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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16. 2023

'간절함'을 품은 당신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봅니다.

'간절함'에 대한 소고

후다닥 놀라서 깼다!

지금 몇 시지?

최근 들어 '글'이란 것이 조금 무섭고 '글'이 나를 자꾸만 들여다보게 하여, 어쩌면 나를 들여다보며 저어기 위에서 소리치는 것이 '글'로 자꾸만 튀어나와 울고 싶을 때가 많아서인지 '글'을 자꾸 피하려는 나와 만난다. 그래선지, 매일 새벽 5시전에 발행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깨고 싶다는 '미친'생각도 들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왜 이런 약속으로 너 스스로를 괴롭히지? 질책도 하고. 

정말 바보같은 시간을 어제 저녁 흘려보낸 후

마치, 시험전날 새벽에 일어나 벼락치기로 교과서라도 보려는 과거의 나처럼 후다닥 놀라서 깨버렸다. 

아! 몇시지? 

다행이다. 아직 시간 있다.


'미친', '바보같은'을 이긴 '후다닥'은 '간절함'이었다.

소중함과 시급함의 경계에서 글자 그대로 '달이 중천에 떠 있는' 이 시간

내 두 다리는 종종거렸고 내 머리에는 '바보', '왜?', 라는 단어가 물러나고 '간절함'이 떡... 하니 자리잡아버렸다. 


나는 간절하구나...

정말 절실하구나...

진심으로 쓰고 싶구나...

어떻게든 쓰려는구나...

글로 나를 드러내고 글로서 세상과 만나며 글로 나의 생을 끌고 가고 싶은 것이구나


나는 간절하구나...

눈물콧물이 양치질하는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엉망된 얼굴이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치지만 나는 나를 쳐다보기 어려웠다. 시뻘개진 내 눈을 보니 자꾸 눈물이 더 흘렀다. 항상 나보다 부지런한 악마를 탓하면 뭐하리.. 그저 '간절한' 내가 애잔해서... 쳐다보기 어려운 나를 그렇게 깊게 들여다보고 거울속 나를 쓰다듬었다. 


나는 간절하구나...

간절하다는 것은 아직 갖지 못했다는 것이니

나는 갖고싶구나...

나는 걷고 싶고

나는 가고 싶은 것이구나...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구나...


발행을 누를 새벽 5시까지 시간이 얼마없지만, 

나처럼 무언가가 간절한 이들에게 '우리 같이' 간절한 그것이 이끄는 길로 가보자는 글을 써야겠다...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지금, 

이 자리, 여기에서 저는 '간절한 당신'께 이 글을 보내며 손을 내밀어 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욕망', 즉,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없으면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어 인간이길 스스로 포기하거나 더 심하게 말해 인간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저 생을 사는 것이 아닌 연명하려는 것이며 생각하고 살지 않고 사는대로 생각하는, 영혼없는 육체로만 존재하길 맘먹은, 그렇게 결핍된 모습이겠지요. 우리는 종종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뱁새가 황새쫒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관념에 지배되어 욕구와 욕망, 탐욕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을 원하면 탐욕이지만 정당하게 바라면 욕망이란 말입니다.

욕구하는 것을 끝없이 욕망하는 것이 더 본성에 가까운데 말입니다.

'윤리'를 기준으로 '악'과 손잡지 않으면 탐욕이 아닌데 말입니다.

나를 여기서 저기로 이끌어 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욕구인데 말입니다.

초월된 어떤 힘이 세상과 나의 조화를 위해 나에게 보내는 신호가 욕구인데 말입니다.

가슴 속에 담긴 소망이 세상으로 나가려 내 의식을 자극한 진동이 욕구인데 말입니다.

결국, 내인생의 서사는 나의 욕구가 이어져 만들어지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송충이인 내가 솔잎말고 다른 것도 기웃거려야 하지 않을까요? 

쓰더라도 먹어보고 뱉으면 되잖아요. '아 앞으로 저런 건 먹으면 안되겠구나' 알게 되겠죠.

뱁새인 내가 황새처럼 다리를 찢어 늘려서라도 따라가보려 애써야 하지 않을까요?

감이 떨어질 때까지 감나무밑에서 입을 벌린채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요?

리처드바크의 갈매기처럼 잠시 갈매기인 것을 잊고 날아봐도 되지 않을까요?


간절한 욕구를 향한 욕망은 지금 내게 무엇이 결핍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내면의 메세지이며 내 삶을 어떻게 행복으로 이끌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그러니 욕망하지 않으면 나의 결핍을 모르는 자만한 자라 할 수 있으며 욕망하지 않으면 '만족'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현실과 타협하며 연장하는 삶을 살 지도 모르지요. 

마치, 벼룩이 더 뛸 수 있는데도 갇혀 있던 비이커의 딱 그만큼만 뛰는 것처럼요.

어릴때부터 말뚝에 묶여 살던 코끼리가 어른이 되어 힘이 남아도는데도 말뚝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요.


추구하는 바가 크면 클수록 주변의 간섭주의자들의 조언 아닌 조언도 심해집니다.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냐?'면서요.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도 '욕구? 욕망?... 그냥 살아! 인생이 다 그렇지!'라고 치부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분들의 삶을 비하하거나 틀렸다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삶을, 당신은 그 삶을 선택한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손내미는 상대는 저처럼 간절한 것을 품고 있는데 혹여 자신의 관념으로 그 간절함을 외면했다면 이제 꺼내보자 독려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당신의 가슴을 뚫고 나오려 지금 이 글이 당신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닐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연을 결코 우연이라 치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도 자석이 되어 각자의 간절함을 세상에 드러내보자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하지 않는 것,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버린 것, 세상의 울림에 외면하고 사는 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일지 모르니까요.


내가 가고자, 얻고자, 보고자, 하고자 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더 크게 욕망하십시오. 

더 강하게 간절해지십시오.

그러자니 저처럼 두렵기도 하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싶어 아주 자주 되돌아가려 하겠지요. 아마도 '지금의 나'와 '원하는 나'가 엄청 차이가 있어 그럴 겁니다. 되고는 싶은데 되려니 너무 멀고, 가고는 싶은데 가려니 힘이 들고, 먹고는 싶은데 먹자니 너무 많고, 하고는 싶은데 하자니 기운이 없는거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아는 지금의 나보다 진짜 나는 훨씬 큰 나일지도.

내 앞으로 걸어오는 시간이 나를 그리로 데려가기 위해서일지도.

지금 이 글이 당신 눈앞에 등장한 것도 혹시 자연이 주는 신호일지도.


그러니 두려움으로 돌아서지 말고 두려워도 큰 차이를 둔 '원하는 나'를 그리세요.

머리속에 기존의 나의 인식과 감각들이 '되겠어?', '네가?'하며 비웃어도 비웃는 나는 과거의 나밖에 몰라서입니다. 이끄는 나는 과거에 등돌린 '해낸', '미래의 나'이니 그 손을 잡으십시오. 

비웃는 과거의 나는 그래서 내가 등을 돌리고 떠나버려야 합니다.  

행성의 눈으로 우주를 보니 그 녀석은 좁쌀만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우주의 눈으로 아직 작은 행성인 나를 바라보는 '미래의 나'가 내민 손을 잡으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의 나'와 '원하는 나'의 차이만큼 '나를 키워내는 것'뿐입니다. '미래의 나'의 지시를 따르면 됩니다. 매일매일 이것만 해. 양이 축적되면 반드시 폭발하거든. 매일 하기로 한 그것만 해! 라는 것만 매일 하면 됩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매일 한땀의 수를 놓으면 엄청난 꽃이 만들어지지요. 비록, 그 자수의 뒷면은 얼키고설킨 실투성이겠지만 그 한땀이 엉망인 뒷면과 함께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꽃으로 탄생하는 법입니다. 내 하루는 얼키고설켜 민망이고 엉망이겠지만 내가 뜬 한땀의 수는 꽃을 향하는 법, 매일 하기로 한 그것을 하십시오. 그 행동에 동그라미치는 하루로 내 하루를 완성하는 것, 그것만 하면 됩니다. 


'지금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나'를 연결짓는 다리는 바로 '믿음'입니다. '원하는 나'가 될 수 있다는, 아니, 이미 되어 있다는 믿음이 굳건하다면, 이 다리는 지금에서 미래로 나를 이동시키기 위해 그 어떤 태풍과 쓰나미에도 끄덕하지 않고 버텨줄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세상도 나를 믿지 않아요. 과거의 나로 미래의 나를 재단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나의 인식을 가득 채운 지금까지의 나를 미래의 나로 다시 채우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창조에 의존하세요.

과거에 의존하지 말고 미래에 의존하세요.

남들의 조언에 의존하지 말고 나의 내면의 소리에 의존하세요.

현실(실체, 드러나있는)에 의존하지 말고 상상(꿈, 머리속에 그려진)에 의존하세요.

내가 나의 인식을 바꿈으로써 나는 그토록 간절한, '원하는 나'에 어느 날 도착하게 됩니다.


선택입니다.

지금의 나로 계속 살지 원하는 나로 나를 키울지

지금의 나도 과거의 내가 선택한 결과이듯이 '원하는 나'도 지금 내가 선택한 결과일테니까요.


‘원하는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나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그 모습이 된 나로부터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결과를 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이렇게 살면 저렇게 될거야'가 아니라 '저렇게 되려면 이렇게 하는거야'여야 한다는거죠.


자, 시작은 '원하는 나'를 간.절.하.게. 욕구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슴에 품고 욕망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나를 상상하여 내 인식을 채우시고.

그 크기만큼 오늘 하루 '해야할 것'에 동그라미를 치면 됩니다.

어떤 날은 엑스가 쳐지겠지요. 괜찮습니다. 다리위에서 뛰는 날이 있으면 넘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저 다리끝에 '미래의 나'가 넘어진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다 썼다.

이로써 나의 오늘도 동그라미.

새벽 5시이전 발행.이라는 나자신과 한 약속을 오늘도 지켰다.........

지금 시간, 23/2/16일 새벽 4: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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