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Jun 08. 2023

뼛속까지 다른 사람

'차이'와 '개성'에 대한 소고

왜 이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지?

왜 이걸 저렇게 이해하지?

왜 여기서 저런 행동을 하지?

왜왜왜?

우리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면서 이런 의문을 참으로 많이 만난다.

이유는 분명했다.

어떤 상대라도 나와는 뼛속까지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진보와 보수

부모와 자녀

그리고 종교인과 비종교인 등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쌓아 구축해놓은 이념을 가지고 산다.


결혼을 정당화하는 이들과 비혼을 정당화하는 이들

평화를 수호하는 이들과 전쟁을 도모하는 이들

자연보다 과학을 선호하는 이들과 과학보다 자연을 고수하는 이들

이상보다 현실에 집중하는 이들과 현실보다 이상을 쫓는 이들


이념은 가치관이나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대변한다.

결국, 이념이란, 사상이란

자신이 어디를 향하느냐, 

자신이 어떤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뒀느냐, 

자신이 어떤 스펙트럼의 빛으로 살기로 했느냐에 대한 표지이다.

이 표지를 따라 걷도록 자신의 모양새와 사고의 구조와 삶의 체계를 구성지어 버린 것이 정체성이며

이 안에서 도드라지고 솟구친 자신만의 성향이 특질이며 개성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이념 역시 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체성 역시 편견의 상징이며

특질 및 개성 역시 편견의 모양새인 것이다.


조금 더 거론하자면,

이러한 이념으로,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믿는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이념이라는 편견이 '자신만 옳다'고,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가 유일하다'고 주장할 때 갈등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정치가 분열되고 새로운 혁명이 곳곳에서 등장하는 배경에는 개개인의 정체성과 이념이라는 가치의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개성을 바꿀 수가 없다.

신념, 이념, 사상은 꾸준한 시간동안 켜켜히 내면에 쌓여 고착된 질료이기에

바꿀 생각이 있고 없고의 여부를 떠나 바꿀 수가 없다.

성격이 변하지 않는 원인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는 길에서 대전을 지나 길을 잘못 들었다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새롭게 길을 나서는 사람보다 

대전 언저리 어딘가에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 즈음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억조차 없던 어린시절부터 형성된 관념들이 고착되고 또 그 위에 더 큰 관념이 고착되면서 행동이 유발되고 강화되고 그렇게 나의 행동, 즉 자극에 따라 톱나바퀴처럼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에 적합하도록 개인은 개성화되었다. 개개인의 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살다가 자신의 성향이나 성격으로 부침이 있더라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성격은 바꾸기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불가능에 가깝고 성격의 성향이나 특질 역시 크게 변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나를 통해서 매일 확인하고 증명한다.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낯선 곳을 가고 낯선 음식을 주문하는 것 역시 나는 상당히 어렵고 싫다.

오늘 해야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도 나에겐 상당한 불편을 주고

책상 위가 어지러진 상태에서 몸 편하자고 치우지 않은 채 앉아있지를 못한다.

조금 불편한 옷을 입으면 정서도 불안해지고 내적으로도 경직되어 입과 귀가 닫히게 되며

친한 이들과 함께 밥먹을 때도 같이 앉아 먹기보다 옆에 서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나에겐 더 편하다.

이 외에도 두드러진 나의 성향은 많겠지만 이 몇가지만으로도 나는 나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충분히 증명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의 성격, 성향, 특질, 개성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 쉽게도 타인을 바꾸려 든다. 

특히 자녀들은 더더욱 나의 몇마디에 바뀔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것을.


또 우리는 깨닫는다.

저 사람이 저리 생각하는 것은 내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저 사람이 저리 행동하는 것 역시 막을 재간이 없다고.

각자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환경에 의해 가치관과 정체성, 그리고 이념과 사상이 형성되어 있고 이에 따라 행동반경과 행동의 강도나 지속여부가 결정되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즉, 모두에게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만큼 갈등이 유발되고 갈등의 빈도만큼 관계의 깊이가 다르게 유지되고

이해가 불충분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각자의 사상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지금껏 말했듯 아주 갓난아기, 어쩌면 그 이전 태아때부터 우리는 어떤 부모의 뱃속에 있었느냐에 따라 이미 성격형성이나 성향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뱃속 태아때부터, 

그러니까 

'뼛속부터 다른' 사람들로 태어나 

'뼛속까지 다른' 사람들로서 서로 만나는 것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여기는 것일 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일 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편견을 고집하는 것일 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편견의 막이 쌓인 것을 본질로 착각하는 것일 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합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편향된 합리, 즉 비합리로 판단하는 것일 지 모른다.


뼛속부터, 뼛속까지 다른 개개인의 집합이 '우리'라는 공동체다.

정답은 뻔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대립과 충돌과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조화'때문이겠지. '다양성'때문이겠지.


결국, 결론은 이렇게 지어진다.

대립과 충돌과 갈등을 없애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차이'에 대해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무의식에 자리잡은 나의 '이념'을 내 안에 담아둔 채로

맺어진 관계의 방향성에 맞춰 자신의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를 꺼내 사용하는,

그렇게 맺어진 관계의 특성에 맞게끔 스펙트럼을 바꿔가는 것으로서 공존하는 것일테다.

이러한 공존은 공유를 이끌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혁신을 창출해낼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고요히..

관계에 의한 나의 개성은 겉으로 다양하게...


무수한 시간, 다양한 경험의 누적으로 무의식에 자리잡아 나도 모른 채 나의 이념이 된 근본적인 배경을 토대로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석하고 판단한다.

너도 그리하고 그도 그리한다.

그러니 뼛속부터 다른 나, 너, 그가 모인 '우리'가 뼛속까지 서로 이해하고 맞추려 애쓸 것까지는 없을 듯하다.

이 선을 살짝 넘었을 때 갈등, 분쟁, 오해, 분노와 같은 감정이 야기되는 것은

상대의 탓도 아니며 내 탓도 아니며 

그저 더 깊이 서로를 알고자 하는 집착과 이해와 배려의 그림자일 것이다.


알고 이해하되 거기까지만.

믿고 의지하되 그선까지만.

주고 다시받되 딱그만큼만.

갔다 돌아오되 내자리로만.


갈등을 인정하고 

차이를 이해하고

방향을 공유하고

그저 개성대로 뚜벅뚜벅. 

모두가 그렇게 거기까지만.


많은 책들에서 신뢰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라 알려주는 의미는

각자 서로의 차이, 결코 근접할 수 없는, 나조차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편견,

즉 뼛속까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의미일터다.


매거진의 이전글 뭔생각, 딴생각, 아무생각, 그저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