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에 대한 소고
아직 달이 떠 있는 새벽,
테라스에 나가 귀를 기울이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소리 가운데 툭! 내 조용했던 귀를 자극하는, 아주 기묘한 새소리가 들린다. 이 새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언어를 나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재주가 없다. 자음과 모음의 합으로는 결코 만들어내지 못할, 인간의 언어의 한계에 봉착한 내가 굳이 소리를 활자화시킨다면 'ㅇ~ㅈ~ㅣ~ㅣ~ㅣ' 뭐, 이런 소리다.
우리집은 도시에 있지만 북한산을 끼고 있어서인지 자연에 근접하다고 할 수 있다. 앞을 보면 6차선도로지만 뒤를 보면 가끔 고라니가 날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직박구리와 까치들의 영역다툼을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성적으로 아파트를 싫어하는 나는 도시 속 자연에서 이리저리 이주했고 여기도 그 중 하나다.
컴컴한 새벽, 나의 '보는'것이 차단된 이 시간, 나의 모든 감각은 '들리는' 것에 자연스레 힘이 모이는데 그 때 내 귀에 접선된, 정적을 깨는 O, ㅈ, ㅣ..우는 새의 울림은 참으로 기묘하기까지 하다. 이 울음은 나의 '듣는' 기능너머에서 어느 생명체와 무언가를 주고 받는 것이겠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신호를 주고 받는지 내가 알 도리없지만 이들이 뭘 말하는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생명들이 내 곁에 머무는 것에 감사함이 크고 경이로움까지 느낀다. 우리집 구석 어딘가에 숨어 살다가 청소하는 나의 걸레질에 방해받고는 8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왜 자기를 건드리냐고 짜증내는 거미나 고양이들에게 쫒기며 셀 수 없는 다리로 여기저기 도망치는 돈벌레나 테라스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툭하면 집안으로 날아들어 나를 깜짝 놀래키는 노린재의 어설픈 날개짓소리나, 나는 이들이 징그럽다거나 귀찮다거나 무섭지 않다.
눈에 보일듯말듯 작은 거미를 만나면 살려서 밖으로 보내기에 나의 손은 너무 크고 구석으로만 도망치는 발빠른 돈벌레를 고양이로부터 피신시켜주기에 나의 어깨는 너무 넓고 팔도 너무 짧다. 얘네들을 만나면 신나게 사냥준비를 하는 우리집 고양이들과 얘네들을 어떻게든 살려 밖으로 이주시키려는 나는 잠시 경쟁을 치르지만 내가 자기들을 돕는 존재란 걸 알리 없는 벌레들은 나를 피해 오히려 고양이에게로 돌진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어떤 녀석들은 고양이의 날렵한 앞발에 낚아채여 결국 사지로 몰리기도 한다.
결국 물티슈로 시체처리만 도맡는 나이지만 우리 집을 찾아오는 날개있는, 다리많은, 이름모를 이 녀석들에게 나는 익숙해졌고 반가워졌고 나의 터를 허락하게 된 것이다. 날 찾아온 녀석들은 자연좋아하는 나의 허기를 달래주는 대가로 무단침입 및 거주에 세를 냈다는 듯 당당하게 이 집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고 나는 이 녀석들과의 동거에 익숙해지고 있다.
아니다,
가만.
내가 얘네들에게 세를 내야 하는 거였나?
재작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같은 손님이 방문했다.
쌍살벌이다.
재작년 방문했을 때엔 이 벌의 존재 자체가 공포였었다. 테라스로 나가는 창문 바로 입구에 얘네가 터를 잡았기에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나는 단호했었다. '내가 괴롭히지 않으면 얘네가 나를 해칠까?' 그럴 리 없을 것 같았고 분명 탄생시킬 아가들을 위해 안전하게 벌집을 지어도 괜찮을 장소를 본능적으로 물색하여 택한 곳이 여기인데 내가 내몰면 안될 것 같은 야릇한 보호본능도 생겼던 것 같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들은 대단한 건축솜씨를 보이며 육각형의 벌집을 만들어가더니 이내 그 속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애벌레들도 나에게 보여주었고 어느 날 집만 남기고, 아니 그 속에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한채 죽은 몇마리의 벌들은 남겨둔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춰 텅빈 집을 바라보며 며칠간 터주를 그리며 1년 뒤를 기약하는 아련함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그 기다림은 3월이 되면서 다시 나를 자극했고 '올해도 오겠지?', '올해도 어디 다른데서 터찾아 헤매지 말고 여기로 오렴' 바라는 나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들었나보다. 엊그제 한마리가 꿈틀꿈틀 대롱을 만들더니 테라스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자기 좀 보라는 듯 자랑의 날개짓도 한다. 이제 곧 친구들을 불러오겠지. 한마리가 두 마리가 되고, 두 마리가 네마리가 되겠지. 처음 탄생한 육각형은 두 개의 육각형으로, 네개의 육각형으로 단단하게 고정되겠지. 저렇게 매일매일 꾸준한 반복속에 탄생한 프로폴리스 벌집안에 여왕벌이 알을 낳으면 한여름 35도를 치닫는 고온에서도 어떤 세균의 번식도 막아내는 든든한 보금자리가 되겠지.
아, 그런데 정말 벌은 너무 열심히 일한다. 마치 벌집을 만들고 알들을 지키는 것이 모든 생의 전부인양 단 한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수시로 들여다보지만 볼 때마다 정신없이 일에 열중이다. 감탄하고 감동받고, 여하튼 요며칠, 앞으로 얘네들이 떠날 때까지 나의 하루는 얘네 들여다보는 재미에 좀 더 분주하게 다리와 심장이 움직일 것 같다. 벌은 나에게는 전혀 위험을 주지 않는다. 내가 위험을 가하지 않으니 나를 안전한 대상으로 인정했나 보다. 벌과 눈을 마주치더라도 벌은 전혀 나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는 것을 느낀다. 희한하다.
며칠전부터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날이 이어지면서 작년에 떨어진, 그리고 내가 받아놓은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설악초다! 싹만 보고 딱! 알 정도가 아니라서 혹시 설악초가 아닐지도 모르나 설악초를 심었던 곳인데다 설악초씨를 며칠 전 심었기에 설악초라 믿어본다. 여전히 와주었구나. 감사하다.
세네카의 가르침대로 '보잘것없는 동물한테서 인간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없다면 부끄럽게 여겨야'한다. 설악초도 자신의 땅에서 어떻게든, 쌍살벌도 온생을 다해 어떻게든, 뭘 하는지 도통 모르지만 돈벌레부터 갖가지 곤충들도 어떻게든 온생을 다해 자기의 역할과 직분에 너무나너무나, 감히 이들 앞에서 삶이 어쩌구를 논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단 하나의 명제만을 나에게 미친듯이, 명확하게, 알려준다.
'나도 세상에 나와 내 할일 하니 너도 네 할일이나 해라.
이리 내 역할 다 하고 죽을테니 너도 네 역할 다 하고 죽어라'
동식물이나 곤충에게도 절도를 지켜줘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겠지.
특히, 벌에게서 나는 커다란 가르침을 얻는다. 몸집에 비해 큰 침을 가진, 지나치게 호전적인 녀석들이지만 여왕벌은 침이 없다. 왕이 무기를 쓰지 않으면서도 전체를 다스린다. 나의 인생에도 남을 해치거나 밟고 일어서야 할 어떤 무기도 필요없다.
그저 내 일상자체가 나를 보호해주는 무기여야 하며
내 일상자체가 다른 이들과의 조화속에 존재해야 하는,
그렇게 나로써 딱 그 자리에서 내 역할에 순종한다면 나라는 사람,
내 삶 자체가 '필요하여' '쓸모있는' '보호되어야만 할' 한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유해성, 환경에 대한 이상설, 인간과 타생명체와의 공존. 뭐, 이런 거창한 건 잘 모르겠다. 나 자체가 그리 폭넓은 지식이나 생명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내게 분명하고 명확한 하나의 기준은 세워져 있다.
그저 '나에게 오는 생명들이 번창'하길 바란다는 것.
나를 찾아온 생명들-생물과 무생물 모두-이 모두가 번창하길 바란다.
여기 이 공간이 필요해서 지금 이 시간에 맺어진 나와의 인연들이
모두 자신의 쓰임대로 잘 쓰이고 그렇게 자신의 후손을 위해 남길 것들을 잘 남기고 가길 바란다.
씨앗을 퍼뜨릴 식물이라면 씨앗을
알을 낳아야 할 생명이라면 튼실한 알을
새끼를 낳을 동물이라면 건강한 새끼를.
이렇게 한생애 자신의 쓰임에 충실한 생명들이
나에게 와주어 감사하고 나에게서 떠나며 삶을 알려주어 또 감사하다.
정신을 계승시켜야 할 인간이라면,
나도 인간이기에 정신에 충실하게 오늘을 살아야겠지.
설악초는 설악초가 되는 것만을 위해 한 계절을 애쓰겠지.
벌은 벌로써 태어난 자체이유를 현시하려 이 계절 부지런하겠지.
벌은 집을 지으며 생각하겠지.
설악초가 얼른 풍성하게 꽃을 피워주길.
그렇게 자신의 자손이 태어나면 그 곳에서 요기를 채울 수 있기를.
그리고 믿겠지. 설악초가, 채송화가 화려한 꽃을 피워주리란 것을.
이들의 연합은 또 다른 거대 생명체인 나를 즐겁게 해주다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겠지.
나도 나로써 이 계절에 부지런떨며 애써야지.
내 옆의 누군가도 그리 애쓰는 것을 믿어야지.
그리고 함께 연합하여 세상을 즐겁게 해줘야지.
그렇게 진리에 순종했던 나를 남기고 생을 마감해야겠지.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본성위에 말뚝을 박고 서서
자신의 자체목적의 길을 걷는다면
그렇게 세상의 소용돌이 정중앙에서도 흔들림없이 걷는다면
세상의 품에서 강인하게 자신이 자라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나로써 존재하기 위한 역할로 내 시간이 연계된다면
거대한 세상이 소소한 일상으로 다가옴을 명철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생명들이 내 곁에서 자신들의 두렵고 어렵고 그러면서도 당당한 삶을 내게 가르친다.
이들보다 훨씬 우등하다 자신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이들은 삶의 본질과 본성과 결과를 짧은 기간동안 여실없이 내 앞에 투사하고 사라진다.
가끔 비굴하게 숨고 싶고 억울하여 토하고 싶고 어려워 놓고 싶은 순간과 마주하는 내가
과연 이들 생명체보다 더 우등하다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아직도 내가 알지 못했고 감추고 싶었던 나의 이면을 알아차리라고
지금보다 더 겸손해져야 세상속에서 세상밖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미물이라 취급했던 자기들이 얼마나 단순한 위대한 정신으로 자기삶을 살다가는지 보고 배우고 좀 알라고.
천시(天時)의 정상운행에 따라서 걸어야 한다고
이들이 내 거주지에 주인마냥 동거를 시작하려는가보다.
아니, 이들 거주지에 허락받지 않은 나의 동거를 허락했나보다.
이 집의 값은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치렀어야 했던 것을.
과연 자연의 땅의 주인이 왜 인간이어야 하는지 나는 근원적인 의문까지 들며 계산을 엉뚱한 곳에 치른 듯하여 억울하기도 하다. 내 것이 아닌 것에 계산도 치르지 않고 살면서도 왜 비밀번호에 걸쇠까지 쳐닫고 사는 것인지 나는 갑자기 괴이한 느낌에도 사로잡힌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새벽,
ㅇ..ㅋ..ㅣ..우는 새는, 쌍살벌은 어디서 비를 피하고 있을까..
감히 후레쉬를 비춰 보는 것마저 녀석에게 해가 될까 싶어 어둠속을 보지 못하는 나의 시력만 탓할 뿐
자연의 온갖 장난을 오로지 몸뚱아리 하나로 해쳐나가는 녀석들의 본능과 배포가 부러워 미치겠다.
오늘 새벽, 지금 나는 심하게 질투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에게서 배우라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그간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떠벌린 나 자신을 간파해버려
심하게 부끄럽다...
*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 2016, 김현장역,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