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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14. 2023

새벽독서 - 누굴 우정하고
누굴 사랑할까

'우정'과 '사랑'에 대한 소고

나는 고립되어 있는 지금이 참 편하다.

자발적 고립이라 그런 것일테다.

참으로 많은 모임, 많은 사람들과 왕래하며 그들이 나를 초대하고 내가 그들을 초대하고..

그러한 만남의 모임과 관계들을 '우정'인줄 알고 '우정'이길 바라며 '우정'이라는 착각의 포장속에서

그들에게 최대한 무엇이든 잘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 역시 나를 보여주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사상이 아닌, 남의 사상들을 들추며 우리가 아닌, 남얘기에 정신을 낭비했고

남들의 성공을 우리도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을까를 토론하며 비판속에 비난을 감추었고

칭찬과 덕담의 포장 속에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가 실제보다 더 크다는 착각에 빠졌었고

의지와 열정은 남들이 더 가져주길, 나는 부족한 사람이니 여기 그냥 머무르기만 해도 좋겠다 나를 속였었고


이러한 '우정'도 아닌, 그러니까 '벗'도 아닌, 

'지인'이라 이름붙여진 이들의 집합은

더 넓은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나를 몰고가며,

더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만났으나 엉터리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며,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싶어 만났으나 이리저리 피곤하기만 한,

더 정신적인 확장을 구했으나 피상적인 현실에 우왕좌왕하다 웃고 마는, 


말그대로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나 어느어느 위치의 누구를 안다는 것이 유익보다 이상한 길로 내가 걷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잠시 멈췄고 아는 이들 틈에 나 역시 그들에게 아는 사람정도로 만나다 기억되다 사라지는 것에 염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냥 서버렸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내가 나를 그들에게서 떼어내어 자발적 고립을 택한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나는 나와 결이 같은 이들을 원했었던 것이다. 몰랐었는데 이제 안다. 몽테뉴의 표현대로 '셔츠바람으로 나와' 어깨힘빼고 명함없이도 서로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그런 이들을 원했고 원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자세히 알려하지 않아도 한마디의 말, 편안한 눈빛, 가장되지 않은 예의에도 진심이 묻어나는 그런 사람..

삶의 가치를 논하고 

이득보다는 손해를 감수할 수 있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책임에 의지를 불태우고 

보여지기보다는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기를 나는 바란다. 


이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여주는 사람으로, 결이 고운 사람으로, 손해부터 먼저 당겨 가져가는 사람으로, 내 역할을 내가 자진해서 선택하고 의지와 행동을 연결하는 사람으로 내가 먼저 보여주면 된다. 인간은 원래 사회전염에 취약한지라 내가 전염시켜도 괜찮은, 나 역시 전염되어도 괜찮은 그런 이들과 교류하길 원한다. 


어쩌면 나는 나의 많은 '아는 사람'들 자체보다는 그들이 지닌 '미덕(virtue)'에만 관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미덕에서 악덕이 보이면 나는 그 사람자체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성향을 지녔기에 결코 웃으며 그에게 화답하지 못한다. 

상대의 말 속에서 자신만의 이익이 묻어나고 

상대의 표정에서 비굴함이 드러나고 

상대의 걸음걸이에서 거만함이, 

감탄사에서 비웃음이, 

눈빛에서 잔꾀가 보일 때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특히, 혜택을 권리로 착각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미세한 감지가 포착될 때 나는 상대에게 마음을 닫아버린다. 아니, 굳이 닫으려는 의지없이도 닫혀버린다. 얻은 것을 알지 못하고 당연시 여기는구나를 아는 순간, 이는 그 자의 잘못만이 아니라 베푼 자에게도 똑같이 악덕이 쌓이는 것을 나는 아니까. 


사랑부터하고 판단하는 오류는 더 이상 범하지 않기로 나는 작정한지 오래다. 판단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내가 이성적으로 줘야지한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온진심을 다한 인생과 인생의 교류이다. 내 인생이 상대의 인생과 접목되는 거룩한 행로인데 나는 이를 너무 쉽게 여겨왔었다. 이제 사랑은 줄만한 사람에게 준다. 어떤 순간도 나의 사랑과 우정을 권리로 착각하는 이에게는 줄 필요가 없다고 나는 단정해버렸다. 


나의 사랑과 우정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일정기간 유용하게 소모하고 폐기처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애쓰는 정성과 철저히 나에게 사용권이 허락된 나의 시간과 재물, 치열하게 축적해놓은 나의 지혜, 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를 교류할 상대 역시 이 가치를 미덕으로 알아주는 이여야 한다. 나 역시 상대의 미덕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니까. 

나의 가치와 사랑을 알아주는 이, 

지금은 몰라도 알아줄 만한 이, 

알아주면 고마운 이, 

알게 해주고 싶은 이에게 내 사랑과 정성과 애정을 허락할 것이다. 


이는 결코 거만해서가 아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사용하겠다는 의지다.

내 인생의 소중한 나날들에 위장한채 진입하여 장난치도록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나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내가 나에게 하는 선언이자 당부다.

이리 치열하게 사는만큼 다른 것은 몰라도 삶의 진가를 누리고 싶은 나의 욕구이다.


나는 스스로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이라고 규정하곤 산다. 여기서 사회성이란 사회적인 교류에 능한. 이라는 전제개념이다. 난 사회적으로 결코 능하지 않다. 나름의 까탈스런 기준이 있고 교류에 능한 이들의 교묘한 이해관계에서 나는 아무 기능을 못하는 성향이라. 그들에게서 얻을 것이라고는 그저 비싼 음식과 잘나보이도록 자신을 포장하는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뚜껑열고보니 그 안에 있는 비굴과 술책, 아첨과 사욕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으니까. 당당히 '자발적 사회성결여인간'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그리 살지 않아도, 아니, 그리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 깊이 알아버렸다. 나의 삶을 존중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애쓰며 나의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배우고 나의 길을 걷기 위해 나는 한걸음씩 내딛고 있다. 이 길에 함께 동행할 이라면 한명, 아니 숫자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든 내 것을 모두 나눌 것이다. 나누기 위해 잉여의 나를 만들어야 하기에, 나의 결을 나답게 골라놔야 하니까 내가 선택한 자발적 고립, 사회성결여인간으로의 선포는 충분히 가치있다고 여긴다.


임재범의 비상을 아마 천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비상의 가사와는 달리 제자리를 걷기 위해 빠져든 것이다.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그렇게 날고 싶은 것이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상처 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거지.' 

그렇게 혼자를 택하니 

'고독이 꼭 나쁜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걸 깨닫게 했으니까' 

그렇다. 고독도 외로움도 철저히 내게 필요했던 시간이었고 지금 나는 어떤 한 순간도 외롭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나는 나의 삶에, 나의 시간이, 나를 탐구하는 시간으로 충만함을 느낀다. 충만. 정말 꽉 들어차 있어 외롭다라는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다. 


괴테가 '시와진실'에서 자신의 경험을 서술했듯이 '교양있는 시민들은 비사교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지만 추정이 가능해진 지금, 나의 교양도 드높일 겸 나는 비사교적인 인간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성공한 사람은 말이 없지만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왕왕거리며 이말 저말 만들어내듯 작은 소모임도 마찬가지인가보다. 교양있고 인품있는 이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지만 다소 부족한 나같은 떠벌이들이 여기저기서 명함 주고받으며 자신을 과시 내지 소속되려 애쓰는 처연함을 방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때 그리 몰려다닌 나를 나는 비웃으며 이제 한자리를 지키며 내 인생을 꾹꾹 눌러서 살아보려 한다.


나는 특유의 성향으로 많은 감각을 제쳐둔 채 긴장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제 그것을 제쳐놓고 뒤로 물렸던 감각들을 끄집어낼 줄 알게 되었다. 사물에, 대상에 더 깊이 내 시선을 보내고 더 오래 머무르려 한다. 사람도 그렇게 하려 한다. 내가 다가가 애쓰는 게 아니라 나는 나의 삶을 살 뿐, 나에게 다가오도록, 그렇게 결이 어울리는 이가 내게 오도록 나는 자석이 되려 한다. 하늘도, 땅도, 구름도, 물도, 고양이도, 책도, 사람도.. 깊이.. 오래.. 보려 한다. 애써 관찰하지 않아도 감각이 허락한다면 그 초감각을 믿으며 오래 지속하려 한다. 

많이가 아닌 깊이, 넓게 말이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필요없이 

그저 감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사랑...우정


우정도, 사랑은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짧고 얇은 시선으로는 결코 내 것으로 가져올 수 없는 단어다. 

아름답다. 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넓고 깊고 멀리 오랜 시선을 유지한다면 '아름답다'라는 미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보려해서 보이는 것이 아닌, 느끼려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이 숭고한 단어들의 가치를 가슴 깊이 느끼며 사는 인생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인가...


나는 나에게 진정한 우정을, 사랑을 나눌 사람을 선물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선물하고 싶다.


* 몽테뉴, 에쎄 나는 무엇을 아는가, 손우성역, 1978, 동서문화사

* 임재범, 비상

* 괴테, 시와 진실, 최은희역, 2007,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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