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제목도 미정, 글도 미완입니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그저 죽죽 써내려 가는 글이라 당분간 -새벽독서로 깨달은(배운) 어떻게 살 것인가-로 가제를 정하고 문체도, 어투도, 내용도 오락가락할 것 같습니다. 단편에세이가 아닌 글을 써내려는 과정에서 의례 겪어야 하는 수순이라 그대로 노출하는 용기를 내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라 외면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글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분들이라면 연재되는 글이니만큼 지난 1~7편을 먼저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또한 매일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브런치발행은 매일 하지만 본 글은 매일 쓰지 못하며 띄엄띄엄 발행이 될 수도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감각을 키워낸다는 것은 더 큰 것을 불러온다. 여기까지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초월된 감각'에 대해 잠깐 언급할까 한다.
감각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민감하고 누구는 둔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리 없으니 그만 거론하도록 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은 감각이 둔하다는 것을 나는 주장하려 한다. 제 아무리 민감하고 예민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둔하다. 먼지가 늘 피부에 닿는데도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어? 다리에서 왜 피가 나지?‘ ’어? 여기 왜 멍이 들었지?‘ 못 느낄 때도 많다. 비교자체가 모순인 줄은 안다만 동물의 감각과 비교하면 인간의 둔함은 감각상실 수준이다.
탁란하는 새들이 모양과 색, 알을 낳을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감각
똑같이 생긴 수천마리 무리들 속에서 정확히 자기 새끼를 찾아내는 펭귄의 감각
길도 없는데 수만km를 열 맞춰 자기가 목표한 그 지점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감각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바람을 타고 줄을 잇는 거미의 감각
저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는 수풀 사이 작은 들쥐를 정확하게 낚아채는 매의 감각
접착제도 없이 작고 가는 가지만으로 높은 나무꼭대기에 바람에도 끄덕없는 둥지를 만들어내는 새들의 감각
그 작은 몸집으로 아파트 3층 높이까지나 집을 짓고야마는 흰개미의 감각
파종이 계절보다 늦으면 모든 양분으로 꽃을 얼른 피운 뒤 씨부터 땅에 떨구는 식물의 감각
그리고
우리집 김새나와 김개리가 빛의 속도로 펄쩍 뛰어 날아가는 파리를 순식간에 잡아버리는 고양이의 감각
말도 안 되는 줄 알지 감각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이 둔하다는 것을 나는 강조한다. 거미보다 몇 백배 더 덩치가 큰 나는 미세한 바람을 타고 여기서 저기로 거미줄을 잇는 거미가 느끼는 그 바람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 멋지게 V자를 그리며 나침반없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러기보다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코끼리는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는데 나는 네비게이션없이는 아무데도 못간다. 여하튼 인간은 어떤 동물과 비교하더라도 일단 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기에 감각의 중요성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적인 진화를 위해 우리의 육체가 정신과 신체, 그리고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에 대해서 반박할 근거가 내겐 없다. 그저 사물의 본성을 다룬 루크레티우스나 이성적 탐구를 중요시 언급한 데카르트, 초절주의의 대가 에머슨과 그가 추앙한 스웨덴보그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 논리적으로 증명해냈으며 나의 지성이 이들을 반박할 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는 이들이 알려준 바를 믿고 따를 뿐이다.
감각은 인간이 지각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잠깐 언급하자면, 그는 '이성(추론, 로고스)도 감각을 반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두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반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면서
감각은 느끼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종(同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자극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종(異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유일하고 주체적이고 결코 서로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현상에서도 서로 다른 이성의 작용(사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의 시작이 이렇게 모두가 다 다른 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지각의 시작은 감각에서부터'이며 ’내 정신의 주체, 나라는 인간의 운용주체가 감각’이라 한들 논리의 비약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주인인 감각을 따르기 위해서는 영혼과 민감한 소통을 해야만 한다. 왜냐면 우주는 '진리'라는 거대한 이치의 힘을 활용해 이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그래서 영혼은 결코 우리를 해로운 방향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사악한 영혼들이 등장하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영혼은 우주가 균형을 잡기 위해 일정한 양만큼 등장시킨 것들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내가 거론할 바가 아니다. 이는 저 높은 분의 설계에 따른 것이기에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그저 사악한 영혼을 만나면 피하거나, 저러면 안되겠다를 배울 뿐. 내가 태어난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나의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메신저는 바로 나의 영혼이다. 지속적으로 신호를 주는 영혼을 무시하고서는 내가 나의 삶의 길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이 신호를 나는 ’영혼의 자극‘이라 부른다. '섬광’처럼 느껴지는 ‘자극'에 나는 내 삶을 몽땅 의지시킨다.
잠깐 생각해보라. 앞서 얘기한대로 우리는 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은 나에게 계속적으로 신호를 주는데 나의 답답한 인식이 이를 지속적으로 막고 방해하다가도 어느 순간 ’심장이 쿵‘, ’머리가 번뜩‘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둔한 나에게 얼마나 간절하면 그토록 강하게 느껴지도록 자극을 줬을까. 피부를 뚫고 딱딱한 뼈를 뚫고 단단한 내부조직을 뚫고 심장이, 정신이 느껴지게 할 정도면 얼마나 강하게 신호한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먼지를 본다. 눈을 뜨고 걷지만 이마에 닿아야 거미줄이 있음을 안다. 우리가 실제 본다는 것은, 피부에 느껴진다는 것은 알갱이가 큰 순서대로 감지되는 것일텐데 내 둔한 육체에 얼마나 알려주고 싶었으면 먼지보다 작은 크기로 둔갑해 내 모공을 뚫고 내 가슴에까지 도달해 자극을 준 것일까? 얼마나 작은 알갱이들을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켜켜히 쌓아 왔길래 내 오장육부를 뚫고 가슴으로 그것이 느껴지게끔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오래......계속.....정성스럽게....나에게 신호를 보내왔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둔한 내가 그것을 거부할 용기는 도대체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을까?
결국, 나의 감각은 영혼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수용하든 훼방을 놓든 자극이 왔으니 내 신체는 진동하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이러한 자극이 너무나 소중해서 명명을 한 듯하다. ’직관‘이라고 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그런 거. 어떤 강렬한 자극이 자신에게 온 것, 아니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해서 꼭 알려야 하는 무언가를 제발 내가 알아차리도록 영혼은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소진시키며 나의 신체를, 정신을 뚫고 자극을 준 것이다. 그러니 이유불문하고 자극에 민감해야 한다. 질서없이 어지럽혀져 있거나 관념 덩어리로만 자리한 정신은 영혼이 아무리 자극해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못 알아채면 그나마 둔하니까 그렇다 할 수 있지만 알아챘는데도 인식이 막아버린다면 이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처사인지....
이러한 근거로 인해 나는 ’직관‘을 영혼의 자극의 대표적인 신호라 인식하여 느껴지면 바로 행동을 옮긴다. 내 머릿속에서는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딘가로 나를 떠미는 것이다. 또한 이 자극의 주체가 영혼이니 분명 우주와 교신하고 나에게 보내는 신호일텐데, 그렇다면 옳은 방향으로, 내가 서야 할 자리로 나를 이동시켜주려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의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직관에 따르는 행동은 그 결과가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서 예측하지 못한 크기와 무게로 드러날 확률이 높다. 나의 인식의 범주 안에서 계획되지 않고 나를 떠난 어떠한 설계에 의해 내가 선택되어 이뤄지는 일이니 우리는 이것을 ’창조‘, ’창발‘, ’창의적 발상‘이라 해도 좋겠다. 영혼의 자극이 감각으로, 감각이 정신으로, 정신이 행동으로 연결되어 실재화된 결과로 드러는 것. '창의적 발상'인 것이다. 이 발상이 현실화되면 '창조'되었다 하고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우리는 '창발'이라고 한다. 질서잡힌 정신은 선한 창발을, 질서없는 정신은 악한 창발을 창출하겠지.
느낌! 즉, 감각되어 지는 순간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을 출두시키는데 이를 '호기심'이라 한다. 호기심은 관심으로, 관심은 관찰로, 관찰은 지식의 탐구, 즉, 앎의 욕구로, 앎의 욕구는 인지(intelligence)로, 인지는 새로운 지식(이론+경험)의 투입과 뒤섞임(융합), 연결을 통해 지각된다. 지각(知覺)은 풀어 말하자면, '앎(知)'을 '완전한 인식으로 깨닫는(覺)' 것이기에 지혜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겠다. 단, 여기서 '지혜로운 지각'은 윤리적인 선(善)을 향할 경우에 한해서다.
결과적으로, 지혜의 시작 역시 감각으로부터다. 내친 김에 여기에 정신과 마음까지 거론해보자. 우리는 감각되어지기에 알고자 하는 욕구가 시작되고 욕구의 정체가 궁금해 앎의 세계로 발을 들인 후 그 곳에서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이 섞이고 깎이고, 말 그대로 갈고 닦이며 일상의 선(善)한 경험과 접목된 '앎'의 실천이 나의 정신에 궤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 초월적 감각인 지혜와 통찰, 직관과 같은 고차원적인 능력(형이상학적 고찰, 초월적 지각)의 배양이 필요한데 이러한 배양의 정돈과 질서를 위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작용은 나의 '업(業)'을 위해서이며 '업'을 위한 도구가 '일'이다. 또 다시 결론적으로, 창의적인 발현의 시작, '업'의 현실적 실현 역시 감각에서부터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감각에 민감해야 하고(후천적으로 감각의 민감성은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감각으로 전해진 것을 일단 머리로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머리에서 다시 손과 발, 혀를 움직이는 경험을 보태 고차원적인 능력을 배양, 성장, 숙련시킬 수 있어야 하며! 마음의 평안함을 유지하면서! 나의 삶의 길을 찾아 걷는! 즉, '지각'의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애써 배워야할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늘 깨어있는 나의 의식이 지각의 숙련과 성숙을 도울 것이다.
각 개인의 인생을 잠깐 뒤돌아보면 예측가능했던 일보다 우연이라, 행운이라, 기적이라, 뜻밖이라 불리는 어떤 상황에 의해 인생이 역전되거나 전환된 경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조직도, 사회도, 세상도 모두. 이러한 모든 결과들이 우리가 영혼의 신호에 반응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참된 지침을 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섬광처럼 찾아오는 그 직관을 미처 주목해 보지도 않고 습관처럼 지워 버렸던가?
(중략) 이 가르침을 들어라!
"반대편에서 어떤 시끄러운 외침이 들리더라도 따사롭고도 과감하게 자신의 자발적인 신념과 직관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어떤 낯선 이가 다가와 따져 물을 것이다. 그대는 늘 무엇을 생각해 왔고, 무엇을 느껴 왔는가?"
나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지 않은 이유때문에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는가?"
- 에머슨 자기신뢰철학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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