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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31. 2023

훔치고 싶은 프루스트여!

프루스트는 나의 숙제였다.

벌써 수년전에 사놓았으나 다른 책들에 밀려서

아니면, 읽자니 겁이 나서 

책장의 제일 위에 디스플레이용으로만 놓여있던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나는 늘 그에게 감시당하며

언제 나를 펼칠건데? 질문당하며

그렇게 읽어서 되겠니? 멸시(?)도 당하며

참 잘해냈다. 칭찬도 받으며

아마도 수십번은 더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게 만든 책.

당신, 프루스트.


오디세이아, 안티고네와 서로 승부를 벌이며

1년에 1권씩이라도 이 세개의 문학을 꼭 읽어내고야 말겠다 맘먹었지만

이제 겨우 그 1번째, 프루스트를 펼친 나.

그러면서도 혼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가 두려워 

공개적으로 (아무도 시키지 않는다) '프루스트 읽겠다' 선언(네이버카페 지담북살롱)하고는 

차근차근 그와 만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한 프루스트.

하지만, 당신이 언급한대로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하는지라

그리 몇년째 제 책장의 젤 위에서 나의 민낯을 낱낱이 보아온 

당신과 이제 만나는 것에도 '이유있는 우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는 항상 역시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매일 30분씩만 당신을 접하겠다 했는데

한장한장 너무 귀한 글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데카르트에서 논리를, 에머슨에서 통찰을, 아우렐리우스에게서 정신을, 몽테뉴에게서 사상을, 세네카에서 권위를, 올더스헉슬리에게서 영적진화를, 소로우에게서 자연을, 릴케에게서 서정을, 알랭드보통에게서는 표현을 알게 되었다면 프루스트에게서는 '감탄'이라는 감정의 진수를 느껴가며 읽고 있다.


30분간 겨우 1,2페이지밖에 읽어내지 못한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놀라워서다

낯설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익숙해서다

어찌 이리 익숙한 장면을 어찌 이리 신비에 가깝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어찌 이리 사람의 내면을 이런 평범한 단어로 묘사해낼 수 있을까.

어찌 이리 아무 것도 아닌 단어를 여기에 배치하여 저리도 새로운 의미로 격상시킬 수 있을까.

어찌 이리 이것과 저것을 연결시켜 새로운 눈요기로 창조해낼 수 있을까.


몇권에 달하는 장서라서 올해 안에 읽어내야지 먹은 맘은 오만이었다. 

첫페이지를 펼친 순간부터 내다 버렸다.

아. 한장한장 씹어먹고 싶다. 

몇년이 걸려도 괜찮으니 한문장, 한단어. 모든 것들을 나는 훔쳐버리고 싶다.


정말 훔치고 싶다.

어찌 이리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어찌 이리 묘사를 위한 관찰이 매서울 수 있을까

어찌 이리 관찰을 위한 포착이 날카로울 수 있을까

어찌 이리 포착한 그것에 딱 어울리는 언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어찌 이리 찾아낸 그 언어를 딱 그곳에 위치시켜 문장의 격을 달리 만들어낼 수 있을까.


훔치고 싶다.

프루스트!

당신이란 사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재능과 감성과 인격을 두루 갖춘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너무나 갖고 싶은 폭넓은 어휘, 섬세한 관찰, 세심한 묘사, 광활한 시야, 포착하는 시선, 정확한 단어, 미친 수식, 솔직한 용기, 투명하고 한계없는 영혼까지.


물론, 세네카, 몽테뉴, 데이빗소로우, 아미엘, 루크레티우스, 에머슨, 릴케, 블레이크, 올더스헉슬리, 톨스토이, 괴테, 아우렐리우스......... 등등 나에게 '미치도록 부럽다'는 감정의 마지막지점이 어디인지 꼭 가보게 만든 작가들은 한두분이 아니다.

작가의 사상에 감탄하고

작가의 무한한 지식에 놀라고

작가의 냉철한 통찰에 기염하고

작가의 관통하는 시야에 고개숙이고

작가의 진리와 논리적 성찰에 나를 채찍질하게 만들고

이를 한정된 단어의 발견과 구색과 조합으로 서술한 그들의 글의 격에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만든 이들은 한두분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다.


잠깐, 신에게 또 감사부터 드리자.

최고의 스승을 만나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이내 또 내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나의 빈틈을 채워줄 스승을 만나게 해주시니.


책장 맨 꼭대기에서 위엄있게 나를 들여다보며 이제야 만나게 된 프루스트 역시 신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시어 이런 감탄으로, 이런 지능으로, 이런 의식으로, 이런 수준에서, 이런 감사를 느끼게 하려 우연처럼 딱! 어느 순간 '펼쳐라!' 하신 거였구나. 1문장이 무려 1페이지에 달하기도 하는 그의 대서사극이 나에게 투입되게 하기 위해 또 그리 많은 스승들을 보내시어 나를 버리게, 닳아 없애게 하신 거였구나.


다시 훔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어떻게 훔칠 수 있지?

방법은 없다.


읽고 멈춰 느끼고 따라하고

또 

읽고 멈춰 느끼고 따라하고


이 장대한 서사를 모두 다

읽고 멈춰 느끼고 따라하면

나에게도 이런...

기술이랄까... 능력이랄까... 고찰이랄까... 영적인 힘이랄까..

훔치고 싶은 이 것들이 내 것이 될까?

나의 오만일까? 자신일까?

나의 경계일까? 한계일까?


방법을 모르니 

그저 읽고 멈춰 느끼는 수밖에.

그저 읽고 멈춰 삼키는 수밖에.

그저 읽고 멈춰 이해하는 수밖에.

그저 읽고 멈춰 따라가는 수밖에.


프루스트여

내 뒤늦게 당신을 내 눈앞에 펼침은 나의 아둔한 선택임을

내 뒤늦게 당신을 이해하려 애씀은 나의 미숙한 지성임을

내 뒤늦게 당신을 따라하려는 무모함은 나의 용기있는 모험임을 당신은 잘 아실겁니다.


당신이 내게 와서 펼쳐 보여주시는 이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스승들처럼 나에게 마술이 되어주길 내가 바래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말처럼 내 곁에 사물로서 등장한 당신을 통해 

잃어버린 나의 영혼이 죽음을 정복하고 나와 더불어 살기 위해 와주기를 내가 바래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덕분에 저에게 걸려있던 마법이 풀리고 나의 영혼이 해방되는 전율을 맛보게 해주시길 내가 바래도 되겠습니까?


매일 새벽, 

당신의 초대에 가슴 깊은 감사를 담아

소중한 당신의 활자에 담긴 정신을 

저는 오늘도 영접하려 합니다...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어떤 열등한 존재나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 속에 갇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나무 곁을 지나가거나,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다 그 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p.85

https://cafe.naver.com/joowonw/8170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12, 김희영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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