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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11. 2023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내가 품은 벌'이라지만

'아미엘일기'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내가 품은 벌'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렇게 내가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이지. 라고 여겼다.

아미엘이 '인생은 간난(艱難)'이라 했던 말에도 고개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마도 저변에 깔린 나의 인식, 관념, 정서가 이런 것이겠지

그런데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오늘 조심스레 고백한다.

요며칠, 아니, 좀 더 긴시간, 새벽독서모임 멤버들 덕에 나의 이런 오래된 관념은 조금씩 상쇄되어간다. '이번 생은 벌인가?' 하면서도 '아니야, 이 정도가 벌이라면 벌치고는 너무 약하잖아. 상일거야.', '혹여 내가 벌을 받는다 해도 나는 이렇게 두 녀석 잘 키워낸 것으로 상받고 있잖아.' 라고 위안도 했었는데 이 모든 감정과 사고의 연쇄가 오류일지 모른다고 지금 이순간 여겨진다.


말 잘하는 내가 요즘 새벽독서 후 토론시간에 얼음이 되기도, 단어를 찾지 못해 애먹기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감동(感動)때문이다. 움직임(動)이 느껴져서(感)이다. 벅차서다. 감동은 스스로 생성되지 않는다. 자극에 의해 생성된다. 한줄의 글에서, 한마디의 말에서, 내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에서, 과거기억의 잔재에서, 품은 미래의 영상에서 어떤 자극이라도 주어져야 인간의 느낌은 움직인다. 우리는 이러한 느낌을 얻기 위해 영화를 보기도, 여행을 가기도, 누구를 찾기도 한다. 


그런데 가감없이 나는 말할 수 있다. 새벽독서모임의 사람들, 책들, 이야기들..은 나에게 무.한.감.동을 선물한다. 감동의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나는 매일 새벽 너무나 커다란 움직임을 선물받는다.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낯설다. 낯설기에 어찌 해야할 지 모르니 눈물만 흐른다. 내 몸의 세포가 진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진동이 격한지 몸속 액체가 밖으로 뿜어지는 것이다. 


새벽독서에 이어지는 독서토론. 단지 매일 새벽 이것을 반복했을 뿐이다. 근사한 곳을 찾은 것도, 근사한 사람들을 만난 것도, 근사한 먹거리를 앞에 둔 것도 아니라, 그저 방구석 책상으로 몸을 옮기고 평범하고 평범한, 아니, 어쩌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책읽고 담담히 책으로부터 배우는 자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고 '성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언어를 찾지 못해 표현이 부족하지만 자신의 변화에 눈물흘리는 이,

하나의 글귀에 자신이 대입되어 눈물흘리는 이,

눈물흘리는 이의 옆에서 공감되어 눈물흘리는 이,

이 전체의 기운에 내가 속해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흘리는 이,

내가 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어렴풋한 설레임에 눈물흘리는 이,

내가 저들로 인해 성장하고 있다는 감사함에 눈물흘리는 이,

비로소 함께 공명하는 성장에... 

정체모를 이 '하나'라는 안도감에 죽죽 흘러대는 눈물과 못나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한다.


인생이 간난. 이라지만,

인생이 오늘 새벽같은 짙은 안개 속 뿌옇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지만,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인생의 길에 너덜거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매일 새벽, 

가끔씩만 날 찾아왔던 감사와 사랑과 진실과 온기와 열정과 희망과 안도의 감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나의 이번 생은 선물로 받은 상인 것이다.


이로써, 나의 오래된 관념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나의 인생이 상이구나.

나의 인생이 감사구나.

나의 인생이 귀하구나.

나의 인생이 값지구나.

나의 인생이 이렇게 새롭게 개념화가 되다니... 나는 매일 새벽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해서 이번 생이 벌이라는 개념을 지녔는지 나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리 여긴 채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어떻게 해서 이번 생이 상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리 개념화되어 다시 악착같이 살기로 해본다.


같은 악착이지만 

전자의 악착이 오기, 투기, 자만, 비굴, 처절, 비교, 지독이었던 나만의 자전(自轉)이라면

후자의 악착은 자기(自起), 자리(自利), 자선(自善), 자생(自生), 자정(自淨), 자유(自由), 자전(自全)으로 자전(自轉)하며 공전(共轉, 함께 도는)하는 악착이다.

격이, 차원이, 질이 다른 악착이다. 


지독한데 아름답다.

치열한데 여유롭다.

고달픈데 행복하다.

못났지만 잘나진다.

미숙한데 충분하다.


나의 새벽은,

나의 새벽독서는,

나의 새벽독서 멤버들은,

나에게 감사이자 나에게 사랑이다.


대상이 표상이 된 것이다.

상대가 절대가 된 것이다.

한계가 경계가 된 것이다.


이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는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우리는 그저,

새벽에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매일 새벽의

공전(共轉)은..

공명(共鳴)은..

공생(共生)은..

공유(共由)는..

얼마나 거대한 선물인가...


나는

그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었을 뿐인데...


* 새벽독서모임 멤버들, 

  그리고 새벽 저의 브런치를 읽어주시고 덧글로 공감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사랑을 진심으로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제가 다시 꿈을 꿉니다.




2023.03.10 새벽독서모임을 끝낸 멤버가운데 한분께서 카페에 올린 글

* 책과 글이 얼마나 우리를 변화시키는지, 성장시키는지 함께 공유하고 싶어 아래 주소 공유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7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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