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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16. 2023

1000일의 새벽독서로 배운
삶의 '관점' 9

나는 선수촌에 산다

처음엔 새벽 4시부터였고 지금은 새벽 3시부터. 2시간 이상 새벽독서를 실천한지 1000일을 훌쩍 넘기고 지금은 글쓰기까지 보태어 나의 새벽은 더 다채로워졌다. 나는 나를 탐구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고 'ㅅ'으로 시작되는 3가지, 삶, 사람, 사유(사유하는 사람으로 사는)를 최고의 쾌락으로 즐기며 일상을 보낸다. 이로써 나는, 나의 남은 생을 관조할 수 있는 몇가지 관점을 갖게 되었기에 이를 하나씩 기록해 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 9번째, 

[나는 선수촌에 산다]


인생은 공부한다고 100점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완벽할 수 없고 하얀도화지일 수도 없고 쭉뻗은 아스팔트는 더더욱 아니다.

여기저기 다양한 씨앗을 나이에, 시기에 맞게 뿌리지만 그 중 열매가 맺히는 것은 한두가지밖에 안된다.

씨뿌리다가 끝나는 인생도 있겠지만, 그 중 튼실한 열매 한두개 맺으려 계속 씨를 뿌려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연습을 거친 후 실전에 출전하는 수순을 밟지 않는다.

연습이 실전이고 실전이 그 다음 실전을 위한 연습이다.

한마디로, 계속 연습이며 계속 실전이다.

'동시'에 '연속'으로 일어나는 완벽한 중용이자 인과의 원리로 걸어야 할 길이다.


그래서, 인생에는 초보자를 위한 단계가 없다. 

인생은 어떤 과정도, 단계도, 연습도 생략한 채 내 앞에 사태를 등장시킨다. 

나이와도 무관하고 경력이나 자질과도 무관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보이는 현상으로 무거운 덩어리를 내 앞에 던져버리는 놈이 인생이다.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간파했다 하더라도 난해한 것이 당연하다. 피할 수도 없는 이 덩어리 치우고 걷다 보면 또 더 무거운 덩어리가 내 앞에 던져지는, 인생은 그런 것이다.


나는 늘 초보인데

인생은 나에게 프로를 원한다.


그러니 어쩌리. 

난해하고 황당하여 당황스러운 것이 인생자체의 정체인 것을.

이 정체성을 내 의지가 제 아무리 거부한들 그것이 내 인생길인 것을.

다른 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내 인생 대신 살아달라 할 수 없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을.


연습없는 실전,

실전같은 연습만 존재하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보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고

천재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푼다고 했으니

천재처럼 단순하게 풀어볼까?


수년째 새벽독서를 하다보니, 참. 단순한 하나를 발견했다.

(바보에서 천재가 된 것인지, 바보였기에 이제서야 안 것인지, 바보여서 늘 복잡했는데 묵묵히 하나씩 풀어나간 시간의 선물인지, 여하튼 지금 천재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이 바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 난해한 인생, 하나의 해답(묘답까지는 아니다. 그저 해답)이 있다면,

내가 내 인생의 프로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연습도 시키지 않고 나를 선수촌에다 집어넣었다.

프로가 아니면 살아낼 수 없는, 쫒겨나버리는 선수촌에 태어나자마자 입성했다.

영광인지, 눈물인지 여하튼 그렇다.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은 전문가란 말이다. 전문가는 그 분야에서는 최고라 일컬어지는 자다. 그래서 그 분야만큼은 이론적지식과 실천적지식에 있어 누구보다 해박하다.

즉, 내 인생에 프로가 된다는 것은 내 인생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내게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


그런데 가만.

이는 당연하지 않을까?(역시 나는 바보에서 출발한 것이 맞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이가 누가 있지?

나보다 나를 아끼는 이가 누가 있지?

나보다 나를 이해해줄 이가 누가 있지?

나보다 나를 더 키워줄 이가 누가 있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따끔하게 혼내고 솔직하게 대해줄 이 누가 있지?

나보다 나를 잘 써줄 이 누가 있지?

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걸어갈 길 대신해 줄 이 누가 있지?

나밖에 없지 않은가?

내 인생 대신 선택해줄 이 누구지?

나여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의 프로가 되고 싶다. 

아니, 프로가 되어야만 한다!

선수촌이니까!


진화는 적응을 위한 것이다.

적응은 조화를 위한 것이며

조화는 균형을 위한 것이고

균형은 질서를 위한 것이다.

질서는 위대한 자연을 유지코자 함이다.


자연은 위대하다.

자연의 소유물인 생명은 위대하다.

생명이 유지되는 길이 인생이다.

따라서, 누구의 인생이든 위대하다.

위대한 것은 위대한 것을 요구한다.

고로,

나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내 인생의 프로인가?

내 삶에 프로페셔널한가?

결코 YES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겨우 1kg밖에 들지 못하는 나라서 요리 피해 저만큼 걸었더니 2kg덩어리가 놓여 있다. 못든다. 다시 피했다. 좀 더 걸으니 3kg를 만난다. 이런. 이래저래 애썼지만 살짝 옮겨놨을 뿐, 치워버리진 못했다. 젠장. 4kg짜리가 있네. 에라 모르겠다. 겨우겨우 옆걸음으로 지나가봤지만 이내 5kg를 만난다. 도저히 더 이상 빠져나갈 틈도, 들 힘도 없다. 막막하다.

되돌아갈지, 여기서 인생걷기를 멈출지, 

아니면, 힘을 키워 그 놈을 들어옮길지, 선택해야 한다.


알짤없이 나는 프로였어야 했다. 

1kg을, 2,3,4kg을 옮겨놨어야 했다. 

그렇게 힘을 키웠어야 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가 말한대로 '우리의 삶은 임의적인 숫자의 배열이 아니라 논리적인 수열'이었다.

몰랐다. 

그저 난 1kg정도의 덩어리만 계속 나타날 줄 알았다.

요리 피하고 저리 질러가면 걸어질 줄 알았다.

계속 그 정도의 힘만으로도 나는 살아질 줄 알았다.

역시 바보였다.


인생은 초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초보를 위한 단계 자체가 없다!

힘들어서 나가고 싶지만 여긴 선수촌이다.

시간이 지나며 학생이 되었고 어른이 되었고 주부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고 선생이 되었고 지금 여기 이렇게 되어 있는데! 모든 하루하루가 초보였고 지금도 초보다. 모든 역할이 초보다. 모든 의무가 초보다. 그래서 어설프다. 책임도 미흡하다. 초보니까! 


나는 초보인데 내가 프로로 살아야 할 선수촌이 인생이다.

선수촌은 선수를 키운다. 만든다. 그러니 자꾸만 나에게 더 큰, 더 센, 더 강한 역할을 부여하며 초보딱지를 떼게 하는 것이다. 몇번 피하고서 더 이상 길이 없을 때 알게 되었다. 되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으니 한참을 내 힘을 키워내는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뜀박질만 시키더라도 그걸 해내야 이 덩어리를 치울 수 있다. 지금 뛰어야 한다고 명받으면 그냥 뛰어야 한다. 이유를 묻지 말고 그리 해야 한다. 

왜?

나는 선수가 되어야 하니까.

왜?

내 아무리 초보니까 살살 봐달라 애원해도 인생자체가 초보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왜?

다시 덩어리를 줄여주지 않으니까. 

왜?

이걸 치워버려야 다음을 걸을 수 있으니까.

왜?

이 다음 길에 어떤 기적이 일어날 지, 어떤 운이 날 기다릴 지 알고 싶으니까.

또... 이걸 치우고 전진한 내 모습이 나도 궁금하니까.


그렇게 나는 엄마로서, 선생으로서, 어른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조금 완숙되어간다. 초보딱지가 붙어있든 말든 그 무게를 피하지 않고 부딪혔더니 5kg. 옮겨졌다. 이렇게 어떤 부분에서 나는 프로페셔널한 또 다른 내가 되어 있다.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능숙이나 숙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거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았다.

인생은 초보자를 결코 원하지 않아서 내게 초보딱지를 떼려고 시련을 주는구나.

내 아무리 '처음' 부여받은 역할이라 응석, 애교, 떼, 막무가내...온통 다 부리며 '초보'라 우겨봐도 소용없다. 계속 '시련'이라 불리는 무거운 덩어리를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어쩔 수 없다!. 계속 더 큰 게 온다. 하지만, 나도 더 커진다. 비례한다. 던져지는 무게만큼 내가 커지는 것인지 내가 커지는만큼 덩어리도 무거워지는 것인지 여하튼 묘하게 비례한다.


'신은 위대한 자를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으려고 시련과 역경을 주어 단련'시킨다는 세네카의 말이 이해가 되었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투정이나 부리는 응석받이의 초보스러운 미숙함을 시련과 고통, 역경이라 불리는 덩어리로 점점 프로로 만들어가는 수밖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피해봤자 그것까지 계산되서 더 큰 놈이 온다는 것도 알았다.

피하면 결국 막힌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괜찮다.

인생이란 놈은 참 시간도 여유도 배려도 넘쳐서 막힌 그 곳에서 내가 얼마가 걸리든 한참 기다려준다. 되돌아가거나 멈추지만 않으면 인생은 '세월'로 의복을 갖춰 입고 한참을... 그렇게... 나를 위해... 기다려준다.


인생은 초보자를 위한 단계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수촌에서 아마츄어는 필요없는 존재다. 하지만, 세월의 의복을 입고 날 기다려준 인생덕에 나는 초보인데 금새 위대해진다. 단, 덩어리를 해치우는 순간. 중간과정생략, 구구단에서 바로 함수로 넘어간다. 원소기호외우다가 바로 양자물리학을 깨우친다. 알파벳을 배우는 중에 원서를 읽어댄다. 인생은 놀랍도록 나를 밀어붙이고 놀랍도록 생각지도 않은 곳에 나를 세우고 놀랍도록 근사한 이들 옆에 나를 매어둔다. 생초보인데 날 프로로 만들어 올림픽에도 내보내려는 기세다. 한번 부딪혀보니 인생은 나에게 놀라운 지혜를 선물하고 다른 경지로 날 데려간다. 

영원한 초보인데 영원한 프로로 사는 것이 인생인가보다.


여기까지 이해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고 내가 프로여야 하는데 

난 초보인데 프로로 살아야 하는 새로운 하루하루의 어설픈 갭(GAP)을 어떻게 줄여야 하나 

끙끙대지 말고 인생자체가 알아서 초보를 선수로 만들어버리니 따라가면 되는 것이구나. 

숨통이 트인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또 꿈을 꾼다. 

욕구를 발견한다. 

그리고 현실로 만들려고 적어본다.


인간이라는 종은 항상 소원하는 것을 품은 아주 아름다운 존재니까. 

인간이 걷는 길에서 소망하지 않는 이 누가 있을까? 

소망하는 그것이 이뤄지길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살고자 누구는 생명을 담보하고 누구는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던져버리기도 하고 누구는 가던 길을 뒤돌아 가기도 하는데 


'추구'를 멈추며 산들 행복할까? 아니라면 추구하는 거지. 

추구하는 그것에서 나는 완벽한 초보다. 

그런데 선수촌에 있는 한 인생은 나의 추구를 위해 나를 키워줄 것이다.


때론 추구하는 그것이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들지만 어떤 움직이는 힘을 믿고 따르는거지. 그것에 매달리고 집착하면 되지. 그러면 깨닫게 되겠지. 추구하는 것들 가운데 이뤄진 것보다 이뤄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것도. 하긴 씨를 뿌린다고 전부 새싹이 돋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이뤄진 것들은 추구했기에 이뤄진 것이니까. 그렇게 없어진 씨앗도 자기 운명대로 다른 씨앗의 양분으로써 생을 다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씨를 뿌리고 덩어리와 싸워대며 그렇게 나는 초보인데 프로가 되는 것이지.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그렇게 프로선수가 되는거지.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적어도 내 인생이니까 초보의 겸손함으로 프로답게 당당하게 부딪혀 보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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