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나를 해체해보니 5
이 글은 출간을 전제하고 작성하는 글이라 그냥 죽죽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나면 반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그저 날 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답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나의 새벽 독서는 2019년 2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면서 책을 손에 놓은 적은 없으나 살면서 책을 읽고도 이렇게 실천력없는 무능한 인간이 나구나를 처음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나 따져보면 그렇지는 않은데 그냥 느닷없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어날 수 있을까?’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망설임은 짧았다. 아주 짧았다. 그만큼 간절히 원하던 바가 컸나 보다.
그렇게 지금까지 4년간 한결같이 태양과 책과 노트와 글을 곁에 두고 새벽을 맞이한다. 어떤 날은 졸면서, 또 어떤 날은 불안감에 휩싸여 그렇게 어두컴컴한 시간에 나는 빛이 세상을 밝히는 것을 향해 고독하게 눈을 뜨고 있다.
아둔한 나를 현명하게 이끌려,
무지한 나에게 지식을 넣어주려,
나태한 나를 제대로 바쁘게 움직여보려
새벽시간을 부여잡았던 듯하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매일 밝은 빛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에게 고마움이 느껴졌고
태양이 내게 오고 바람이 그 길을 알려주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이들의 행차에 눈꼽 만큼의 도움도 못 주는 나라서 마중이라도 나가기로 했다.
그 때부터 살짝 해가 비치려 하면 테라스에 나가 하늘로 고개 쳐들고 나만의 인사를 건넨다.
처음엔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였다가 뭘 해준 게 있다고 부탁하나 싶어 ‘오늘도 잘 해내겠습니다.’ 다짐으로 바꿨다가 다짐이 무너질 때쯤엔 ‘오늘도 그냥 흘러가 보겠습니다’ 변명도 각오도 아닌, 그럼에도 한마디는 해야겠기에 이러저러한 인사를 건네며 태양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르고 있다. 나는 이를 '태양마중'이라 부른다.
그렇게 새벽 4시에서 3시였다가 다시 5시, 그러다가 또 어떤 날은 2시. 내 맘대로 새벽 시간을 늘였다 줄였다 기획하고 제작한다. 일단 분명한 것은 새벽이 좋다는 것이고, 이 시간만큼은 양보하기 싫다는 것이고 이 시간이 주는 선물만큼은 꼭 챙기고 싶은 욕심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하루는 아주 길다.
새벽부터 오후 2시까지, 10시간 가량이 나의 첫 번째 하루다. 잠에서 깨어 하루를 사용하는 시간을 대략 10시간 정도로 퉁 쳤을 때 나의 하루는 책읽고 글쓰고 코칭하는 일과로 1번째 하루를 보낸다. 사이 잠깐잠깐 식사 시간이 있지만 남들 직장 다니는 하루를 이 시간에 몽땅 써버리고 나면 사실 몸이 축 늘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시계를 보면 오후 1~2시경밖에 안된지라 그 때부터 또 하루를 살아야 하기에 다른 일과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만들었고 지금은 습관이 되어버린. 그렇게 되었다.
물론, 난 특별히 할 것이 없다. 놀러 다니는 것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수다 떠는 것도, 어디 가고 싶은 곳도 별로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해야 해서 좋아진 것인지, 좋아져서 하게 된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글쓰기로 2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이 때는 자리를 옮긴다. 같은 공간에서 2번째 하루를 시작하려니 바짝 약이 오른 감정에 늘어진 몸이 지배당했는지 자꾸만 몸을 땅에 붙이려 난동을 피기에 이 몸뚱아리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맞춰주기 위한 배려다.
걸으며 다리 운동도 해야 하고 눈에 다른 곳도 보여 줘야 하고 무엇보다 귀로도 다소 소음이 있는 카페로 자리를 이동한 후 6시경까지 또 주구장창 글에 매달린다. 그리고 나서 저녁하고, 먹고, 운동 두어시간. 운동은 최대한 편하게 하기 위해 넷플릭스의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왠만한 인기 드라마는 모두 섭렵하는 중이기도 하고.
시간을 쪼개어 살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어느 날 문득 하루를 두 동강 내어 2번 살고 있구나를 감지한 날부터 나는 시간의 즙까지 짜내는 느낌이 참 좋다. 특히, 잠자리 들면서 느껴지는 ‘하루를 착즙한 쾌락’은 기가 막히다. 표현할 언어가 없다. 그저 기가 막히다!
새벽에 읽은 책의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하려 자음모음을 다 흩어서 후벼파고
어떤 어휘를 써야 할지 몰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쩔쩔매며 내 사유의 바닥을 기어 다니고
더 쓰고 싶은데 밥할 시간이 가까워오면 1초가 아까워 방광이 요란을 떨어도 다리를 떨며 자리를 지키고야 마는...
시간과 정성과 정신과 지식과 신체의 모든 즙을 짜내며 24시간을 보내는 일상은
삶의 모든 틈새라도 찾아서 내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의지같기도,
사유의 길에 우스운, 엉뚱한 돌덩이라도 발견하면 해치우고야 말겠다는 도리같기도,
활용하지 못하고 소모되는 시간은 1각이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무같기도.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의 뚜껑을 열었을 때 없어야 할(or 없애고 싶은) 것들을 발견한 놀라움때문이기도.
하루를 2번 사니 못해낼 일이 없을 것이라는 당찬 자신감같기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직도 날 봐주지 않겠냐는 호기(豪氣)로운 기세같기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며 한판 뜨자 덤벼드는 내면적 자아의 패기같기도.
여하튼, 하루를 2번 사는 오래된 일상은
내가 아주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듯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천만에. 난 아주아주 단순하고 아주아주 여유롭다. 일정부분의 구속을 강제함으로써 난 하루 전체가 자유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유로우니까 내 일상의 어떤 부분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이지.
구속할 자유, 자유가 구속보다 훨~씬 크기에 자발적인 구속과 고립은 나의 더 큰 자유를 위한 티켓같은 것이다. 음.. 그러니까 구속+자유=초자유. 인 것이다.
이러한 초자유의 하루 안에서 나는
오로지 나의 ‘해야 할’ 일과로 무장된 일상 속에서 ‘하지 않아야’, 또는 ‘할 필요없는’ 방해거리들이 저절로 물러남을 경험하고
오로지 책과 글에 내 모든 자원을 투자하는 일상 속에서 ‘남’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치밀함을 경험하고
오로지 외부가 아닌, 내부로 모아진 시선의 일상 속에서 나의 자아는 위대해지려, 커지려, 확장되려 용처럼 나를 휘감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 경험으로 나는
나를 희망고문으로 설득하며 부여잡고 있는 현실적 자아가
희망과 기대와 결과됨의 믿음이라 외쳐대는 내면적 자아에게 참패했음을,
나의 능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진단하는 현실적 자아가
능력보다 더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겠노라는 내면의 더 위대한 자아에게 또 참패했음을,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는 현실적 자아의 꼬득임이 강렬했지만
‘하고 싶은 것’이 곧 ‘해야 할 것’이 되게끔 묘수를 둔 내면적 자아에게 완벽히 참패했음을,
계획하고 예측하려 애쓰는 현실적 자아의 노고를 비웃으며
그저 흐름에 따르라. 그저 명을 받들라, 그저 결과를 믿고 걸으라 등을 토닥여주는
내면적 자아에게 항복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자유다.
구속된 줄 알았는데 그 어떤 것에도 난 구속되어 있지 않음을,
설사 제약, 제한, 한계를 느끼더라도 이는 구속이 아니라 다음 계단으로 가기 위한 절차, 처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나는 완벽한 ‘나’로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을 느낀다. 김우창 교수의 표현대로 ‘자유로운 삶이란. 원인과 결과, 동기와 행위, 그리고 의무와 수행이 강제적 연쇄관계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영향과 선택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즉 내 안에 있는 자유(自有)로써 나의 모든 것을 자유(自由)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삶.
내친 김에 나의 자유가 어디까지 도달해있는지 살짝 언급하고 싶은데, 나는 나의 죽음 그 뒤의 삶에서까지 원하는 것들을 열거해둔 적이 있다. 시간을 초월하여 초자유의 삶을 느끼기 시작한 초기였을 것이다. 보는 이들은 왜 이렇게 자신을 구속하면서 사느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좀 편하게 살아라. 라고 하는 말이 전혀 와닿디 않고 오히려 ’난 지금 너무 자유로운데...‘싶어서 아무런 대답도 못했던 당시... 나의 정신세계는 이미 초자유의 세계 속을 거닐며 그 어떤 것들도 나의 선택에 의해서지, 구속이라 느끼지 못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나중에 내 생을 다하고 다음 생으로 이동하면 내 삶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준 이들을 모두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 꿈꾸기 시작했다. 정말 '신이 허공에서 날 떨어뜨리듯이' 다음 생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위에서부터 그 공간으로 진짜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에머슨을 만나 '당신이 스웨덴보리를 통해 배운 그것을 나에게도 알려달라’하고 어떤 때엔 에머슨 손을 잡고 스웨덴보리를 만나러도 가며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해보기도 하고
케인즈와 러셀, 버지니아 울프가 토론하는 그 현장에 진땀 흘리며 앉아있어도 보고
네로 앞에서 세네카를 대신해 항변하기도 하고
코스톨로니나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투자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조르다가 성에 안차면 워렌버핏, 짐로저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를 직접 그의 묘사로 들어도 보고
에머슨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그와 대화하며 노트하고
궁수의 모습을 그리는 파올로코엘뇨를 옆에서 지켜보고
사아디의 우화 속의 그 맨발을 직접 만져도 보고
나폴레온 힐의 연설장에 내가 청중으로 자리하고
마르쿠스아우렐레우스가 도대체 명상록을 어떻게 집필했는지 옆에 따라다녀보고
귀곡자를 만나 직접 그의 처세술을 전수받고...
시간을 초월하여 단순한 일상으로 나를 무장시키니 이렇게 초자유의 상상을 하며 하루 종일 히죽거리기도 한다. 사실 하루를 2번 산다는 이 기준은 단지 시간을 양적으로 구분지은 것 뿐이다. 시간의 질적인 측면으로 가늠하면 글쎄... 하루를 1주일처럼 산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상당히 집중을 잘하는 편이다. 걸음도 빠르고 먹는 것도 빠르고 손도 빠른 편이라 요리할 때도 남들이 몇 시간 걸릴 것들을 나는 금새 해치운다. 아주 효율성이 높은 두뇌와 신체를 가졌다. 이는 정말 나의 특별한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해내는 양만을 따지만 하루를 2번이 아닌, 그 이상으로 사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감히 과신해본다.
또한, 이러한 바지런한 신체 외에도 나는 포기가 빠르다. 이것을 하려면 저것을 포기해야 하지? 라는 발상이 드는 순간 그냥 포기해 버린다. 안 가고 말고 안 보고 말고 안 하고 만다. 그렇게 포기한 그 자리에 해야 할 것을 탁 집어넣어 집중해서 해치우기에 낭비나 소모되는 시간이 별로 없는 편이다. 두 세벌의 옷을 번갈아 입고 매일 같은 신발을 신고 화장은 안 하니까 여자라서 더 시간을 요하는 면도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실웃음이 터지는 이유는 ‘이렇게 단순하게 산단 말이야?’ 하며 내 일상이 또 보였기 때문이겠지.
‘단순함이 반복되는 일상’이 ‘자유’로 느껴지는 모순 속에서
나는 위로가 아닌 명제로서 이를 경험으로 증명하는 중이다.
쇼펜하우어와 데이빗 소로우가 알려준 사소한, 소박한 행위들이 ‘인생’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결되었을 때 ‘인생의 최종손익계산’에서 거대한 힘이 된다는 것을.
시간은 촘촘히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활용해야 할 자원이라는 것을.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중심으로 그것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 정리된다는 것을.
바보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지만 천재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푼다는 사실을.
이것저것 다 해내는 멀티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하면 모든 것들이 물같이 흐른다는 것을.
나에게로 오고 가는 사람, 사물, 감정, 사태.. 모든 것들에 나를 기꺼이 내어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이로운 효율이라는 것을.
모든 것을 다 떨군 채 그저 가야 할 길을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라 위대한 정신의, 물질의 부를 위해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현재로선 새벽 시간이 제아무리 좋아도 더 늘일 수는 없다. 간혹 너무 늦게 잠이 든 날은 새벽 4시 기상이 어려워 5시 가까이에 눈을 뜨기도 하니 더 늘일 수 없다면 더 아껴야 할 것이다. 시간의 양도 더 촘촘히 아껴쓰고 흘러가는 시간의 탁도도 더 맑게 활용하고 새벽이 주는 영감도 더 강하게 느끼고 새벽이 뿜어내는 기운도 더 많이 내게로 담고. 그렇게 내게로 준 자연의 풍성한 기운을 담아내도록 나는 늘 깨어있어야겠다. 매일 진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2번째 하루에게 바통터치도 잘해서 잠들기 직전 ‘하루를 착즙한 쾌락’을 매일 느낄 수 있도록, 이 단순하고 행복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는 늘 깨어있으련다.
#쇼펜하우어인생론, 쇼펜하우어, 2010, 박현석역, 나래북
#소로우의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2003, 윤규상역, 도솔
#행복의 건축, 알랭드보통, 2007, 정영목, 이레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우창, 2014,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