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에 대하여
에피쿠로스를 읽고 루크레티우스를 가슴 절절히 받아들이며 필서까지 한 지가 벌써 몇 개월전, 이에 버금가는 책이 읽고 싶은데 뭘 읽지.. 라며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읽어야 하는데, 제목만으로도 읽기 싫어 보이지 않게 쳐박아둔 스티븐그린블랫을 펼쳤었다. 왜 펼쳤는지 나는 모른다. 바로 이런 게 이끌림이었고 이런 이상한 끌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에 나는 그냥 펼치고 읽어 내려갔다.
아.. 이건 뭔가......계시같은? 이 느낌, 이건 도대체 뭔가? 나는 이럴 때 뒤로 나자빠질 정도의 신기함에 놀라버린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이 무엇인지 알아버렸고 이러한 근원을 탐구한 이를 신격화하여 자신의 언어로 다시 세상 모든 사물의 본성과 근원을 대서사시로 풀어낸 루크레티우스가 나의 가슴에 중심으로 자리잡아 늘 두근반 세근반, 어디서 '루'라는 한글자만 봐도 그를 떠올리던 시절이었는데,
세상에나! 이 책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가 어떻게 수천년이 지나 지금 우리에게 읽히고 있는지에 대한 대장정을 묘사한 책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 위대한 사상철학자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의 서두에서 이리 놀라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이 책이 그 순간 어떤 이끌림으로 내 손에 쥐어줬다는 것에서 나는 마치 순서대로 차례차례 '이번엔 이 책, 다음엔 저 책'하며 누군가가 내 손에 쥐어주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경험. 말이나 글로는 표현이 안된다.
나란 사람은 역사나 문화사회적인 지식이 박약한데다 기억력도 좋지 않아 뭐든 연결지어 외우거나 담아두지 못하고 항상 단어는 희미하게 한두글자만 머리속에 남아있어 모든 것을 '실루엣'같이 기억하고 어물거리기 일쑤이기에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를 연결시킬리 만무한 나에게 어떻게 이 두 사상가, 철학가들이 가슴의 중심에서 여전이 나를 진동시키고 있는 그 때 이 책이 내 손에서 펼쳐진단 말인가!!!
그리고 이 놀라운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딱! 내게 필요한 내용으로 말이다!!!
내가 어제 '나는 수혜자다'라는 글을 발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놀랍고도 신기한 이끌림을 분명 사례로 담았을 것이다. 내가 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책이 내게 차례차례 오며 나를 선택한다는.
이 책은 에피쿠로스를 신격화하는 루크레티우스의 근원에 대한 철학이 포조 브라촐리니에 의해 찾아지고 필서되어 어떤 과정으로 르네상스의 부활에 영향을 미치고 시대를 초월하여 미국독립선언문에, 그리고 지금의 첨단과학시대의 기본사상이 되어 왔는지를 디테일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담아냈다. 나같이 역사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재미나게 읽을 정도였으니 작가 스티븐그랜블렛은 대단하고 위대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의 짧은 어휘력으로 '위대', '탁월' 이상의 단어를 찾지 못하지만 작은 이 두 글자에 하늘만큼 부피를 불어넣어 크게크게 표현해낸 것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종교개혁 전, 신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던 시절, 매번 등장하는 이단과의 전쟁, 이 시기 절대권력자들은 분명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글자를 아는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수도원의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니 책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의 몫이었으며 종이가 없던 시절 책을 보관했던 곳도 수도원.
신이 절대적이던 시절, 신은 없으며 인간은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외로이, 지구 어딘가에서(밝혀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러한 근원의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무튼 루크레티우스라는 한 남자는 자신이 확신하는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시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마 그는 늘 숨어 살았을 것이다. 종교가 절대믿음이자 권력이었던 시절이었으며 에피쿠로스를 추앙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무조건 화형이었으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반역이었으니까.
책.이라는 것이 지금은 너무나 저렴하게 쉽게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종이와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 양피지에 글을 쓰던 시절에는 누군가, 그러니까 '필서가'로 불리는 이들이 한자한자 양피지에 옮기지 않으면 책은 읽혀질 수가 없었다. 여기서 교황의 비서였던 필서가 포조블라촐리니가 우여곡절(장황한 대장정을 이렇게 4글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바라지만, 우여곡절이라는 단어가 딱 적합하다) 끝에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한 수도원에서 발견하고 필서를 시작했다. 무려 600년간 금압되었던 시였고 그 후 1000년간 숨겨진 후 세상과 만나게 된 시를 우연히, 하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포조는 필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
말 그대로 목숨걸고 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필서한 것이다. 왜? 들키면 바로 화형이니까. 당시는 이단으로 찍혀 지독한 고문과 화형으로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넘쳐 났으니까. 목숨걸고 한글자 한글자 적어 내려가야만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 한글자한글자 옮기게 했을까? 도대체 이러한 소신가진 이들은 어떤 확신으로 자신의 모든 생을 거는 것일까?
사실, 그 시절 책의 소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피지에 잉크가 말라붙어 동그랗게 말려 있는 그것이 펼쳐지지 않은 채 굳어버리기도, 책을 가장 좋아하는 책벌레에 의해 글자가 갉아먹히기도, 수시로 일어나는 전쟁통에 책이 모두 불태워지기도, 종교전쟁인만큼 가장 타깃인 수도원 도서관이 상대의 주요 전지였던 것에서도, 책의 소실은 그냥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리 수많은 이들이 화형을 당하고 그리 수많은 책들이 불에 타 없어졌음에도 어떻게 루크레티우스는 1000년이 지나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대혁명의 시대를 불러왔을까. 포조가 없었다면, 이를 지키려 화형당한 수많은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분명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같이 단순한 사람은 지난 과거의 것들에 굳이 관심을 두지도 감동을 받지도 않는다. 다소 무감각하다. 그렇게그렇게 역사는 흐르는거지. 라며 퉁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어떻게 이렇게 누군가가 한권한권 들이미는 것처럼 루크레티우스가, 포조가 내 인생에, 내 손에 들어온단 말인가? 그리고 내 심장을 두근거리며 내 관념덩어리 지성을 완벽하게 깨부순단 말인가? 이런 강렬한 힘때문에 당시 수많은 이들의 희생, 그리고 책의 기적같은 소생이 너무나 감사하고 신기하고 감동인 것이다. 스티븐 그린블랫도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한다. 책벌레와 같은 자연재해, 전쟁과 같은 인위적인 재앙으로 분명 소실되어 마땅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강력한 위압도 '태어나야만 할 이유'를 지닌 것의 탄생을 막지는 못하나보다. 어떤 인위적인 무기도 그 작은 필서본을 없애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레오나르도다빈치와 보디첼리, 갈릴레오갈릴레이, 미켈란젤로, 토마스모어, 그리고 세익스피어와 몽테뉴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으로 글에 숨겨진 채 대중에게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책을 써내려갔으며(실제 루크레티우스의 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몽테뉴가 소장했었다)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가 그린 세상을 '이상사회'로 묘사한 책이다. 물론 대중에게 읽혀야 했기에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에 반하는 환경으로 소설을 꾸며야만 했지만 이렇게 수많은 문화예술가들에 의해 시대를 훌쩍 넘어 미국의 독립선언문, 그리고 지금 첨단과학 시대의 모든 사상의 근원이 되도록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은, '태어나야할' 것은 태어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 나의 감정은 나의 글재주로는 결코 표현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글쓰기 능력이 부족한 억울한 감정이 들 때는 알랭드보통을 호출하고 싶다.
이 심정을 글로 표현해 달라고 마구마구 조르고 싶다.
루크레티우스라는 한 사람이 죽음을 알면서도 어디선가 묵묵히 기록하기 시작한 자신의 사상.
몰랐던 존재의 발견에 자신의 생애 전부를 걸고 필서하고 지켜왔던 포조 블라촐리니.
이 과정에서 죽음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들.
'인간', '쾌락', '진정한 행복', '권리', '평등', '자유'와 같은 당시 주장할 수 없는 단어를 대중에게 전하고자 자신의 혼을 담아 그려내고 써내려간 수많은 예술가들.
그리고 이들의 긴 여정을 어떻게 과거에서 과거로 찾아찾아 기록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스티븐그린블랫까지.
나는 '위대한' 이들을 지난 수개월을 함께 지냈다.
아주 긴 여행을 다녀온 듯, 결코 가보지 않으면 언어로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런 여행지를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지성의 근원을 의심하고 다시 재배치시키고 있다.
책은. 이런 것이다.
독서란. 나를 죽은 자들이 살아있던 그 시간으로 이동시켜
교과서에 없는,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한다.
내 이해력으로는 결코 불가능에 가까운 감동을 느닷없이 가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말도 안되는, 자주 겪지 못하는, 그래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게 하는, 내 인생역사에 죽을 때까지 떠올리게 하는 그 장면을 만들어내어 내 인생을 다채롭게 꾸며준다.
또 있다.
이들과 보낸 수개월은 나를 자주 이러한 상념에 빠뜨린다.
개인은. 살면서 어떤 무언가에 자기 인생을 건다.
자전거 운동을 하며 보던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서 한참동안 날 멈추게 했던 주인공 이병헌의 대사,
'내 남은 생을 다 쓰겠습니다'.....
'내 남은 생'을 모두 어디에 쓸지 정하고 가는 인생은 얼마나 쫀쫀하고 벅차고 감동일까...
어렴풋이 잡히는 '남은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행복'.....
이를 '소.신'이라 하지 않을까?
나도 내 남은 생을 모두 걸만한, 목숨을 걸만한, 진정 나만의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찾았다면 남은 생을 모조리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쓸 것도, 화형을 당한다거나 숨어지낼 이유조차 없는 편안의 극치인 시대를 살면서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이러한 인생이 스티븐그린블랫이 말한 아름답고 충만한 인생이라면
분명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대신
생을 걸만한 일에서 고통이 오더라도 그리 사는 것이 진정한 나의 삶이 아닐까?
왜 스티븐그린블랫은 이러한 이들에게 그 많은 단어중에 '아름답고', '충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제일 아래 글 참조)
아름답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오감을 모두 충족시키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그 자체에 담긴 멋을 표현할 단어가 없을 때 우리는 그저 '아름답다'라는 4글자로 내뱉는다.
충만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치 않은 상태다.
이미 자신의 것으로 꽉 채워져서 그 무엇도 필요없는, 그래서 세상의 언어로 담아낼 수조차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는 인생이란, 진정 아름답고 충만할테다.
나로써, 내 소신대로, 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러한 것일테다.
과연...
나는...
나에게는...
나의 삶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물려받은 재산을 고대의 유령을 소환하는 데에 쓰면서 아름답고 충만한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중략)
니콜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추구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필요한 다른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 스티븐 그린블랫, 1417 근대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