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Sep 03. 2022

신념을 위한 장치

경험이 인간의 사고체계에 이미 자리잡힌 줄기의 근육을 강화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줄기를 만든다면

경험의 축적은 분명 내 정신의 질서를 담당하는 중추적인 역할의 수행자라 할 만 하다.

그래서 경험의 지표가 될만한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딘가를 헤매고 다니며

경험을 위한 경험을 위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한다.


자리잡혔던 지식의 틈새로 경험이 새어들며 형성된 사고는

내 인생의 방위를 결정하고 -이를 사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정된 방위를 기준으로 인생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굵직한 기둥을 

우리는 신념이라 한다.


이 신념에 기준하여 스스로가 수용한 사회적 질서들 - 윤리나 도덕, 예와 법 등이 굵직한 줄기로 우선 자리잡고 비전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개인의 이념도 굵은 기둥인 신념의 연결에 적합하게 기둥의 중심부에 채택되어 내 사고와 행동을 주도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2가지의 방식, 즉,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지시는 이 굵은 기둥들이 연합하여 명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롭게 파생된 줄기는 나도 모르게 주입된 것들이 대다수다.

가령, 윤리적인 강제성으로 부여된 도덕률, 사회질서에 반하지 않는 법률, 인간사회에 지켜야 할 예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강제로 내게 부착되어 고착된 이 줄기들에는 다소 가는 줄기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생하기 시작한다. 규율과 규칙, 관습, 예의 등이 그것들일 수 있는데, 

이들을 내 신념이라는 기둥에 결합시킬지의 여부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의 판단을 가미한다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게 나의 견해다.


신념이라는 강력한 기둥을 지닌 인간이라면

이것과 제법 효과적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한, 

그러니까, 경직되기보다 유동적인 줄기들을 시대와 시류와 자리에 따라 재배치가 가능하도록 부착시키는 

요령(要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묘한 이치)을 지닌다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자신이 터놓은 신념의 길목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중심기둥이 그다지 굵지 않은 대나무가 단단한 기둥의 부드러운 결들을 따라 

가지들을 아주 가늘에 자라게 하여 심한 바람에도 정작 가지는 부러질지언정

기둥은 결코 부러지는 일이 없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과 같다.


신념은 항시 강력하게 불변의 기둥으로 서 있고자 하지만 

강제적으로 부착된, 경직된 줄기의 투쟁으로 신념의 에너지는 흡입당하기도,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느닷없는 강력한 비바람에 상처나고 부러지기도 하기에

우리는 수목(樹木)물주머니와 같은 장치로 

중심에 있어야 할 그것이 제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어야 한다.

앞서 말한 요령을 지니라는 것이다.  


요령을 갖는 최선은 쉼없는 내적사고의 운동과 경험의 실천에 있다.

또한, 이 활발한 운동에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발적인 것은 무엇이며 비자발적으로 복종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가늠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의식적(자발적)으로 지적활동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나의 사상체계의 기준으로 재단해보고

나도 모르게 복종당하고 있었던 지적활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파헤쳐보는 시간을 자신에게 할당해야할 것이다. 


한마디로,

신념이 의식의 확장으로 굳건해지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인식의 가지들이 자유롭게 형성, 파괴의 과정으로 질서를 잡아가면서  

나의 중심인 신념이 제대로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연합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수고는 분명 수목물주머니의 주사바늘을 꽂거나 빼버릴 과감함을 내 안에서 탄생시킨다.

인식을 수용할지 파괴할 지 결정할 힘이 생긴다는 의미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사고와 경험의 운동성을 우리가 '습관'이라 부른다면

습관이 나의 의식적 활동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복종인가를 스스로의 기준으로 검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간파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보이지 않는 신념이라는 기둥은 이미 침범해있는 무리와 새롭게 침입할 방해꾼들이 항시 곁을 노리고 있기에 스스로가 검열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자기 생명을 놓아버리는 위기를 맞는다. 

침범당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911사태와 같은 사건사고, 독재자들의 주도적 행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수없이 목격했으며 개인으로 시선을 옮겨도 이러한 과거 경험은 누구나 비밀속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념이 선으로 또는 악으로 표출되는 힘은 

신념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

신념이 그릇된 방향으로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차단하지 못한 

나의 검열의 게으름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신념이 애초에 올곧게 만들어놓은 그 길목을 따라 힘겹지만 순조롭게 가고 있는지에 대한 

처절하면서도 철저한 스스로의 검열은 

자신의 신념이 스스로가 결정한 방위에 따라 시간을 보내게 돕는다. 

이로써 인생의 주인공인 자신은 자신만의 인생연출가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복종당하고 있는 활동은 

그것이 가진 경직성에 의해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의 활로를 막아버려

자기가 자랄 키만큼, 자기가 창조해야할 열매만큼 그 양과 질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는 해충과 같다. 

해충도 그 스스로의 삶을 위해 치열하게 그 안에서 살고자 기를 쓰고 있을테니

내가 나무로서 기능하려면 나에게로 침입하는 비바람과 해충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열의 희생을, 박멸의 고통을, 치유의 시간을 자신에게 부여하여

이들이 자신의 삶으로 전진하는 연결의 길목은 차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단은 내 신념의 길목을 삶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정신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태도다.


신념을 만든다는 것은 

내 삶이 걸어가야 할 거대한 길목을 터놓았음이며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검열의 냉정함으로써 희생과 포기와 각성과 인내로 그 길을 걷고 있음이며

신념을 누린다는 것은 

내 정신의 활발한 활동이 주는 역동성에 내가 흥분하고 있다는 쾌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트라우마를 이렇게 다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