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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31. 2023

'무지'는 내 인생에 '선(善)'을 보태줄 기회다.

'무지'와 '의지'

나는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무지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무지를 극복하지 못하겠지.

무지를 해결하려는 자체가 오만이고 교만이겠지. 

불가능한 것이지.

괴로운 것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너무 자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름'의 '괴로운 인지'를 나는 축복으로 여기기로 했다.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은,

알고자 하는 무언가가 등장한 영혼의 자극이며

알고자 하는 의지까지 동행하겠다는 감각의 진동이며

의지의 도움으로 '알게' 된다는 지각의 변화일텐데.

더 나아가,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아니 지혜롭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지혜로운 걸음을 걷는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르는 것으로 인식의 크기가 확장된다고

무지의 크기가 줄어드냐? 

아니다.


아는 순간 모르는 것은 더 많아진다.

'어찌 이런 일이!' 싶지만 

하나를 알면 모르는 10개가 등장한다.

계속 더 몰라지고 계속 더 괴로워지고 계속 더 심각해진다.

괴로운 맘은 '의지'를 붙잡고 닥달하지만

의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내 알게 한다.


'의지'라는 놈이 항상 내게 달라붙어 있지 않기도 하고

자기 맘대로 방향을 틀어버리기도 하고

나에게 숨어버리기도 하는 탓에

모르는 채로 냅두기도 하고 

끝내 모르는 상태에서 멈추기도 한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

이 말은 아마도

올더스헉슬리가 말한대로 모르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

'적절한 합리'의 '편안함'쪽으로 나의 의지가 멈춘,

나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모른다면,

모르는 채로 살기로 했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이 더 편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이미 아는 그것에 머무르려는 의지' 때문이다.

모르는 것이 편하다는 잘못된 믿음과 무지, 그리고 자기 멋대로 머무르려는 의지.

이렇게 그릇된 앎에 대한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 또는 무지에서 온다.


'잘못된 믿음'은 안다는 착각이며

무지는 말 그대로 '아는 것이 없다'이니

이 둘은 공(空, 빌공)이며 공(孔, 구멍공)이다.

내 지성에 구멍이 뚫려 비어있는 것이니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채우려는 '의지'다.


무지와 의지가 서로 협력하여 나를 이끄는 것이

'알고자 함', 알아서 '얻고자 함', 얻어서 '잘 살고자 함'

나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잘 살고 싶다.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조금씩 더 나은 부모가, 어른이, 사회구성원이 되고 싶다.


'최초의 무지는 최초의 죄악(original sin)'이라는 올더스헉슬리의 표현에서

내 눈은 잠시 책에서 허공을 향한다.

지금 내가 모르는 것을 발견했다면 이것은 나에게 최초의 무지구나.

이전까지는 '모른다는 자체도 몰랐으니까', 지금 처음 알게된 '모름'은 나에게는 최초의 무지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자 하지 않을 경우, 나는 최초의 죄를 보태는 것이기에

알아내는 여부를 떠나 

나는 무지를 느끼는 순간, '몰라도 돼'라는 편안함보다 '알고자 하는' 의지를 먼저 꺼내야 한다.

나 스스로 내 인생에 죄를 보태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국, 이러한 한문장으로 나는 결론내려 보련다.

'무지의 발견'과 '의지의 출동'은 '앎'으로 나를 이끌며 이 길 자체가 곧 '선(善)'이다.

따라서,

모른다는 것은 내 인생에 선(善)을 보태줄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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