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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23. 2023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 근거

'부자'에 대한 소고

몇년 전 약속시간 1시간 일찍 도착해 멍때리다가 순간 후다닥 적어놓은 글을 발견했다. 요즘 나의 연구와 글, 그리고 나름 만들어놓은 개념들을 총정리하고 있는 중이라 매일 매순간 신나게 나랑 노는 중에 어제 발견한 글. 이 글을 오늘 브런치에 공개한다. 나는 떨고 있다.


우선,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다. 는 또 확신이 들어 떨리고 

독자들에게 내가 나름 논리를 펼치는 것으로서 누군가가 부자가 되는 길을 걷게 될 듯하여 떨린다. 


참, 내가 개념화한 '부자'란 '정신적, 관계적, 사회적, 정서적, 육체적, 경제적 안정과 자유를 추구하고 가진 자'를 의미한다. 돈을 쫒는 삶이 아닌 자신 자체가 닮아도 괜찮은 인간으로서 그 삶을 영위하며 오히려 돈이 쫒는 사람이 되는 사람. 나는 이런 이를 부자라 칭한다. 따라서, 나는 부자가 되고 싶고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나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위에 언급한 6가지의 균형은 꽤 어려우니까. 


하지만 누구나 될 수 있기에 나도 그리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대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처럼 보편적으로 그리 알고 있는 관념화된 명제들로 나는 이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보려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명제. 관념론적인 5가지 명제로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모두가 그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에머슨이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의 부’는 전체 사회를 위해 더 숭고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점검되어야 한다. 여기서 ‘개인’은 ‘누구나’를 의미한다. 즉, 누구나 부의 축적이 가능하다.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이다.


첫째, 인과율이다. 성공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는 그들이 ‘인과율’을 믿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인과율로 흘러간다. 인과율은 한마디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논리이다. 사과나무에선 사과가 열리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온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자극이 주어져야 반응이 나온다. 이렇게 세상은 존재의 원리와 그 무엇 사이에 엄밀한 인과의 이치(理致)에 의해 움직인다. 


이러한 명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한치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충족이유율의 4가지 근거’를 통해 ‘모든 사물과 현상은 크든 작든 필연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며 이어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의 서문으로 이 논리를 서술하였다. 또한, 세네카는 ‘대지를 둘러싼 자연의 사나운 힘이 일으키는 사건들이 아무리 그것이 갑작스럽다 해도 까닭없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네. 모두 나름대로 원인이 있다는 말일세’라며 ‘인과’를 거스를 수 없는 원리로 언급하였고 처세술의 대명사격이 귀곡자 역시 췌술(崔述)을 논하면서 '조그만 장구벌레가 날거나 꿈틀거리는 움직임만 보아도 천지에는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과율은 무언가의 개념화를 위한 이치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부’의 축적이라는 결과도출을 위해서는 이에 합당한 원인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즉, 부의 결과가 나올 원인이 될 요소들이 투입되면 ‘개인’은 ‘부자’가 될 수 있기에 

인과율을 전제로 부는 누구나 지닐 수 있다는 결론은 타당하다.


둘째, 양극론(兩極論)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은 대립극을 지닌다. 해와 달, 낮과 밤, 하늘과 땅,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아래와 위, 안과 밖, 앞과 뒤, 현상과 이면, 긍정과 부정, 수직과 수평 등 세상을 규정하는 거시적인 개념들로부터 나 개인에게 미치는 미시적인 개념까지 모든 개념은 상반된 이면이 존재한다. 뉴턴이 ‘자연스러운 투과와 반사의 조화’라고 표현한 이러한 양극성(兩極性)은 성령의 법칙이므로 곧 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철학은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에 의해 다양한 원리로 소개되고 있는데 


특히 소크라테스는 대립된 개념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중용으로 이러한 원리를 설파하였다. 이는 B.C.399년 사형을 앞둔 그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나눈 삶의 쾌락과 죽음의 고통에 대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쾌락이란 참 이상야릇한 거야. 고통이라고 하면 그 반대 것으로 생각되는데 둘의 관계도 묘하단 말이야.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하여 얻으면 대체로 반드시 다른 하나도 얻게 마련이야.” 


또한, 에머슨은 사회 전체, 자연계와 기계력 모두에서 양극성의 원리를 설명하며 이를 '보상의 법칙'으로 개념화하였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다른 한 편에서 하나를 얻으면 그만큼 빨리 무언가가 퇴보한다. (중략). 무언가를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양극성, 곧 작용과 반작용은 우리가 항상 접하는 자연계 곳곳에 있다. 어둠과 빛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에서, 바닷물의 미세기에서, 남성과 여성에서, 동식물의 들숨과 날숨에서, (중략) 바늘 한 끝에 자기(磁氣)를 가하여 보라. 반드시 상반되는 자기가 반대편 끝에서 일어난다. 만일 남쪽이 끌면 북쪽이 반발한다. 이 쪽을 텅 비게 하자면 저쪽을 응축시켜야 한다. (중략) 하나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절반이고, 그 절반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절반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중략) 생물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동물계에서는 어떠한 생물도 특별히 후하게 하늘의 혜택을 받는 것이 없고, 일종의 보상이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부자가 있으면 대립극에 빈자도 존재하며 

누군가는 부자가, 누군가는 빈자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즉, 누구든 부자 또는 빈자가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인간은 자체의 본성으로 인해 항상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관점이다. 기면 걸으려 하고 걸으면 뛰려 한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가득 채우면 비우고 싶고 비워지면 다시 채우고 싶어진다. 주면 받고 싶고 받으면 주고 싶고. 인간이라면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하고 추구한다. 이 과정이 변화이며 변화를 통해 진화된다. 인간본성인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종족 보존의 욕구이다. 하찮게 취급받는 민들레도 바람을 이용해 종족을 보존시키고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작은 화초도 스스로 생을 다하기 전에 급하게 꽃을 피워 씨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는 종족을 보존시키려는 기본욕구를 지니고 그 목적을 향해 자연이 정해준 순리대로 종족 보존의 원칙을 지켜나간다. 이렇게 모든 유기체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이를 져버렸을 때 퇴화하거나 소멸된다. 


특히 인간은 현재보다 다음 기간에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욕구한다. 더 어려운 공부에 도전하고 더 일을 열심히 하고 더 자신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후손을 지키려고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원은 '부족'보다 '충분'이 훨씬 자신의 욕구 실현에 유리하니 인간이 ‘부’를 소유하려는 욕구 역시 더 우성한 종족으로 진화하고자 하는 기본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인성 자원, 사회적 자원, 경제적 자원, 모두가 부족하기보다 충분한 조건이 되었을 때 더 삶에 유리하다. 부족을 충분화시켜가는 과정이 적응이며 진화다. 그러므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자신과 후손을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며 에머슨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 


넷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태초의 자연에서 지금 이 현란한 과학의 발달이 무엇으로 이뤄졌겠는가. 계속 창조적 기술들이 개발, 유통, 대중화되고 또다시 엄청난 혁신이 일어나고 이 모든 과정에서 ‘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부’는 무한정으로 공급된다. 앞서 양극론의 원리에 따라 공급만큼 수요는 필연적이니 누군가는 세상이 주는 부를 소유한다. 즉, 공급이 부족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고자 욕구하는 자는 세상이 공급하는 부를 부여받고 그렇지 못한 개인은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모순 속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는 어떠한 원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부는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무한정 공급되는 부를 누군가는 무한정으로 소유할 수 있다.


다섯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는 개인과 개인이 상호 연결되어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주고받으며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인간은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에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사회는 사회전염(Social Contagion)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인 가치로서 ‘부’의 양은 분명 사회적 영향과 상관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질서에 있어 인간의 거래를 위해 창조된 것이 돈, 즉, 화폐다. 따라서, 돈의 가치 역시 사회적인 기준을 지닌다. ‘돈’이라는 정량적인 가치를 너머 총체적 관점에서의 ‘부’를 소유한 자가 분명 더 이로운 영향을 미칠 확률이 높은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나아가 사회에 이로운 사람이 된다는 증거다. 


이상과 같이 관념론적인 접근에 의해 ‘부’와 부를 소유한 자, 

즉, ‘부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과 관점은 

‘개인의 부'는 사회를 더 선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진화시키는, 긍정적이라는 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구하고 쓰고 만들어놓은 수많은(최근 이것저것 마구 튀어나오는데 정말 많더라) 나의 창조물들을 모아서 지금 나는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자가 되려 한다.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부자가 되려 일하고 노력한다. 

정신적, 관계적, 사회적, 육체적, 정서적, 경제적 자유를 지닌 자.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균형있는 성장을 이룬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일터, 그 사람 자체가 선한 사람일수밖에 없다. 왜?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는 많은 이들을 성장시키니까. 


나도 내가 개념화한 부자가 되려 한다. 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내가 이 글을 쓰며 나의 사고에 '부자가 될 수 있는 논리'를 만든 때부터.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될 수 없는. 하지만 나는 '누구나'가 되기로 했다.


내가, 내 삶이 '증거'가 되는 삶이라면 참 좋겠다.

우리는 경험과 증거를 옆에서 본다면 따를 수 있으니까.

내가 책에서 증거들을 찾아 따르듯 나는 누군가의(특히 자식들의) 증거가 되면 좋겠다.


찐한 눈물이 흐르면서 이 글을... 용기있게 발행해본다.


*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쇼펜하우어, 2016, 동서문화사

* 세네카의 인생철학이야기, 세네카, 2016, 동서문화사

*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 재인용

*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2010, 동서문화사,

* 에머슨 수상록, 천년을 같이 있어도 한 번의 이별은 있다, 랄프왈도에머슨, 2013, 나래북

* 플라톤의 대화편, 플라톤, 2008, 창, 

* 귀곡자, 귀곡자, 2016, 자유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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