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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13. 2023

새벽독서 - 그래, '느낌'대로 써보자.

'영적진화'에 대한 소고

오늘은 나의 이성의 진화에 대해 써보려 한다.

느낌대로, 사고가 흐르는대로, 손이 움직이는대로..

그냥~~~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고 범접할 수 없는 그의 '논리'적인 명철함에 나의 이성을 재단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잡은 그의 저서 '성찰'. 이 책은 어려웠지만 데카르트를 반박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다시 그가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논리에 의해 나 역시 반박되던 견해가 이해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임에도 확신하지만 '인간이 이성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에도 더 큰 확신을 갖게 된다. 어쩌면 동물이 더 '이성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먼저, 본능과 이성을 살짝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본능이란 본래 지니고 태어난 능력.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울고 웃는.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해낼 수 있는 아주 기본(어쩌면 기본이상의)적인 능력을 지녔다. 조금 더 기본의 수위를 높인다면 도전하고 느끼고 깨닫는 능력까지도 그러한 본능에 속하리라. 이에 대해 동물의 경우를 한 번 보자. 평소 보지도 못한 공룡이나 잠깐 본 사자를 거론할 것까지는 없겠다. 그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만으로도 동물의 본능을 우리는 직접 보고 알게 되었으니까. 지구상의 단 하나의 동물이 그러한 본능을 지닌다면 그것 역시 동물의 본능이라 인정해야만 하니까.


강아지나 고양이도 여러번의 학습을 통해 깨닫는다. 현관을 열어주면 살짝 나갔다가 되돌아온다. 이는 물리적인 학습에 의해 '문이 열리면 나가도 되는구나'로 습득된 것이겠지만 문이 어떤 이유로 닫혀버렸더라도 몸을 펄쩍 뛰어 문고리를 열려는 시도를 여러번 한다. 그들은 문고리를 옆으로 젖히면 문이 열린 것을 본 감각에 의해 알게된 것을 너머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문고리로 문을 여는' 도전을 하는 것이다. 동물에게도 도전과 시도라는 초월된 이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는 이성일까 본능일까. 본능의 범주를 가히 넓혀도 괜찮겠다. 따라서,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이성'이라는 단서에 대해 나는 의심하면서, 동물에게도 이성은 존재하며 인간군상들에 있어서도 바보가 있고 똑똑한 이가 있듯이 그저 우리 인간이 동물보다 좀 더 이성적이라는 생각 언저리에서 나는 멈춰보려 한다. 


그렇다면 나는? 

동물보다는 똑똑하고 여러 인간군상들의 중간 정도로 나를 앉혀둔 채 나의 인생에 나의 이성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며 어디까지 작용시켜야 하는지를 논할 수 있다. 


나는 필히 동물로서의 본능은 지니고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바보는 아니니 한글도, 구구단도 외우고 박사까지 갔으리라. 좀 더 훈련된 이성은 나에게 '공부'를 '학습'할 수 있는 기능. 그렇다. 말 그대로 기능적으로도 다소 쓸만한 존재로서 나의 이성(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식)은 키워지고 다듬어졌다. 자, 여기까지는 아마도 대다수가 하려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범주다. 그 어려운 수학도, 언어도 인간들은 섭렵해버리니까. 그래서 현시점 나의 이성은 그저 먹고 사는데 좀 유리한 수준정도에 머무르는구나.로 멈추려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더 요구되는 이성은 무엇일까? 

또한, 나에게 더 요구되는 이성 너머의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초월된 이성'이라고 명명하고 논리를 이끄는 것이 지금 나의 수준에는 더 적합할 듯하니 

'초월된 이성', 즉, '물질적, 물리적, 지성적인 이성을 너머선 이성'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 것인가? 


첫번째 질문, '초월된 이성은 존재할까?'에 대해서는 명확하다. 이미 결론은 나있다. 나는 '지혜'를 연구하는 학자이자 지식만으로는 위험한 세상이 이미 도래했음을 여러번 언급했기에 '지혜'라는 자체가 초월된 이성이라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창의, 통찰, 직관, 예지, 안목과 같은 것들의 총합이 지혜다. 이는 결코 초중고대학에서 배운 것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해함 속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능력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초월된 이성'은 존재한다. 존재하니 지금껏 이 단어들이 인간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 '초월된 이성은 어디서 구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현재까지 내가 공부하고 이해하고 수용한 바로는 '영성적 지식'에서 구할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육체(뇌)가 정신(뇌에 담긴 질서화된 이성)과 상호작용하며 나를 지금까지 이끌었다?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학습된 이성과 질서화된 정신이 용을 써도 해결되지 않던 많은 문제들을 겪으며 '무언가가 나를 이끄는' 그 힘의 존재를 나는 느꼈었다. 이리 가려 했지만 저리 가 있는 경우도 많았고 찰떡같이 말하라고 이성이 시켰지만 개떡같이 말하는 나의 혀에 난감한 적도 있었으며 여기 서 있으라는 이성의 명을 거부하고 저기 서 있던 경우도 많았다. 이성을 거부하는 힘. 이것이 영성의 힘이다. '무언가가 나를 이끄는 힘'이 육체와 정신을 관할하는 나의 영혼의 힘이 아닐까. 


영혼의 힘은 영혼에게 얼마나 힘을 보태주느냐에 따라 더 강해지겠지. 내가 '운'을, '기적'을,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초월된 영성지식을 쌓아가며 이들을 믿게 된 것인지 명확한 인과로 규명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현재 이성을 초월한 영성적 지식으로 인해 '운', '기적', '창조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교를 잘 모른다. 초자연적인 인간본능, 우주의 질서에 대한 거론이다. 따라서. '영성적 지식'의 습득은 아주 중요하다. 나를 이끄는 힘에 의존할 용기와 의지를 거부할 배짱과 나의 사상에 확신을 주는 신념이 바로 영성적 지식이다. 


책을 읽는 궁극의 목적은 '더 나은 나', '더 나은 삶', '더 깊은 의식', '더 맑은 혜안', '더 투명한 관점'을 갖기 위해서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더 나은?, 더 깊은?, 더 맑은?, 더 투명한?'. 모두가 지금 내게 없는 것이며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세계로 자꾸만 인간인 나는 나를 진입시킨다. 추구하는 것들이다. 이 자체가 바로 영혼이 이끄는 힘, 영성적 지식의 습득과정, 영성진화를 도모하는 배움이라는 것이다. 배움의 동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데카르트는 이러한 나의 견해에 상당한 논리를 심어준 학자다. 그는 신과 영혼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 명철하게 논리를 펼쳤다. 올더스헉슬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지각'을 활용한 결과인데 그러한 판단에는 반드시 긍정이나 부정과 같은 '느낌'이라 불리는 감정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판단할 때 우리는 수시로 내뱉는다. '이번에는... 몰라, 느낌대로 가보자!' 라고. 인간은 본능인지 본성인지 둘다인지에 따라서 분명히 지성을 초월한 어떤 자극으로 매번 선택한다. 


그렇다면, 세번째 질문 '초월된 이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라고. 활용한다는 자체가 내 이성을 작동시키겠다는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활용할 생각말고 그저 따르라.는 결론이 난다. '물질적인, 물리적인, 실재적인 것들의 지성작용에 의존하지 않는 지성작용'이 '따르는' 수동의 행위와 결합될 때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배움의 실천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한(모든 감각, 즉 전체가 동원되어 있는데에서 이성은 부분에 불과하기에) 실천인 것이다. 전체가 부분에게 명령하여 움직이는 활동이어야 부분이 방향으로 기능한다. 부분(이성)에 의해 관할되는 전체라면 '나'를 도구로 살아가는 '내 인생'에 큰 기대를 할 수 없다. 해서도 안된다. 또한, 미안해해야 할 것이다. '내 몸 전체'가 이성, 감각 등의 부분들을 관장하며 균형으로 조화를 이룰 때 '나'를 도구로 '내 인생'은 우주의 질서와 세상의 조화에 어울리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새벽, 느닷없이 쓰기 시작한 이 엉뚱하고 발칙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면서 나는 정리되어 간다.

더 나은 나, 더 필요로 하는 나, 더 잘 쓰이는 나.를 위해 나는 매일 배운다. 책으로, 경험으로, 사람에게서 매일 배운다. 배움은 '나'라는 도구가 '내 인생'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끄는 도구여야 하기에 '배움을 갈고 닦는다'는 표현은 아주 적합하다.


지식? 즉, 이성에 차곡차곡 쌓인 지식에 '영성'이라 불리는 혼을 넣지 않으면 '지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삶은 난해하며 소란스럽고 비참할 것이다. 많이 안다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패한 경험은 이미 흔하니까. 따라서, 지혜라고 불리는 '초월된 이성'은 존재하는 것이며 이 존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면 '감각(느낌)'에 따르는 행위로 영성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기에 따지지 말고(이성적 사고말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같은 순종으로 어느 순간 '운'이나 '기적'의 짜릿한 체험을 만난다면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길에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


영적진화를 얻는 길은 철학과 경험만이 유일한 듯하다. 영적진화를 통해 얻은 초월된 이성, 영성적 지식은 내가 활용하거나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관점 자체가 정반대에 서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지식은 내가 습득할 수 있으나 초월된 이성은 내게 습득되도록 세상이 신호를 보낸다.

인식은 나의 관념의 결과이지만 초월된 이성은 인식의 벽을 깨부수고 새로운 풍경앞에 나를 세운다.

이성은 내가 다듬을 수 있으나 초월된 이성은 내가 다듬어지도록 현실이 사태로 나를 데려간다.

지성은 학습으로 만족시킬 수 있으나 영성적 지식의 학습은 나의 만족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질서를 향한다.

인지는 조금 수준높은 나를 만들면 가늠이 되지만 영적진화로서의 인지는 늘 나를 가장 낮은 곳에 앉힌다.


따라서, '더 나은 나', '더 깊은 의식', '더 의미있는 깨달음', '더 진한 삶의 진정성'으로 내 인생을 데려가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지식에 의존하지 말 것이며

인식에 예속되지 말 것이며

이성으로 판단된 것을 보류할 것이며

지성을 무시해버릴 배짱을 지닐 것이며

인지에 자만하지 말고 다른 길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이로써, 인간이 지닌 동물적 본능이라는 모래사장 위에 지식이 인식으로, 인식이 인지로, 인지가 지성으로, 지성이 초월된 이성으로 길없는 모래사장에 나의 길을 내어야 할 것이다. 길을 인도하는 것은 영성적 지식, 영혼의 자극, 즉, 초월된 이성을 수용하는 자세에 있다.


오늘 글로 정리를 시도해 본 '나의 이성의 진화'는 수년째 지속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되겠지.

한번씩 이렇게 점검하고 진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정리하니, 조금 더 내가 내 머리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착각이 인다. 묘하고 신통하고 어색하지만 유익하다. 여하튼 정리가 나에게 필요했기에 이 새벽, 글로 옮긴 것이겠지.


나는 나의 진화를 믿고 따라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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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 방법서설, 1997, 이현복역, 문예출판사

* 데카르트, 성찰,  1997, 이현복역,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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