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체해보니 4
이 글은 출간을 전제하고 작성하는 글이라 그냥 죽죽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나면 반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그저 날 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답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고쳐지지 않고, 앞으로 고칠 수 있을까 싶은, 고질적인 병이 있다. 새벽에 불안감으로 눈을 뜬다는 것이다. 아니, 눈을 뜨면 불안감이 밀려오는건가? 순서야 어쨌든 불안이 무의식속에 아주 단단하게 꽈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불안은 걱정을, 걱정은 ‘불안한 그 정체’를 없애려 자체적으로 힘을 가하며 나를 움직이게 하는데, 내가 잠을 자며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 걱정을 불안을 살피라며 나를 깨워대는 것이다.
이런 줄 모르고 살아온 지 한참이고 책공부를 시작하고 ‘불안’이라는 정체가 나의 무의식에 있음을 인정-그렇다. 인정까지 해버렸다.-하게 되고 또 다른 나의 자아는 나에게 이를 지속적으로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 최근엔 이런 감정이 누그러진 것이라 여겼는데 누그러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훈련의 결과, 외면하는 능력이 키워졌음을 알았다. 첨언하자면, 이는 꽤 잘 한 짓이다. 훈련의 효과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 두려움과 같은 부정정서가 내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음을 아는 순간, ‘그래서 내가 이리도 나를 채근하고 닦달하고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못하면 안되는 모습으로 세상에 보이고 싶은’ 안쓰럽고 가여운 나를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그저 지금 이대로 살아도 꽤 괜찮은 삶인데 나는 타인과 비교하면서 계속 나의 못남을 키워나가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 기제는 오히려 나에게 불안을 조장하는 상황을 더 만들어내며 나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되었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외로움도 고약한 녀석이지만 외로움보다 편한 것이 날 더 안정되게 하기 때문에 외로움 따위는 상대적으로 별 게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의 고립은 자발적인 선택이었기에 나는 충분히 외로워도 충분히 편안하다.
어제도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일찍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도 가졌고 또 작가까지 명품인생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십니다.’라며 강의를 꼭 해달라고 한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여전히 '보여지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갭을 드러낸다. ‘보시는 것만으로는 명품인생 맞습니다. 하지만...’이라며 주춤주춤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이어지는 ‘남은 과제는 좋은 일들 선행 많이 하시면 될 듯 합니다’. 라는 문자에 ‘그럼요, 그렇게 살게 하려고 거죽부터 그리 만들었나 봅니다.’했다.
나는 보여지는 나와 인지하는 나의 갭(gap)이 아주 차이가 크다. 이 차이는 살아가는 데에 아주 불편하다. ‘작은 나’를 ‘세상이 바라보는 상태’까지 끌어올린 채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에 정신의 에너지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거기까지 끌어올려지지 않는 날에는 나의 인상은 죽상이 되고 스스로의 못남에 빠진 채 괜한 짜증이 나를 덮어버린다. 물론 오해도 함께 온다.
이러한 인과는 이미 익숙하다. 불안기제가 에너지로 소통하며 불안한 상황을 오히려 더 끌어들인다는 인과말이다. 불안함은 회피나 위선을 만들고 부인과 투사를 조장하며 더 불안한 상황으로 현상을 제압하고 이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강력한 감정이 압력을 받아 분출되면서 짜증, 화가 생겨나고 감정과 이성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것을 느끼는 즈음에는 일은 이미 그르쳐져 있다. 오해와 불신, 갈등이라는 형태로 이미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일이 그르쳐진 것은 일이라는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과 같은 무의식의 기제가 바깥세상, 즉 현상이라는 신호에 그간 응축시켰던 압력을 폭발시키는 반응이다. 무의식의 기제는 반드시 자기 정체를 드러내려 내면에서 몸을 키운다. 우주는, 세상은 무의식과 교신하는 것이지 행동이나 표현, 일과 교신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에너지의 진동의 강도로 교신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역시 이성을 제압시킬 정도로 응축된 감정의 폭발은 막아내기 버겁다. 이렇게 무의식에 응축된 기제는 이성을 이기고 세상으로 분출되어 더 크게 몸집을 불려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서 불안은 결과적으로 나를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각없는 이성은 방황하고 방황은 내면의 창조성을 외면하게 되며 끝내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어 염세주의자로 전락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안이라는 부정정서가 나쁜 것이니 없애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다루지 못하는 나의 운용술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멈춰야 했다.
두손두발 다 들고 감정에 항복해야만 했다.
이 말은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다.
저항도, 반항도, 대항도 없이 그냥 그대로 놓아둔다는 의미다.
무언가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 의존을 품지 않고 그러니 감정도 없이, 그렇게 초연해지겠다는 포부다.
불안이나 두려움, 짜증, 화, 불평, 불만족과 같은 정서들도 나에게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자체가 나를 통해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알아차렸으면 어떻게 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은 채 그냥 자기 할일 하게 내버려두고 갈길 가게 무관심하면 된다. 나는 그 감정에 초점두지 말고 감정을 불러들이고 키우고 방출시키는 무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은 나에게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객이다. 그런데 주인인 나의 정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다니러 온 손님 눈치만 슬슬 보며 안방까지 내어주려는 태세를 갖추고 나가라는 말도, 어지럽히지 말라는 말도, 알아서들 하라는 말도 못한 채 어디 불편한 건 없는지 계속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정의 객(客)들은 나가기가 싫겠지. 편안하니 좀 더 있고 싶겠지. 좀 더 천천히 일을 마무리해도 되겠다 싶겠지. 내가 이 녀석들을 내 안에 더 오래 머물도록 나를 허락해버린 것이었다.
이 지경이 되니 마음이 급해졌다. ‘나의 내면이 작구나.’를 알게 되면서 내면이 작으면, 즉 그릇이 작으면 그 그릇 이상의 것을 담아내지 못하기에 지금껏 정말 열심히 쌓아 온 포장이라 할지라도 거죽과 거죽을 담은 통의 퀄리티에 언밸런스가 있다면 큰 쪽을 줄일 게 아니라 작거나 적은 쪽을 크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나의 부족한 내면을 성장시키는 기간이 무조건 필요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나와 휴전을 종식하고 나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감정, 그것을 인지하는 인식, 그것으로 힘을 얻는 손과 발, 그것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나의 긍정 정서. 이 모든 것들을 객의 눈치 보느라 외면했던 나는 이제 나를 만들어내는 주인들에게 두손두발 다 들어 항복하고 앞으로는 결코 주인을 객취급하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다.
나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나 자체가 나로써 살려 하는 자발성과 주체성, 그리고 그것들의 발현원인 창조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활동하고 운용하는 데에 내가 결코 방해 요소를 들이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체로서의 나’를 존중하고 나를 억압, 억제, 제압하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겠다는 의미이다.
나의 의식이 큰 소리로 정신에게 ‘너 또 그래?’라고 외칠 때 ‘아니야. 너희들 자리는 여기야. 그대로 있어도 돼’라고 항복하며 안전하게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지켜주겠다는 의미이다.
나는 외부와 내면 세계의 커다란 갭으로 인해 내면을 쌓을 때까지, 일정기간 균형이 느껴질 때까지, 자빠지고 넘어지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서 있게 될 때까지는 휴전이다! 했었는데 이제 휴전은 멈췄다. 그저 이렇게 오늘의 의무를 다하며 나를 지켜주는 주인들에게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나는 나에게 항복한 것이다.
나를 해체해보니 나는 곳곳에서 불균형을 억지로 꿰맞춰가며 삶을 살아온 것을 알겠다.
잘난 것은 잘났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못난 것은 못나니까 드러내지 못하고
착한 것은 마음에 없지만 착하게 보이기 위해 그리 했고
못된 것은 알면서도 일부러 용기내어 또는 생떼쓰며 그리 했다.
그렇게 무의식에 내재된 내면과 겉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불균형에 아주 익숙한 몸체가 되어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 나는 즉각 해체를 명령했고
다행히 이를 간파할 수 있는 의식이 열려 있었고
나에게 간절하게 그러지 말라고 애써주는 영혼의 자극을 감지했었고
이를 무조건 따르라 명령하는 이성이 충분히 정신의 질서 속에 기능하고 있었기에
나의 해체는 항복으로 이어져 '자체로서의 나'를 지켜주고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의 덕이다.
독서의 선물이다.
지독하게 공부에 열을 올렸던 의지의 소산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를 해체했다. 그리고 미세한 틈새까지 발견하고 있다. 곳곳에서 출몰하는 엉킨 나를 하나씩 풀어가며 균형을 맞춰가는 중이다. 켜켜히 나의 무의식에 내재된 녀석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녀석 하나를 해체시키고 제거해내니 그 안에 다른 놈이 기어 나온다. 그 녀석을 잘 타일러 내보내니 이제는 곪아 문들어져 있던 놈도,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놈도, 계속 나온다. 이런이런.. 끝났다 싶으면 또 나오고 해체시켰다 싶으면 다시 덩어리진 것의 해체를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속적으로 나의 영혼을 깨우고 의식의 세계에서 나를 운용해가는 시간의 손을 잡고 나를 ‘나로써 자유로운’ 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훗날 지나온 시간의 뚜껑을 열었을 때 입가에 미소를 띄며 걸어온 진통의 과정을 기특하게 바라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것은 나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다.
겁보인 나에게 용감을, 쫄보인 나에게 도전을 선물하는 것이다.
‘신은 겁쟁이를 통해서는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에머슨의 훈계를 다시 꼭꼭 다져서 귀에 담고 가슴에 우겨 넣고 모든 세포가 이 말씀을 품도록 나는 나에게 항복한다.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2010, 정광섭 역,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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