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나를 해체해보니 6
이 글은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작성하는지라 그냥 죽죽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나면 반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그저 날 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답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이번엔 감정이다.
감정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작업의 끝을 보려는 자세 자체가 오만인지라 그만 파헤치고 지금 이해한 지점에서 언어화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내 안에 있는 사유 능력에서만 나오는 어떤 생각들이 내 안에 있음’을 알았다면 ‘본유적인’ 관념이 내 안에서 움직인다고 인지했다면 ‘좋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비록 사막에서 성장했고 자연의 빛 외에 계몽시킨 빛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더라도 근거들을 정확하게 고찰했다면’ 본질적인 추론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내가 걷는 사유의 길에서 ‘감정’을 언어화시키는 시도 자체는 의미있다고 하겠다.
앞서 길게 썰을 풀었듯이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순간의 모습은 감각으로부터 감정, 이성, 행동으로 이어지는 매커니즘을 갖는다. 바람으로 내 신체가 시원함을 느끼면 감정적으로 마음이 온화해지고 이성은 ‘어디로든 떠나볼까?’라고 지시하고 행동은 이성에 따른다. 또 어떤 실체 없는 감각으로 인해 (이유없이) 나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고 두려운 감정을 전해 받은 이성은 ‘그럴 필요 없어.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계속 하던 대로 하면 돼’ 지시하고 행동은 감정을 저지시키며 이성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 불리고 ‘이성적 동물’이라 구분되는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살면서 체험하고 있다.
감각과 이성에 대해서 앞서 충분히 거론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이제 감정이란 정체를 살포시 들춰보려 하는데 감정이란 무형이라서 추상적이고 비정량적이며 불확실하다. 두려움, 좌절감, 죄책감, 공포감, 용기, 열정, 환희, 기쁨, 슬픔, 숭고함, 경이로움, 신비감, 황홀감, 조급함, 긴장감, 압박감, 헤아릴 수 없는 수천수만가지의 감정에 우리는 매일 신체를 맡기고 있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까지 모두 보탠다면 가히 우리 인간이 창조해낸(어쩌면 이미 심겨져 있는) 감정이란 얼마나 디테일하고 얼마나 다채로운가. 감히 말하건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의 지배를 늘 허락한다고 선언한들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감정의 지배를 허락한다는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우주의 시선, 우주의 관점으로 나의 시야를 옮겨보자.
우주는 만물의 조화를 위해 창조된 모든 것들을 진화시키는 것이 일이다. ‘조화’와 ‘진화’라는 단어에 집중해보자. 조화가 이뤄지려면 모든 것들에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진화가 조화롭게 이뤄지려면 다양하지만 연계되어 있어야만 한다. 각자 자체목적성으로 동종이든 이종이든 서로 연계되어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게 이끄는 것이 우주가 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 거대한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다양한 만물 가운데 ‘언어’라는 소통체계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종(種)에 불과하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인 인간이라는 종이 만물과 소통,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언어를 제외한 소통 시스템이 필요하다. 물론 이 시스템은 모든 만물이 공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여야 한다. 그래야 다양성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지을 수 있으니까. 그 소통체계가 ‘에너지’다. 우주는 모든 만물과 에너지로 교신하고 만물들간에도 에너지로 서로 소통하고 있다. 결국, 우리 인간 역시 ‘에너지’로 교신하는 것이다.
에너지, 기(氣)라 불리는 이것을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모든 만물의 가장 기본단위, 근원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사실 2300여년 전 파르메니데스, 제논, 레어키포스의 통찰이 천재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모든 물질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의 주장은 ‘우주 전체는 끝없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는 무수한 원자들이 돌아다니는데 여기에는 위도 아래도, 중심도 경계도, 맛도 색도 무게도 없는 진공‘일 뿐이라는 것이다.
2000여년이 흐른 뒤 아인슈타인, 리처드파인만, 카를로로벨리로 이어지는 실증과학자들에 의해 세상은 ’원자들이 임의로 모이고 흩어져 있는 것’으로서 원자들이 서로 끌어당겨 모여진 하나의 짜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지식체계에 들어서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과거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원자, 근원물질, 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자는 ‘서로 조금 떨어져 있을 때에는 끌어당기지만 서로 압착되면 밀쳐내면서 영구운동을 하며 돌아다니는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의 삶, 생각, 꿈 모두 원자들의 산물이며 우리의 희망과 감정 역시 원자들의 조합으로 형성된 언어로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이제 다양한 학문분야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보이지도 않는 원자는 서로 끌어당기면서 압착하고 밀쳐내며 무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교신을 주고 받으며 돌아다니며 이 원자들의 교신수단이 에너지다. 결국, 원자로 구성된 우리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인 에너지란 ‘우리가 마음이나 의지라 부르는 것의 직접적인 작용의 표현’이다. 우리가 ‘언어’라는 소통수단을 지니고는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바대로 더 큰 우주의 시선으로 우리를 들여다 봤을 때 전우주의 조화를 위한 더 근원적인 소통방식은 원자의 교신수단인 에너지이며 에너지를 느끼는 상태를 우리는 ‘감정’이라는 언어로 표현 것이다.
즉, 우리는 에너지로 교신하며 에너지는 감정이라는 언어로 표현될 뿐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은 감정(에너지)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할 뿐 그 기저에는 감정으로 세상과 교신하는 것이다. 교신이란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이며 무한의 공간에서 형체없는 감정이라는 에너지가 교신하는 방식은 섞이고 연결되며 유유상종의 원리대로 같은 속성의 에너지를 서로 끌어당기고 그렇게 모인 에너지가 자신의 힘을 키우고 키운 힘으로 인간은 자신의 삶의 궤를 일궈가는 것이다.
결국, 감정으로 삶이 형체화된다.
삶은 감정의 형체다.
흔히들, 걱정이 많은 사람은 늘 걱정에 둘러싸여 산다. 고 하는데 걱정이라는 감정이 걱정의 에너지를 세상에 보내고 동종의 에너지를 모아 삶의 궤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걱정스러운 일들에 둘러쌓여 살게 된다. 왜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도록 그토록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지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에너지의 흐름과 에너지의 교합과 연계에 대한 인지를 품은 채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대가 긍정적 에너지를 내뿜어주면 나도 덩달아 감정적으로 기뻐지니 함께 기쁨을 키우게 되고 더 좋은 일이 일어날 희망을 품게 되는, 반면 저 사람만 만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면 우리는 그 기분나쁜 에너지때문에 만남을 꺼리기도 하니 우리가 지닌 천성적인 능력은 감정을 이미 에너지라는 차원에서 얻고자 또는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처럼 우리는 언어를 제외시키더라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원자의 존재를, 원자들끼리의 소통방식이 에너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로 인간은 에너지의 교신을 감정이라는 도구로 내뿜으면서 감정에 지배당하는 동물인 것이다.
다음 편에
인간은 왜 사실보다 감정에 더 무게를 싣는가?로 이어집니다.
#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전양범 역, 2016, 동서문화사
#황제의 철학,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노혜숙역, 2004, 세종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 2018, 김정훈역, 샘앤파커스
#마음먹은대로 된다. 찰스해낼, 2014, 뜻이있는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