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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pr 01. 2023

1000일의 새벽독서로 배운
삶의 '관점' 11

내 돈의 반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돈의 반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이 말을 한 나도 도대체 뭔 소리야? 스스로 웃지만 여하튼 1000일이 넘는 새벽독서를 한 이후로 내 가슴엔 그냥 이런 명제가 주어졌다. 감히 말하건데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게 침투하여 자리잡은 관점이라 내 의지로 내보낼 수 없는, 그렇게 부여받은 것일뿐이다.


아직 실천하고 있지 못하기에 '떳떳한가?'라는 질문에 스스로의 정당화는 다소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면에 '내 돈의 반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나의 관점임을 밝히는 이유는 어쩌면 나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나의 삶에 투입시키기 위한 강력한 자극제로 활용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가끔 이런 경우가 종종 나에게 온다. 내가 거부해도 결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떤 명제들. 이 명제들과 씨름할 것이 뻔한데도, 한판승으로 질 것이 뻔한데도 거부의 몸짓을 애써 과정속에 진입시켜 어쩌면 더 강하게 나에게 주입하려는 무의식적 의도에 의한 의식적 행위를 꼭 해야만 하는 그런 경우. 

이번 관점이 나에겐 그렇다.


돈. 

참 중요하다. 아니, 돈이 중요하다는 것보다 '경제적 자유'가 시급하고 간곡하고 필요하다. 난 책과 글로 노닥노닥 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쇼펜하우어도, 몽테뉴도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웠기에 자신의 온생을 고독과 싸우며 글을 쓸 수 있었고 소로우도 스스로는 간난했지만 에머슨이라는 든든한 경제적 지원자가 있었기에 월든을 탄생시켰으리라. 노동이 무가치하다거나 힘들어 거부하겠다는 의도는 없다. 그저 50이 갓 넘은 내가 조금 더 늘어난 숫자와 걸을 때 내가 정말 하고 싶고 해야하는, 그런 길위에서 방해없이 걷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악착같이 모으며(모은 돈이 지금은 두 녀석에게 탕진되고 있을지라도) 아껴쓰는 것은 국보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사실 쓸데가 없고 애쓰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몸에 베인 습관 덕) 나름 돈이 들어오는 통로도 몇 군데 있어서 굳이 돈돈거리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긴 하지만 이렇게 모으고 뚫어놓은 현금흐름들 가운데 50%가 내 것이 아니라고? 오마이갓. 


사실 아깝다. 

그렇지만 아깝지 않다. 

이 무슨 궤변이냐면, 

내 것이 아니라는 명제가 내 속의 중심에 자리잡았기에 

돈만 보면 아깝지만 가치로 보면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의미다.

돈만 보면 나눌 이유가 없지만 돈이 나에게 터를 잡은 이유를 찾으면 나누는 것이 의무라는 의미다.

돈만 보면 불려갈 것에 행복하지만 돈이 불려나가는 방향을 보면 돈이 가고 싶은 길이 보인다는 의미다.


나는 참으로 복많은 인간이다. 고생을 별로 하지 않았다. 굳이 남들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실부모했다거나 부모의 경제력때문에 무언가를 못했다거나 몸 어느 한 구석이 고장나 지속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거나 사기를 당했다거나 여하튼 크게 돈때문에 어려웠던 적은 없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지만 힘들었거나(물론 상대적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연명해야 하는 삶은 살아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지난한 삶이 내게 오지 않게 할 자신정도는 지니고 있다. 이는 대단한 복이다. 조상의 덕이다. 나의 운이다. 


그런데 새벽독서는 늘 강조했다. '선'에 대해서. 물론 나의 연구의 지향점도 '공공선'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다. 인간의 궁극의 행복은 '함께'이며 '나누는' 것에 있다. 나는 인간의 궁.극.의.행.복.을 맛볼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사용하고 싶다. 선과 나눔. 이 둘을 다 가지겠다 욕심부리니 너무 단순해졌다. '선'이 무엇일까? 잉여의 나눔이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도움받지 않을 정도의 기준으로, 이 기준을 초월한 소유에 대해서는 나눌 수 있는 삶. 어쩌면 애덤스미스가 언급한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본성의 발로일 것이다. 


나는 특별히 자선을 하거나 어려운 누군가에 가슴아파하는 사람은 아니다. 남들과 비슷비슷하게 봉사정도는 하고 살았지만 특별하고 투철한 정신으로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실행해온 인간은 아니다. 또 그렇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한 자도 아니다. 내 손톱의 가시가 무지무지 더 아픈 1인이다. 내 시간을 남에게 방해받고 싶지도 않고 내 정신을 이제 무료로 나누고 싶지도 않다. 나는 배 곯으면서 남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별로다. 


그런데 이런 내가 왜 내 돈의 반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할까? 진짜 나를 위해서다. 나는 어쩌면 멋진 부모에게서 충분한 지원으로 성인까지 양육되었고 나의 성인시절도 그다지 어려움없이 지금껏 살아왔지만 반면, 지구 반대편, 또는 내 뒤에, 내가 보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명을 보존해야만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선'이란 단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도움'이라는 단어 역시 불필요하겠지. 이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사가 그리 양극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는 것은 요구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요구된다는 것은 공급과 수용이 이뤄진다는 의미다. 지구상에서 누군가는 내 것을 주고 누군가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그저 순환의 원리인데 나는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 자, 내가 도움을 받는 쪽이 아니라면 도움을 주는 쪽에 속해있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정리가 된다. 이런 이유뿐이다. 내가 그 곳에 속해있으니 그 행위를 해야할 뿐인 것이다.


이 단순분리, 단순명제에 의해 내 것의 반은 남의 것이다. 

양극의 원리까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원리에 의해서도 이는 당연한 논리로 설명된다. 


몇가지만 보태자면, 

첫째, 나는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났다.아니, 신이 나를 살려놨다. 잘 쓰여보라는 의미다. 

둘째, 책을 보면 항상 '선', '덕'에 대한 추구야말로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 한다. 

셋째, 나는 어디 아픈 데도 없고 팔다리, 게다가 정신까지 멀쩡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나름 괜찮다. 잉여정도는 있다고 여긴다. 

넷째, 달리 돈쓸 곳이 없다. 먹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가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그저 책이나 사고 김치랑 쌀만 떨어지지 않으면 나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노트북이나 좀 가벼운 놈으로 바꾸고 싶긴 하다.

다섯째,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난 그리 자선적인 인간이 아니다. 단, 냉철한 이성이 있기에 '내 것이 아닌 것이 내게로 오는구나.' 라는 강력한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능력주신 내가 '어쩔 수 없이 도움이 필요한' 이의 것까지 벌어야 한다는,

그러니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는 우주의 대법(大法)

내가 너를 아프지 않게 능력있게 성실하게 만들어낸 이유를 아직도 모르느냐는 우주의 호통.

제 아무리 늘여도 더 늘어나는 것이 너의 잠재력이며 

아무리 나눠도 호주머니에서 흐르는 일없는 것이 현자의 주머니인데 

부른 배 두드릴 시간에 너를 더 키워 가진 것을 더 불리라는 우주의 명령. 

귀하게 쓰일 곳이 있어 내 너를 선택해 정신과 육체를 강건히 해주려 고통을 줬다는 우주의 생색. 

그러니 잘 지켜라, 함부로 쓰지 마라, 계속 불려나가라, 네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우주의 일침.


양극과 균형의 원리에 5가지 소소한, 거부할 수 없는 이유까지 보태니 정리가 되어버렸다.

내 돈의 50%는 내 것이 아니구나.로.


아뿔싸. 

50%를 떼어내보니 이런. 너무 내가 가난해진다.

그래서 내 능력의 50%를 더 끌어다 써야 하는구나.로 사고가 이어지고

에너지가 바닥나더라도 나의 생존을 너머 50%는 더 벌어놔야 하는구나로 능력이 키워지고

내 지갑에 있더라도 50%는 남의 돈이니 씀씀이도 반은 줄여지고

기존에 내가 머물렀던 기준은 2배로 높이기 위해 나를 닥달하고

이리 사니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는 나를 즐기게 되고

남의 돈을 맡고 있는 나는 왠지 든든한 신의 은행창구가 된 듯하여 뿌듯하고

도둑이 아니라면 이 돈(정량적 화폐외의 모든 정신과 물질적 가치 포함)은 손대면 안되니까 

매사에 깨끗이, 소중히!!!

함부로 나를, 나의 것을 취급하는 일이 없다.


또 있다.

신의 은행창구를 맡는 내가 너무 귀해서

혹시 모를 정신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책으로 틈을 막고

혹시 모를 건강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운동을 하고

혹시 모를 정서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감정을 지배하고

혹시 모를 영혼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자연에 따르고

이 모두를 뭉개버릴 엄청난 힘의 악마가 내게 올지 몰라 기도를 한다.


이 무슨 해괴망칙한 발상인가?(헛웃음)

괴상하고 요상하고 이상하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활의 지도에 이상지점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책을 읽고 건강을 챙기고 감정을 다스리고 영혼을 맑게 한다는 단순한 삶일 뿐. 

이런 내가 되지 않으면 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물질에 정신과 눈을 팔아버릴 충분한 자질을 지닌 못난 인간이니까.


신의 은행창구에서 커다랗게 몸집을 불릴 나의 돈들이여

신의 은행창구에서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준비중인 나의 돈들이여

신의 은행창구에서 나를 믿고 귀하게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나의 돈들이여

내 너희들을 위해 더 능력을 키워 안전하게 지켜주리다. 


아파서 창구를 비우는 날도 없을 것이고 

힘이 약해 누군가에게 키를 뺏기는 일도 없을 것이며  

정신없어 키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충분히 수년간 '보여지는' 자체로 증명이 되었다. 

작정한 날로부터 처음에 우왕좌왕한 시기를 제외하고 제 정신으로선 

단 한번도 아파서, 게을러서, 정신없어서 새벽독서를 안한 적은 없으니까.

이렇게만 계속 해주는 것으로 이 창구가 지켜진다는 것도 아니까.

나는 이 창구에 모셔진 남의 50%가 제 갈길을 찾아 떠나는 그 날까지는 새벽독서를 계속 할거니까.


아.... 가볍다. 마음이.

내가 잘 쓰이는 듯하여

내 쓰일 곳에 잘 서있는 듯하여

여기 이 곳에서 지켜내고 지켜지는 삶으로서 내 걸음에 가치가 보태지는 듯하여

이런 못난 나를 닮으려는 누군가도 자신의 능력을 더 키워내는 것이 보이는 듯하여

어찌 내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성장과 선의 연계와 연쇄와 연결

나는 지독하게 행복하다!

그리고 행복한 감정보다 백만배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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