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Apr 03. 2023

[재해석] 어쩔 수 없었다?

매거진 [익숙한 명제의 재해석]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념에 대해 지담이 '이건 아닐걸?' 의문과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저의 사고수준이 여기까지인지라 너그러이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가끔, 또 누군가는 자주, 하지만 한번도 이 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말. 물론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라고 자주 내뱉곤 했다. 지금처럼.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진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여러번의 시도 끝에, 지금부터 내가 주장하려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선택과는 다른 선택들을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요즘의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이 현격이 줄어든 것만은 나 스스로 부정하지 않겠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에 놓인다. 뭘 먹을까, 뭘 입을까, 뭘 가질까와 같은 일상적인 자잘한 선택부터 말할까 말까, 고백할까 말까, 갈까 말까, 할까 말까 와 같은 행위의 경중에 따른 중대한 선택들도 무게있게 항상 내 인생의 앞에는 놓여 있다. 이 크기와는 무관한 수많은 선택들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선택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가? 선택은 길을 만들고 선택은 방향까지 제시하는, 인생의 질을 높이는 능력인 것이다.


이런 선택이 나를 제압해버린 경우, 나는 얼마나 많은 '어쩔 수 없었다'를 선택했을까?

그런데 가만,

'어쩔 수 없었다'가 한계였을까? 그 선택외의 패는 없었을까?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선택도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었다'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가 내게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었는가?


이쪽 바구니냐, 저쪽 바구니냐 에서 이쪽이 안되니 저쪽만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해 왔지만 '어쩔 수 없이 저쪽'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딱! 내가 바구니 바깥으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

지금껏 내 시야에 포착되지 않아 내 정신으로 감히 모셔오지 못했던, 

다른 큰 정신으로는 입장과 퇴장을 자유로이 해왔지만 나로서는 알지 못한 것인지 알기 싫었던 것인지도 가늠못하던 수많은 변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맞춰 대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쩔 수 없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는

결국, 더 넓은 시야로 눈길을 줄 수 있는 자유

결국, 더 깊은 심연으로 노저을 수 있는 의식의 항해

결국, 더 먼 길에서부터 나를 이끌수 있는 관점의 확장

결국, 더 큰 파이의 넌제로섬으로 나를 키우는 성장의 쾌락

결국, 더 아름다운 조화를 위해 나를 과감히 새로운 판단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용기의 투척이다.


'어쩔 수 없네.' 라는 판단에 멈추는 것은 한계의 인정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이라는 판단까지 이끄는 것은 한계를 경계로 바꾸는 묘기

'어쩔 수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사고의 진화는 경계를 자유로 견인시키는 기적의 현시.


오늘부터 다시 의도적 단절을 시도한다.

'어쩔 수 없네'와의 단절.

오늘부터 다시 의식적 각성(覺醒, 깨어 정신을 차림)을 보탠다.

'어쩔 수 없네'의 차단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의 연결.


또 재미지겠다. 

정신과 말의 충돌.

그리고 경쟁, 나아가 승리까지. 

나의 새로운 놀잇감을 발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이다.


물론, '어쩔 수 없었다'를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분명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쉬운 선택은 인생을 점점 어려운 길로 내몰지만

어려운 선택은 인생을 점점 쉬운 길로 이끈다는 것을.

내몰리는 인생보다는 이끄는 힘에 의존하는 인생이 훨씬 값지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1000일의 새벽독서로 배운 삶의 '관점' 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