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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06. 2023

익숙했던 나를 떠나보내는 울음 뒤에

'책', '글', '말'에 대한 소고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얇은 지식에 만족했었고

몇 줄 그어진 스팩에 스스로를 대견해했고

잘 자라주는 아이들덕에 어깨를 으쓱해대는

그냥 그런 오지랖넓고 때론 잘난체도 마다않으면서

애써 겸손의 손짓을 보이면서도 뒤로는 혼자 입꼬리를 올리는

그냥 그런 얇고 눈치빠르고 '내가 난데'하는, 

건방과 겸손을 잘 믹스해서 사는 것에 요령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이 날 선택했다는 것을 이제 믿는다.

소크라테스부터 데카르트, 에머슨, 스웨덴보리, 아우렐리우스 내가 추앙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모두 믿는 이 명제를 내가 믿기까지 무려 50년이 걸렸다. 천주교신자이면서도 성당은 그냥 나에게 재미나게 노는 곳이었지, 경건하게 영적인 성장을 키워내는 곳이 아니었다. 전례부를 하며 기타치고 노래부르며, 친구와 선후배와 노래와 재미가 있는, 그렇게 노는데도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을 뿐. 나에게 신을, 혼을, 영을, 그리고 내적성장을 키워주는 곳은 아니었다. 성당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성당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신이 날 선택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과거의 나를 이리 변화시켜낼 수가 없다. 제 아무리 선생이 각목들고 쫒아온대도 저랬던 인간을 여기다 갖다 앉혀놓을 수는 없다. 나는 지금의 나에게 주입된(스스로 주입한 줄 알았는데 신이 주입시킨) '인생이, 내가 놀이터'라는 관점을 갖고 사는 내가 도저히 나같지 않다. 아직도 나는 내가 낯설다! 그래서 아마 나는 '나를 보는 또 다른 눈'이 저절로 운좋게 생겨버린 것일 지 모르지만, 무조건 이건 인간의 짓이 아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저랬던 나를 여기 이 자리에 이런 모양새로 앉혀놓을 수 없다. 왜? 난 완전 고집불통에, 책을 읽지 않아도 나름 잘 나갔었거든.


2014년경?

말 그대로, 부족함없이 잘 나가던 나는 그 속도보다 더 빠르게,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공허함에 빠져버렸다. 바로 앞 낭떠러지를 보지 못하고 룰루랄라 잘 나가던 나에게서 신이 잠깐 한눈판 것을 눈치챈 나의 전령이 재빠르게 신에게 달려가 날 구원해달라 매달린 결과, 급하게 나의 행보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 

이것은,

좁아터진 내 지식체계에 이것저것 다 가둬둔 채 그것으로 세상에 당당한 줄 알고 서 있는 위태로운 날 구원해준 것이었을까? 아니면, 대자연의 입김을 모른채 달려가는 괘씸죄로 나를 혼내려는 처사였을까? 여하튼 나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의 의미를 잃은 짙은 안개 속, 지적허기와 공허함, 허무함, 뭐 이런 쓰나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를 점령당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 사태도 없었는데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그런 공허함

아무 바람도 없었는데 아무거나 부여잡으려 바랬던 그런 막막함

아무 계기도 없었는데 아무 신호라도 달라 매달렸던 그런 적막감

아무 필요도 없었는데 아무나 내 손 좀 잡아달라 간절했던 그런 고독감.


책상앞에 한줄세워져 날 감시하는 나의 스승들.


신이 나를 선택했다는 확신의 연계는 아마 그 때로 거슬러가는 것이 맞는 듯하다. 전령에 의해 브레이크에 걸린 내가 손에 잡았던 것은 책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달콤한 사탕에 유혹당하듯 책은 내 일상 모두를 점령했고 이해를 하든 못하든 유일하게 매달리고 애걸복걸하며 서서히 나는 책속으로, 세상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경이 안내받듯 이리로.. 저리로.. 그렇게 나는 (지금 생각하니) 안전한 길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여타 다른 이들처럼 술이나 쇼핑, 또 무언가로 중독되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책'으로 안내되었다는 것은 놀라고도 놀랍다. 신이 날 선택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다. 나와 책은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양극에 대한 깨달음과 철학을 이해해가던 어느 날, 양말을 신다가 나는 통곡했다. 아무 계기도 이유도 사태도 없었다. 우습게도 그냥 양말신다가 울었다. 지금도 나는 그 장면, 침대 옆 서랍장 앞에 쭈그려앉아 양말신다 울던 내 자세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왼쪽 다리는 접은 채 무릎을 세운 오른쪽 발가락에 양말을 입히다가, 나는 그냥 울었다. 아니, 통곡했다. 꺼이꺼이 그냥 그 자세 그대로 계속 울었다. 당시엔 말도 안되는 이상한 경험이었지만 지금은 안다.


'익숙했던 나를 떠나보내는' 그런 울음이었다는 것을.


울어야 할 것에 울지 않고 웃어 넘겼고

웃어야 할 때 웃지 않고 냉정했으며

냉정해야 할 때 감정이 선을 넘었고

선을 무시해 버려야 했을 때 이성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렇게 아는 것, 가진 것은 많지만 어리석었던 나를 신이 맘먹고 가르치려 잡아세운 것이다. 

그리 애쓰며 사는데 그리로 가면 안된다고 내 손을 낚아채주셨던 것이다. 

책을 통해. 무조건 책을 통해 그냥 그대로 나를 들여다보라고 책속에 현존하며 나의 눈이 가슴으로 이어지도록 붙잡아 주셨던 것이다.


익숙했던 내가 떠난 그 자리는 낯선 나로 채워져갔다. 

공허했던 그 자리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으로 채워져갔다.

늘 지겨웠던 일상은 나를 알아가는 재미로 채워져갔다.

관심밖의 세상은 내가 가야할 길, 내가 서 있어야 할 위치로 채워져갔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니, 책 속에는 미련하고 답답한 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이 것을 손에 쥐고 세상을 살라 알려주기 위해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수십년, 수천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코끝은 또 찡해진다)


기다리다 지치지도 않은지 책을 펼치자마자 딱! 그 문장을 내 앞에 들이밀어

결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나의 스승이 있다.

책 속의 스승은 아주 무섭고도 아주 너그럽고 아주 예리하며 아주 관대하지만, 

아주 아프게 날 다그치고 내치고 호통치고 

그렇게 지금의 나를 찢어서라도 키워내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보던 눈으로 표정을 보게 하고 

말을 듣던 귀로 의미를 듣게 하고

사태를 판단하는 이성을 잠시 멈추게 하여 인내를 알려주고

믿고 있던 지성을 의심케 하여 지성을 지혜로 승격시키며

소유하던 것의 가치를 허물어뜨려 보이지 않는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책은 

아는 것을 모르게 이끌고

모르는 것을 새로운 앎으로 이끌며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문이다.

이렇게 책은 나에게 친구이자 동료, 스승으로 자신의 곁을 내주며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다시 여기로 나를 이동시킨다.


알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깨지고

깨지면 깨닫고

깨달으면 깨우치고

깨우치면 소유하게 된다.


책과 친해진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무지한 나지만 이제 나는 용감하게 글도 쓴다.

책에 둘러쌓여 살고 있고 이제 내 안으로 흡수된 모든 것들에게 나의 색을 입혀, 때론 거두며 글로서 세상밖으로 내놓고 있다. 말과 글은 나를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이리라. 누군가의 말과 글도 그러하리라.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글로 나의 삶이 변하고 나의 글로 누군가의 삶은 변하게 될 것이다. 말과 글의 분명한 기능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기에 나에게 '말'이란, '글'이란 위험하기도, 성스럽기도 한 대상이다. 내 글도 그래야만 한다. 내가 누군가의 글로 변화되었듯 내 글 역시 누군가에게 이로움을 주는 방향을 향해야만 한다. 


그래서, 글과 말은.

능력이 아닌, 의지여야 하며 

기술이 아닌, 방향이어야 하며 

목표가 아닌, 목적이어야 하고,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의 말과 글은 나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하여,

나의 삶은 가식과 거짓으로 포장, 분장, 치장된 것이 아닌 나 자체여야 하기에

나는 책으로 흡수된 모든 것에 나를 연관지어 다시 나로써 세상에 내놓는 이 몇 마디, 몇 줄을 위해

나의 삶부터 진실과 진리의 옷을 입혀 질서를 잡아놔야만 한다.


말과 글이 품은 양면성. 모순. 함정, 위험.

분명 책 속에,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강의들 속에 이런 것들이 숨겨져 있다. 나는 그간의 배움을 통해 감히 이것들을 알아챌 수 있는 감지(感知)와 기시(旣視)가 있다고 말하련다.


진리를 알려주기보다 재치있는 표현과 문장으로 사람을 놀래키고 다급하게 건드리며 불안에 떨게 하고 감정에 빠뜨린다. 화려한 언어에 감춰진 다소 부자연스러운 억지는 읽는 이가 자신이 몰랐던 것을 깨달은 것같은 착각에도 빠뜨린다. 현학적인 표현들이 이들의 주무기가 되어 너도나도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나는 이것이 아주 통탄스럽지만 내가 그것들을 비판할 위계에 있지 않기에 나는 나라도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 부족한 어휘력과 아직 가보지 않은 진리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글과 말을 자주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내 현주소가 그렇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내가 나의 천성에 충분히 진실하니까.


이리 미숙하고 방해에 어쩌지 못하는 나인지라 

나는 아직도 신이 초대한 성찬에 매일 출근한다. 

이제 익숙하게 그 곳을 드나들지만 

그 곳엔 여전히

과하게 치장한 채 나를 유혹하는 위험과

무서운 얼굴로 나를 재단하려 덤비는 고통과

화려한 성찬에 눈돌아간 나를 따끔하게 혼내는, 피하고 싶은 감시와

엉뚱한 곳에서 넋을 빼지 않도록 묵묵히 나를 지켜보는 진리가 있음을 안다.


이제는 제법 그 경계사이에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켜내는 내가 되었다 여기며 

오늘도 나는 신이 날 가르치려 몸을 숨기신 채 기다리는, 신의 성찬식에서 나의 천성을 더 일깨운다.

내일도, 모레도,

매일 새벽 나는 그 곳을 드나들겠지.

나를 위해 준비된 성찬 속에서 나의 그릇에 딱 맞는 양식을 담아내고 내 것과 연결지어

그렇게 나와 진리를 섞어 세상에 내놓겠지...

이렇게 책속에서 날 맞이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우주 전체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여 나의 삶의 체계를 다듬고 

이 경험은 독선이 아닌, 직관과 논리의 묵직한 안정감으로 말과 글로 제조되어 세상에 내보내지겠지...


누군가의 말과 글이 나에게로,

나로부터 말과 글이 누군가에게로,

올곧게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걷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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