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나를 해체해보니 8
이 글은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작성하는지라 그냥 죽죽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나면 반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그저 날 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답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10여년 전 나는 살아야 했다. 생존의 갈림길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하지만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불안감, 막막함, 공허함, 의미없음, 포기, 고립, 소외, 단절, 그리고 무가치함으로 인한 극도의 피곤함, 이로 인한 절망감과 허무함에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왜 나를 또 살려놨는지, 왜 오늘을 또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원망의 한숨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변함없는 일상은 그저 내 감정과는 무관하게 일관되게 흘렀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가고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밥하고 청소하고 그렇게 일상.이라는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내적으로 나는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무가치, 무의미, 무의욕 상태였던 것이다.
이 지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뭐가 힘들어서 맨날 죽상이냐?’라고 누군가는 드러나는 인상만 보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싼다’며 내가 지닌 것들을 감안해서는 이런 감정상태를 가지면 죄인인 듯 말하고 심지어 같이 사는 남자는 ‘감정사치’라며 ‘안 바빠서, 한가해서, 살만하니까’ 그렇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속상은 했지만 그 말들이 모두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별로 힘든 것도 없었고 바쁘지 않으니 감정놀이라 치부될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과 비교되어 나는 감정사치나 부리는 감정기능이 취약하거나 감정무능력자가 된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나와 같은 경우를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고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인정한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싸듯 감정사치에 빠져 허우적대는 무기력한 시절의 나를 인정한다. 하지만 표면으로 인해 내면까지 그렇다고 치부되는 것을 인정은 하되 수용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감정의 폐허 상태였으니까.
폐허가 되었다는 것은 폐허가 되기 전까지 제대로 된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폭격을 맞았든 쓰나미에 쓸렸든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자리를 잃고 소실되거나 무너져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재건설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가 된 것이다. 마치, 풀조차 거둘 수 없는 사막처럼 말이다. 사막에게 왜 꽃과 나무를 키워내지 못하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사막이니까. 원래가 그런 거니까.
하지만 폐허는 다르다. 지금 상태는 사막의 기능밖에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기능이 무너진 감정은 이전 기능을 되찾으려는 항상성이라는 본능과 본래의 기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역에너지도 가동되니 사막처럼 아무런 생성의 기능이 없어 보이긴 하겠지만 에너지 면에서는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기능면에서는 사막같은 능력밖에는 없는, 완전한 불균형상태에 놓여 어렵고 괴롭고 곤란하고 힘들었던 것이다. 감정이 두동강난 불균형 상태에서 한쪽에선 ‘일어나야지’, 한쪽에선 ‘못 일어나’를 외치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폐허 상태가 된다는 것은 숨은 쉬고 살고 있지만 내면에선 죽음의 에너지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멀쩡한 집도 사람이 오랜 기간 살지 않으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스스로 발산하며 귀신, 즉 죽은 자들이 나올 듯한 분위기가 풍기게 된다. 감정폐허상태도 그렇다. 아무리 웃어도 에너지는 죽음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실제 전쟁 중에 어린 아가들이 부모를 잃고 의욕이 없는 상태를 보일 때 제 아무리 잘 먹이고 보살펴도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신체가 아닌, 정서적인 타격이 그만큼 사람의 생명에너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하튼, 폐허면 폐허인거지 왜 폐허가 됐냐고, 왜 건설하지 않느냐고, 폐허이지만 건물로서 기능을 하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감정폐허상태에서는 이성도 신체도 상식 밖으로 말을 듣지 않는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싸는 감정으로 숨을 쉬며 사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감정폐허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누구는 진하게 누구는 약하게라도 말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밥이 모래알’처럼 씹혔던 경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도 계속 주체할 수 없이 흘렀던 눈물, 개그콘서트를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대는 가족들 옆에서 왜 자신은 웃지 못할까에 대해 오히려 자책하며 괴로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정서상태, 감정상태가 나를 바닥으로 꺼뜨리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감정상태지 신체나 지식이 아닌 것이다.
문제로 지목된 감정. 폐허가 된 감정은 외부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일어서기 어렵다. 감정이 나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면 제 아무리 강인한 신체와 더 강인한 정신도 일순간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일사분란하게 처리반이 동원되면 폐허의 잔재들은 모두 치워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듯 열정도, 의욕도, 희망도, 바람도, 행복감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무기력이 극을 치달으며 삶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하더라도 외부의 도움이면 조금씩 소생시킬 수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땅을 다시 고르고 어떤 건물을 짓느냐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기존의 땅자체를 훼손시키면 안되는 것처럼 감정 역시 우리 몸의 어딘가를 훼손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의 기능을 복구시켜야 한다. 그래서, 감정폐허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감각을 마비시키는 제압이 아니라 감정의 척도, 감정의 각도계를 바로잡으려는 정신의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 죽어가던 기능을 되살리거나 이미 소멸된 기능을 새롭게 무기로 쥐고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든 정신에 의지해야만 했다. 본능에 이미 존재하고 에너지를 품고 있는 정신 말이다. 정신에게 갈구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달라고, 그렇게 감정을 이겨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던 그 때,
나의 외부는 바로 약이 아니라 책.이었다.
책으로 만난 많은 저자들이 나를 도왔다.
감정과 정신은 서로를 죽이면서 강해지고 각자 강해지면서 서로를 생성시키는 아주 기괴한 공생, 기생 관계다. 아군이면서 적군인 상당히 묘한 관계다. 정신이 강한 타격을 받으면 마치 친구따라 강남가듯 감정도 기능을 잃어버리고 무너진 감정을 되살리는 역할 역시 절친이자 아군인 정신에게 있다. 하지만, 정신이 자기기능을 못하면 못된 감정이 냉큼 그 자리를 점령해버려 오히려 정신을 더 망가뜨리기도 하고 그걸 알아챈 조금 현명한 정신은 얼마 전까지 아군이었다가 적군으로 배신한 감정을 물리치려 내 몸을 온통 전쟁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어떤 순간, 일시적으로 단면들이 모여 입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만들어진 입체가 몸체를 불려 드러난 것이다. 애초에 생성된 아주 작은 입체 속에는 아마도 두려움보다 더한 공포심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정신이 이를 감지하지 못하여 부정의 감정이 스스로를 키우게 냅두면서 말이다.
무의식에 오랫동안 내재된 공포에 화려한 옷을 입히고 치장, 분장, 변장을 해댄 채 일상을 지낸다 하더라도 ‘화려함’이 ‘화려하지 않은’ 방향으로 희석되는 동안 공포는 그 안에서 제 몸집을 불리고 있다. 무의식에 존재했기에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아주 미미하게라도 ‘못해’, ‘안 해’라는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공포는 더 강한 색채를 띄며 더 크고 강하게 자기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들더라도 그 안에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해내기 버겁다는 공포심이 존재하며 이러한 무의식 속의 감정이 동종의 에너지와 교신하며 정신의 무의미, 신체의 무기력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문제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 이면에서 보이지 않게 몸집을 불린 감정이다. 감정이 얼마나 몸집을 키웠냐에 따라 감정 바깥의 현상과 죽이 딱! 맞았을 때 감정은 외부로 폭발한다. 에너지니까. 에너지는 동종을 불러오니까. 몸집을 키운 감정이 자기가 터지기 위해 일을 만들었든 외부의 어떤 현상이 아직 커지지도 않은 감정을 강하게 끌어당겼든 여하튼 죽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내 안의 감정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때서야 나는 의식한다. 아... 나의 무의식에 이런 녀석이 자라고 있었구나...
나 역시 그랬다. 지독한 감정과의 내적 싸움은 결국 사단을 내어 일을 그르치고 내 몸도 상하게 만들었다. 보이는 모든 증상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반응이다. 내 키가 170인데 당시 내 몸무게가 40킬로그램 겨우 나갈 정도였으니 앞서 언급했던 전쟁통의 아가들에게 아무리 영양있는 음식을 먹인들 서서히 건강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나는 40이라는 나이에 몸무게와 비실거리는 신체로 실제 경험했던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를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몸집을 불린 감정이 내 신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공포감까지 보태진 그 때부터 나는 시작했다. 정신에 먹이주기. 정신을 강화시켜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살기 위해 감정에 저항하고 외면하고 대항까지 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책에 매달리기 시작했던 때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새벽에 체계적으로 읽어 내려간 것은 아니지만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고 책에 쓰인 대로 따라하며 구분없이 이것저것 정신에 먹이를 주면서 흐트러진 이성을 바로 잡으려 하루종일 애썼다. 생존을 위한 외롭고 고독한 혼자만의 줄타기를 마치 독립운동하듯 비밀리에 매일매일 거행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멀쩡하다. 멀쩡보다 더 좋다. 아둔하기 그지없는 나여서 지금에서야 겨우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나를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추락시킨, 아니, 감정이 몸집을 불려가며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 감정이 내 인생에서 하려 했던 일은 지금 이러한 글을 쓰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지독했던 생존과의 싸움을 딛고 조금씩 다시 세상과 조우하면서
체계적 책읽기와 인간에 대한 탐구,
사유의 길을 걸으며 느끼는 쾌락,
이 배움을 사람들과 나누며 나를 진정한 교육의 길로 걷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지금의 내 모습에서부터 연역하면서
당시 감정이 할 일을 진짜 제대로 하고 나를 떠났구나.
당시 날 찾아왔던 감정은 자기 목적을 달성했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감정은 제 아무리 불손하거나 불필요한, 정말 꺼져버리라고 욕하고 싶은 상태를 띈 것이라 하더라도 자체의 의미는 숭고했다. 나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삶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며 나의 이성을 바로잡아주며 정신의 질서를 세워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나는 실제 나의 삶에서 경험한 것이다. 감정이란 녀석은 무너져도 또 세워진다. 반드시 세워진다. 폐허가 되었다 하더라도 더욱 견고하고 더욱 화려하고 더욱 기능좋게 재건축될 수 있다.
인생에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감정의 요동, 감정의 폐허상태. 이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신이 의식의 세계를 중심으로 놀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 감정이란 녀석을 정신과 제대로 교합시키면 강력한 불굴의 의지로까지 자신의 힘을 초월하여 과시하지만 어긋난 부정교합은 공포심과 불안이 힘을 얻어 세상을 온통 회색으로 보게끔 시야를 흐리게 하고 다채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며 모든 감각을 통증으로 받아들여 영혼이 제 아무리 외쳐대도 듣지 못하도록 마음의 기능을 둔탁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인지하는 상태가 세상이라는 나름의 정의에 자기 삶을 내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의 끝을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