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자에 들어가든 내 선택이니까.
매일 새벽 5시~6시 30분까지 독서모임을 진행한지 수년째.
늘 반복되는 시간들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책이 바뀌면서 다른 주제, 다른 대화로 이어지는 이 감동은 오늘도 여전했다. 오늘은 스캇펙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은 한 분의 작은 속삭임에 나도 모르게 또 열변을 토하고 말았다. 나 역시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는 있지만 어찌 처치해야 할 지 몰라 쩔쩔매는 나만의 '트라우마'.
지난 수년, 매순간 나에게 분신처럼 달라붙어 사는 몇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책, 트라우마, 위염이다. 그 놈의 트라우마가 정서적으로 날 아무리 제압하려 해도 책이 이를 방어해 주었기에 덕분에 위염증상도 간헐적으로만 날 괴롭힌다. 책을 통해 내가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법이 바뀌었다면 내 방법은 꽤 쓸만하다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트라우마'에 대해, 책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2가지다.
첫째, '트라우마'가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트라우마'라고 내가 규정짓는 그 순간부터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사실.
둘째, 그 괴롭힘의 방법이 전혀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나에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매 끼니마다 아주 조금씩 독성물을 타서 밥을 먹이는 '친절한 금자씨'처럼 말이다.
"혹시 여기 트라우마 없는 분 계세요?"
예상대로 독서모임 회원들 모두가 고개를 좌우로 살며시 흔든다.
'저.. 트라우마 있어요.'라는 의미다. 당연하다.
우리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트라우마랑 연결시킨다(진짜 강인하고 특출난 사람은 제외).
'나는 그때 그 일때문에, 나는 이렇게 됐으니까, 지금도 어쩔 수 없어'
라고 나 스스로 인과관계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절대적으로 고통이나 어떤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억울해서 분노한 경험, 배신으로 절망한 경험, 재난에 굴복한 경험, 적당히 타협하는 자신의 부정에 눈감아본 경험, 잘못인줄 알면서도 기어이 그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던 경험, 내 한계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좌절했던 경험.
더러 우리는 이렇게 한 순간 삶을 뭉개버린, 그 강했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트라우마'라 이름붙이고는 늘상 괴로울 때 그 녀석을 소환해 그 속에 숨어버린다.
'어쩔 수 없어. 난 이런 경험때문에 힘드니까.'라며.
어쩌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게 내 한계야.' 라며 상자 하나 만들어 그 안에 '한계속의 나'를 꽉꽉 채워넣는다.
그럼 어떻게 될까?
점점 상자안은 가득 채워지고 점점 상자의 힘은 강해질 것이다.
먼저, 상자 바깥에서 상자를 바라보자.
그 상자는 그냥 나의 좀 못난 부분, 울퉁불퉁하고 모난 부분, 좀 무식한 부분, 약간 이물질같은 그런 거.
나의 그런 것들이 담긴 상자다. 물론, 누군가에는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가령,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한 사건사고, 불우했던 가정환경 등의 악몽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겪기 어려운 참담한 사건사고의 수위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트라우마다 아니다를 매기겠냐마는 개개인이 느끼는 그 강도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괴로운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다 한들, 내가 평생 그것에 얽매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한계를 긋고 내 미래를 그것때문에 손해보며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과연, 상자 안에 담긴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 상자를 바라보는 내가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일까?
이번엔 좀 더 시야를 넓혀보자.
내 인생에 상자가 그거 하나뿐일까?
결코 아니다. 누구에게나 수많은 상자들이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상자 외에도 웃긴 나를 담는 미소상자, 잘난 나를 담는 멋진상자, 탁월한 나를 담는 천재상자, 기억하고 싶은 나를 담는 기억상자, 지키고 싶은 나를 담는 지팡이상자.
내가 어느 순간, 어느 상자로 들어가야 한다면 굳이 그 트라우마 상자가 아닌, 다른 상자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상황이 또 나를 괴롭힌다면, 또는 예상된다면, 트라우마상자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편할 지 모른다. 왜? 늘 그래왔으니까. 그렇게 날 그 상자 안에 넣으면 일단 습관적으로 '안정'은 되니까.
다른 상자로 들어가려면 마치 '우영우'가 자폐때문에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나 어렵고 낯설고 두려우니까.
그냥 하던대로 트라우마상자로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내가 트라우마상자 안에 담긴 것들로 트라우마라고 규정지은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야, 그 상자로 들어가는 나의 정신이 문제였구나. 냉정하지만 나의 정신이 약하고 아직은 근육이 덜 생겼으며 습관적으로 내가 익숙한 쪽을 택한 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다른 상자들을 외면했던 것이었구나.
우리는 대부분 트라우마를 '없애거나 극복'하려 한다.
어떻게 그걸 외면하고 툴툴 털고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툴툴 털며 없애버려야 하는가? 그냥 그 경험조차도 나의 것이니 내가 안아주면 안될까?
남이 아닌, 내가 먼저 인정하고, 하지만, 키우지는 말고 그렇게 살면 안될까?
그러려면, 트라우마를 대하는 나를 바꾸면 어떨까?
좀 전 말했듯이 트라우마상자 안으로 들어가기 전 트라우마상자 밖에서 나에게 상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강제로 줘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 관심밖에서 뒹굴고 있는 다른 상자들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이다.
모든 상자의 제작자는 자기 자신이니 어딜 들어가든 무제한 출입이 허가되어 있다.
어디로 들어갈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다른 상자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려는 에너지를 써보면 어떨까?
트라우마상자에 나도 모르게 빠져서 애쓰며 괴로움에 떠는 그 공포스러운 에너지나
다른 상자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둘셋을 외치는 에너지나 어차피 써야할 에너지라면 후자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처음엔 어렵지만, 휴! 다행인 것이 처음은 1번뿐이니까 그 다음부터는 좀 쉬워질 것이고 또 그 다음엔 익숙해질 것이고 그리고 나면 다른 다양한 상자들도 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점점 나는 다른 다채로운 상자들에 들어가는 재미로 인해 트라우마상자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될 지 모른다.
늘 숨어 있던 어두컴컴한 동굴보다는 어떤 색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가 맛을 본 그 재미가 훨씬 감정에 강하게 작용해 '느낌'으로 내 세포 곳곳에 남아있을 테니까.
습관은 다른 습관으로만 만들어진다.
트라우마를 없애려는 에너지를 트라우마를 외면하고 다른 상자에 진입하는 에너지로 활용해보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굳이 없앨 필요가 없다고, 아니, 없앨 수가 없다고 다시 말하고 싶다.
단, 그 놈을 배부르게 하지는 않아야 한다.
인디언우화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내 몸속에 사악한 늑대와 순한 양이 있는데 싸운다면 어떤 놈이 이길까?'
정답은 '내가 먹이주는 놈'이다.
내가 트라우마상자에 자꾸만 들어가서 그 녀석을 배부르게 하기보다 다른 상자로 자꾸만 들어가서 놈을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그 녀석의 먹이는 과거 나에게 각인되었던 기억이다. 기억은 '감정의 강도'가 높은 것부터 순서대로 나열되는 것이니 자꾸만 그 기억을 소환하지 말고, 그 기억을 외면하다보면 기억이 소멸되지는 않더라도 '감정의 강도'는 점점 약해질 수 있다. 배고프고 약해 빠지도록 만들어서 그냥 달고 사는 것이다.
뭐 어떤가? 인생에 아픈 주머니 하나 차고 사는 게 비단 나만 그럴까?
못난 나를 드러내면 잘난 내가 된다. 아프다고, 이래서 자주 못나진다고 나를 드러내면서 숨기거나 애써 버리려 말고 그냥 살자. 그러다가 삶의 어느 시점에 그 주머니 한번 가만.. 들여다보면
과거.. 아파했던 나를 만나 위로를 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도 나, 지금의 모습도 나.
이렇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대화하는 멋드러진 시간만으로도 그 주머니는 충분히 가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