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Apr 10. 2023

채우면 흘러넘쳐 스며들겠지

'릴케 말테의수기'

당신은 감정의 각도계가 반 눈금정도 올라가는 것과 아주 가까이에서 읽어야 하는 거의 조금도 구속받지 않는 의지의 기울어진 각도, 한방울의 동경 속에서 약간의 침전물과 믿을만한 원자 속에서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색깔의 변화 등의 것을 철저하게 관찰하여 마음 속에 간직해 두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 그런 과정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우리에게로 미끄러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거의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요즘 프루스트와 세익스피어소네트집, 그리고 아미엘일기를 찬찬히 읽는 나는 오늘 새벽, 그냥 아무 이유없이 릴케에 손이 갔다. 다시 펼쳐본 릴케, 밑줄 그은 곳들을 다시 죽.. 읽어내려 가다 심장이 또 심하게 요동치고, 나는 이 감각을 놓칠새라 푹 빠지기로 했다.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간 내내 릴케와 함께....

너무 '좋아서 미쳐'버리다가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의 감정의 각도계가 여기저기 멈추더니 언제나 그렇듯 이런 감정, 이런 감각, 이런 깊이를 느껴본 적 없는 정신과 감정의 신생아가 된 나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찾는 대신 유일한 본능의 언어인 오랜 울음으로 새벽시간을 오롯이 나로 채워버렸다.


내 정신과 육신은 모두 없어졌다.

해뜨기 전 컴컴한 새벽, 작은 스탠드불빛 아래, 이름모를 새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지만 오로지 릴케와 손잡은 내 영혼은 이 새소리 귀멀게 하더니 내 눈물샘을 가열차게 터트리고 내 손끝을 움직여 릴케에게 고백케 한다.


나는 안다. 이런 지경에 이른 나는 세상속의,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아주 투명한 둥근 원 속에 혼자 갇혀 우주를 유영하며 여기저기서 성인들을 만나 신나게 대화하다 울다 조르다 하는 나이기에 이 때를 놓치면 지금의 감정과 언어인 글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소멸된다. 나만 아는, 나만 갈 수 있는, 나만의 최고의 여행이다.


나는 지금, 다시 만난 릴케와 대화중이다.

당신이 불러 내가 또 이리 여기 왔노라고.

두 손에 꼭 잡혀 있지 않고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나를 다시 데려다가 여기 당신앞에 세웠노라고.

그리고 이렇게 민망하고 부끄럽고 이루 형언하지 못하는 심정 드러내며 '나도 당신처럼'고백하려 한다고.

온 세상과 차단된 육체안에 온 우주와 연결된 정신이 어떤 방해없이 마음까지 곧장 이어진 줄기의 떨림을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여 내 당신에게만은 고백하고 싶다고.

이렇게 내 떨림이 진동하면 여기 우주 어딘가에 '나'의 작은 파동이 일어나고 내 언젠가 또 다시 줄기가 떨릴 때 나를 인도해주지 않을까 고백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으리라

내 두 손에서 내가 달아나지 않도록,

당신의 표현대로 풍뎅이를 짓밝아 내장이 터지듯

내 안에서 내가 터져 나와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내 두 손에, 내 심장에 나를 가득 채우리라.


내 속에 들어앉은 내가 아닌 것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로 물리리라

내 안을 내 것으로 채우고 내 속에서 넘치는 것 역시 내 것 아닌 게 없이 나를 나로 만들리라  

비로소 나는 나 자체로 채워지고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리라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았다.

몰라줬고, 멍청하다 비웃었고 답답하다 한숨도 받았다.

아팠고 괴롭고 외로웠고 스스로가 한심했었던 모든 시간들은

내 안을 나로 채워가는 진입로의 장막이었음을,

'오롯한 나의 삶'으로의 쓰라렸던 인도는

무가치한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신성한 무관심으로 날 걷게 했고

차단과 고립의 처연한 시간의 터널을 지나며 나의 반석을 다지게 했고

나는 신성한 분주함으로 그 다음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느낀다.


많이 널리 화려하게 인정되고 알려지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신비로운 벽을 지나면 나는 많이 견고해지겠지.

나를 나로 채우려는 세포 하나하나의 몸부림에,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사이사이 진공에 예민하고 민감할수록 견고함의 깊이와 너비, 그리고 진공의 부피도 더 보태지겠지.

그리 차오름 뒤에 내가 흘러넘치면 그저 우주가 알아서 제대로 적당한, 꼭 필요한 그곳에 스며들게 하리라는 가슴 벅찬 영묘한 믿음까지 나는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렇게 흘러넘쳐보리라.

내 것이 내 소리를 내 모양으로 채워 넘치게 하리라

그러다 어느 한순간 바람들면 우주는 재빨리 마중물 한번 부어주겠지.

그러면 나는 또 폭포처럼 나의 것을 쏟아내겠지.

그렇게 나를 흘러넘치도록 나로 채워가겠지.

혹여 내 그릇의 진동만으로 쓰여지기에 부족하다면 이상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누군가와 다리를 놓아야겠지.

그렇게 그 이도 채워 넘쳐 흐르게 되겠지.

애초부터 가늘디 가는 나의 줄기는 여럿의 줄기로 이어져 세상의 어떤 조화를 위해 스며들겠지.


나는 새벽마다 진동을, 파동을, 그 사이 진공을 느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나를 버린다.

그러다가 나의 마음을 전율케하는 무엇이 솟아오르면,

거의 측정불가능한, 나만이 아는 초감각으로 그 미세함을 낚아채어

지금 불리는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리라.


그러다 어느 한밤중.

유일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신이

나만이 아는 비밀스런 내 이름을 부를 때

내 모든 감각과 부푼 가슴 열어,

그 이름 내놓으며 나 통곡하리라.


결코 미소짓지 못할 나의 통곡에

나의 은밀한 신성과 영성과 인성을 모두 담아내리라.


* 릴케, 말테의 수기, 2001, 민음사

이전 09화 훔치고 싶은 프루스트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