지 말고.
꽉 채워보는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레티우스가 본질적으로 모든 공간에는 빈곳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니 혹여 세상이 자기로 꽉 채운 나에게 어느 한 구석을 허락한다면 미련남은 내 것들 조금 쟁여놔야겠다. 그러다가 내 안에서 미처 내보내지 못한 세상소리의 농도와 탁도가 짙어져 자칫 더 큰 공간이 필요할 때 나머지 나를 버릴 용기 조금 보태어 생색도 내어보고 선심쓰듯 아량도 베풀어야겠다.
내 정신의 즙을 몽땅 짜버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내 정신으로 감당하기 벅찬 세상에 대한 책임 때문이고
내 마음의 공기를 몽땅 빼버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내 마음으로 인간군상들을 담기에 버겁다가 역겹기 때문이고
내 지성의 파편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내 지성으로는 오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내 신념의 줄기들을 몽땅 세상에 바치고 싶은 것은 지금의 내 신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꼴불견들을 어찌할 바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위탁된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로 세상에 두손두발 모두 들고 투석을 해야만 하겠다.
내 머리와 가슴과 마음의 모든 엑기스들을 내보내고
세상으로부터 위탁받은 것들로 가득 채워서 형체없는 세상의 것들을 대신 내보내 주어야만 하겠다.
내게 주저앉아 자리를 틀어버린 내 산만한 정신과 어지러운 감정과 순수하지 못한 지성들이 더는 드러나지 않도록 얼른 나를 버린 후 꼴같잖은 것들이 들러붙기 전에 서둘러 세상의 것들로 나를 채워야겠다.
세상은 자기가 정한 원리에 따라 공짜는 없다며 내 자격을 운운하겠지.
이에 대비해 내 거죽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타당한 근거정도는 내가 내놔야 하겠는데,
나름 보기에 멋진 거죽을 소유하고 나름 똑똑한 머리를 타고났고 나름 따뜻한 마음을 소유했으니 세상이 결코 손해보는 거래같지는 않다. 한켠으론 내가 밑지는 거래인 것도 같지만 이는 오만방자함이 아직도 남아있는 내 안의 줄다리기일뿐이니 여하튼 세상에 내 거죽을 빌려주는 대가로 나는 지금껏 못된 심보로 살아온 면죄부부터 청한 후 내가 자격미달이 아니라는 데에 앙큼한 발상을 좀 보태보겠다.
어떤 틈새에도 내 것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발버둥은 내 것이 못나서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무지 안전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겨 내 모든 빈 곳까지 필요해서라고 말하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자연은 보이지 않는 알갱이들로 일을 처리한다고 하니 나는 내 알갱이 걷어낸 거죽에 자연이 처리해야 할 알갱이들을 잘 배열하여 담아놓을 수 있는 무균의 곳간으로 적절하다고 주장하련다.
머리좋고 바지런해 결코 작은 알갱이라도 손실가게 하지 않을 것이며 깐깐하게도 정리정돈에 능한터라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는 일은 없을테고 빼곡히 해야할 리스트들 정확하게 작성하는 습관덕에 세상이 내보내야 할 소리의 순서를 뒤바꾸는 일 또한 없을테니 내 거죽이야말로 곳간역할로서는 제격이라고 우기련다.
이 정도면 세상이 나를 퇴짜놓지 않겠지라는 확신으로
나는 세상의 소리를 담고서 적절한 때에 내지르는, 소리의 통로, 즉, 소통의 매개자로
기꺼이 세상과 사람을, 세상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겠다고 나는 세상과 협상하겠다.
이 정도는 되니 내 거죽에 담고자 하는 것을 담으라고.
나는 그리 거래를 해보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웅은 자신을 보존하는데 탁월하다는데 이는 내가 영웅이 되고자 하는 무모한 심보인 것인가?
정녕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다는데 이는 내가 머무르고 싶으면서도 해방을 원하는 탐욕스런 심보인 것인가?
외부에서 내게 원하는 것 다 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들로 다시 나를 배양하고 싶은 맘은 배척으로 순수를 얻고자 하는 못된 심보인 것인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 내 심정을 그윽한 꽃향기로 덧입히고 싶은 이기적인 심보인 것인가?
나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나를 지복한 세상이 잘 만져주길 바라는 비겁한 심보인 것인가?
갑자기 근사한 여인네 하나가 이리 발광하니 놀라서라도 나 좀 봐달라는 애처러운 심보인 것인가?
늘 그렇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걱정은 의심으로 진화된다.
내 여태 남들보다 뛰어난 미모와 명석한 두뇌와 건강한 육체와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소유한 것은
세상이 부여할 역할에 적합하게 나를 만들어온 치밀한 세상의 조작이었나?
내 여태 공허하고 헛헛함에 이리도 긴 시간 무언가를 얻고자 애닯은 것은
지금 여기 이 시점에서 내게 보낸 신호를 민감하게 감지할 인간으로 짜놓은 세상의 각색이었나?
내 여태 무수한 결과들로 부러운 위치까지 가보았으나 그 모든 것들의 무용(無用)함이 차고 앉은 자리의 선망보다 더 크게 나를 이끈 것은 나를 어딘가에 쓰려고 작정한 세상의 계산이었나?
나 참 잘나고 멋지고 아름다운 인간인데 딱 여기까지 날 끌어올리고선 다 내놓으라 윽박지르는 세상 앞에 헛웃음밖에 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세상이 준 신호에 나도 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는 억울함에 심장이 멈췄어야 한다. 그걸 감지하지 못했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만 한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욕한바가지 퍼부어야 마땅할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 이 장난이 왠지 순리에 따라가는,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지는 게 이상하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리 되었다.
내 주장, 내 의견, 내 이야기에 있어 관철시킬 것이 없다.
내 이야기 좀 들어주소 붙잡고 할 말이 없다.
남을 설득할, 거래할, 협상할 그 무엇도 없다.
넘어야 할 산도 없고 발에 채일까 두려운 걸림돌도 없다.
잊고 싶은 기억도, 떠올리고 싶은 그리움도, 만들고 싶은 추억도
불과 어느 시점까지 존재했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남지 않고 어디있는지조차 모르게 사라졌는데
찾고 싶지도, 미련두고 싶지도 않은 것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다.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을 애써 설명할 정도로 능숙하지 않을 뿐더러
설명을 만들어내야 하는 머리의 기능조차 약해져 버렸다.
이로써 내 소리를 거둬내니 더 이상 소통이 소리의 진통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세상의 소리를 담아내니 소통은 소리가 가야할 곳으로 보내는 통로가 되었다.
그다지 애쓰지 않았는데 거죽안이 모조리 비워졌다.
그러니 거죽에 채워넣을 것들에 있어서도 애쓸 필요는 없겠다.
비어둬선 안되는 주체가 알아서 채울테니 말이다.
이로써 난
나와 세상, 알갱이와 거죽, 안과 밖, 비움과 채움.
중용의 실천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의 시작을 한 셈이다.
세상에 맞짱뜨라고 말한 적이, 글쓴 적이 있다.
쓸데없는 소리였다.
멋모르고 한 소리였다.
나는 세상과 안밖으로 교합한 것을.
세상은 나의 거죽을, 나는 세상의 소리를
그렇게
나와 세상의 일체(一體)는
우리라는 일체(一切)가 되어 가는 것을 모르고 한 소리였다.
어쩌면, '한 인간이 세상의 전부이며 우주의 전체'라는 진리는
이리 세상에 내가 들어간 것에 대해,
세상이 내게로 들어온 것에 대해.
다시 말해, 세상과의 협정이 잘 성사된 결과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선택받은 행운아인가?
세상에 맞짱뜰 것도 내놓으라 소리낼 것도
가져가라 던져버릴 것도 들어달라 다그칠 것도 아무 것도 없으니.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이니 말이다.
세상이 충분히 가져다 써도 되는,
그런 인간이 나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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