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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27. 2023

'메리에머슨'처럼 나이들고 싶다

'사람'에 대한 소고

사람이 보인다.

웃음에 가려진 비굴함이

정직에 가려진 변명이

예의에 가려진 아첨이

칭찬에 가려진 무관심이

자선에 가려진 탐욕이

고급스러움에 가려진 졸열함이

연륜에 가려진 치기어림이

정의에 가려진 독선이


그리고 

무엇보다

숨겨뒀는지 가려졌는지 본인도 모르는지 

말속에 담겨진 어리냥이, 비겁함이, 비굴함이, 생색이.


그런데 어쩌나..

표정이, 눈빛이, 낯빛이, 근육이

다 말해주는 것을...


나의 오래된 수첩을 뒤적거리다 어느 날 끄적거린 글을 발견했다.

좀 놀라웠다.

내가 이랬었구나.. 싶어서.


떨어지며 자신을 박살내봐야 두려움의 본질을 알 수 있고

들개로 사는 시간을 보내봐야 싸움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고

엎드려 통곡하는 날들을 보내봐야 더는 거짓에 속지 않고...


아마도 내가 많이 힘들었나보다. 사업에, 연구에, 연년생 두 아이 키우기에, 잦은 다툼에... 당시를 기억하면 나는 내 역할에 참 열심이었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상처가 깊었던, 그런 시절에 아마도 나는 스스로에게 이리 주문을 외우게 했나보다. 많이 힘들었던 그 시절들, 나는 '사람들이 참 너무하다.' 싶어 사람이 두렵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나를 해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웃음 뒤에 숨은 모순이 보이는 내가 오히려 더 싫었다. '나는 감정없는 냉혈동물이고 싶다'를 바랄 정도였으니 나는 사람들에게 받는 실망감과 억울함을 이겨낼 근육이 없이, 나약할대로 나약해진 나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는 근육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의도를 가지고 해끼치려 한 것이 아니라 나의 관성과 관념이 나 스스로를 해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간절히 바랬다.


상대의 이면에서 그의 치졸함이 드러날 때 더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용기는 용기낼 수 있을 때 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내야 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

분명하게 '네', '아니요'라고 눈치보지 않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인식이나 자기습관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말과 표현에 상대에 대한 아첨의 작은 조각마저 스스로 없애는 비굴하지 않은 사람.

본질에서 벗어난 사실을 다시 본질로 끌고와 대화를 이어갈 명석한 사람.

자기를 보여주려 하지 않고 사실을 표현하더라도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

어느 정도의 번역이나 통역이 필요하더라도 어떻게든 애쓰며 자신의 의미를 전하려는 사람.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더 큰 진심으로 상대에게 본질을 보여주려 애쓰는 사람.

비판과 논쟁을 예의로 포장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내뱉는 사람.

포근한 거짓위로보다 따끔한 조언과 충고로 상대에게 더 큰 신뢰를 얻어내는 사람.

지성을 한순간의 오락이 아닌, 격조있는 쾌락으로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


... 을 원했다.

그러나

참으로 드물었다.


지금도 어쩌면 이런 사람 찾기 어렵겠지. 하지만 나는 '상대나 대상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는 정확하고 명확한 사실 속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에 초집중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의 향기가 무엇인지, 당시 그러한 냉랭했던 기운들이 왜였는지, 나에게 과부족은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씩 어른답게 알아간다. 


지금의 나에게 '사람'에 대해 묻는다면 

'참... 아름다운 존재'. 

'참... 끊임없이 샘솟는 존재'

'참...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 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지금의 나에게

이런 사람이 보인다.


어리숙한줄 알았는데 순수함이

무식한 줄 알았는데 영리함이

허술한 줄 알았는데 섬세함이

더딘 줄 알았는데 정교함이

아둔한 줄 알았는데 인내심이

화내는 줄 알았는데 배려심이

냉정한 줄 알았는데 결연함이

무심한 줄 알았는데 철저함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쓸 것을 예상하는 언행을 스스럼없이 내뱉지만

결코 경험에서 터득되지 않으면 어려울법한 진리의 실천이

끝없는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실천이

깊은 사고와 단단한 사유의 길에서 깨달은 덕(德)의 실천이

자연스레 전해지는 그런 사람.

그렇게 행동 이면의 진심이 광채로 풍겨져 나오는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리라.


소로우가 여성 가운데 가장 대화하기 좋아하는 여성인 메리에머슨(그녀는 랄프왈도에머슨의 숙모이며 당시 나이 75세였다)

나도 그녀처럼 나이들고 싶다.


소로우에 의하면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여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사색가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끈기를 발휘해서 알아내고 싶어하는 여자, 

그녀가 가는 곳마다 그녀와 관계맺는 지식인이 있는,

말동무에게 최상의 생각을 말할 기회를 제공하는 재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고에 담긴 지성을 이해하는,

자신이 아는 여성 중에서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대화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여성.


사람이 싫었고 두려웠고 피했지만 

이제 사람을 아름답다, 감사하다, 귀하다 여길 수 있는 나로 되어 가는 지금,

나도 메리에리슨처럼 70이 넘어도 30대의 총각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편하게 대화하며 함께 사색하며 사유한 것을 나누며,

보태줄 지혜가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그런 여성으로 나이들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믿음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제안을 하고 들어주는 것으로 인해 서로가 서먹해지는 관계가 아니라 

어떤 이해관계없이 말하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 나란히 한참을 걸을 수 있는 관계다.

이 점만 확신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제안도 다 수락할 것이며 나는 어떤 제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계로 인해 내가 

책속 죽은 이들보다, 펜보다, 책상보다, 그리고 자연보다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사람, 지담이 되고 싶다.


-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일기, 윤규상역, 2003, 도솔.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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