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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5. 2022

'원하는 나'에게 복종할 것

믿음에 대한 소고

벌써 3권째 노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적고 또 적고

지우고 또 지우고

이뤄지면 동그라미, 이뤄지기 전이라면 동그라미치고 싶은 마음을 더 간절하게 키우며

매일매일 나에게서 치고 올라오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둔 노트.


무엇이 '원하는 나'로 나를 데려가는가?

이 물음의 해답으로 나는 감히 '믿음'을 말하려 한다.


관념의 형상화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지, 내가 무엇을 지향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많은 이들의 머리속은, 가슴속은, 정신은 어지럽다.

내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고

'원하는 나'가 되는 것에 간절하다.


원하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나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많은 이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이끌려 어디선가 배운대로 목표를 쓰고 외치곤 하지만

왜 누군가는 다다르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하는걸까?

과연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나는 감히 이 차이에 대한 해답이 '믿음'에 있다

주장하려 한다.

나는 감히 '원하는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다리를 '믿음'이라 이름붙이려 한다.

나는 감히 관념속에 이상으로 자리잡은 그것을 실재(實在)화시키는 유일한 덕목이 '믿음'이라 말하려 한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라.  - 히브리서 11장 1-2절


믿음은 결과에 방점을 찍고 과정을 견인하는 힘이다.

'원하는 나'라는 명쾌한 씨를 나의 관념에 심었다면 그것이 실재화된다는 것을 '사실'로써 믿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치고 올라오는 의심의 싹을 잘라내는 용맹한 정신과

수시로 나를 시험하는 내 지력의 한계에서 날 다시 일으켜세울 유일한 수단은

'원하는 내가 된다'는 믿음이다.


전쟁터에 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들 : "아버지, 이번에도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아버지 : "아들아, 나는 이기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겼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간다."


'지금의 나'를 '원하는 나'로 데려가는 길엔 셀 수 없는 수많은 필요들이 있다.

열정, 의지, 전략, 계획, 목표, 도전, 용기, 인내, 극복, 자신감, 절제, 소통, 지식, 운, 관점, 안목, 직관, 통찰, 훈련, 조절, 제어, 통제.

나아가 개인적, 사회적, 환경적 요소까지.

'원하는 나'가 되기까지는 까다롭고 섬세하게 조율되어져야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이 요소 하나하나를 갖춰가기에는 나에게 하락된 시간과 허덕이는 정신이 너무 부족하고 미약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견인하는 동력체가 있다.

'믿음'이다.

원한다면 먼저 믿어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 '올더스헉슬리'의 주장대로

이 제한되고 속박된 세상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계획되지 않은 시간에 내가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 이그니티우스 로욜라는 만일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25분정도 기도하고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고행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이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성한 무관심' 을 달성하는 것 말이다.

크게 성공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실패한다 해도 역시 좋은 일일 수 있는데,
그것이 시간에 속박된 제한된 마음에게 지금 여기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정한 믿음은 신성한 무관심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과 믿는 것, 즉, 소망과 믿음은 완벽히 다르다.

소망은 현실화되지 않았음을 전제하는 데 반해

믿음은 현실화되었다는 실재를 전제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망하지만

단 하나도 제대로 믿는 것이 없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만

그것이 이뤄질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으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무언가를 소망한다면 단 하나라도 제대로 믿어야만 한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에 이 주장이 뒷받침될 수 있겠다.

비가 오지 않아 온 마을 사람들이 랍비를 찾았다.
'제발 비가 오게 해주세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랍비는 '비가 오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했지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비가 오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토록 비가 간절하다는 그들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무의식에 자리하기에 나의 관심과는 무관하다.

반면, 소망은 의식에 자리하니 늘 관심을 두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바라는 소망'에는 '이뤄지지 않을지도'가 숨어 있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바라는' 의식을 행해야 한다.


실재적이고 구체화된, '현실에서 증명된'것으로서

내 안에 존재하는 믿음은

실재화된 미래가 시간을 초월하여 현실로 이동한 것이기에

나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관념속에 심겨진 씨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


"비가 오게 해주세요"는 의식한 상태의 바람이며

"비가 올 것이기에 우산을 가져왔습니다."는

현재 시점에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미래(비가 내린다)에 대한 믿음에 의식화된 행동(우산을 가져온다)이 수반된 것이다.


한마디로,

소망은 의식적, 능동적, 비실재적이지만

믿음은 무의식적, 수동적, 실재적인 범주다.


임신을 하기까지 우리는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소망한다. 하지만 착상이 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내 안에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임신을 하면 아이가 나오고 나는 이 아이의 부모이고 이 아이는 나의 자식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의식의 힘없이도 믿게 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

나는 여자(또는 남자)이고 나는 00살이며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의식없이 실재화된 믿음으로 내 속에 존재한다.


이렇게 거창한 의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믿음'에 대한 성경의 정의를 되짚어 본다면 그 깊은 의미가 새겨질 것이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라.'


무의식안에서 순수한 상태로 자연에 의지한 채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

그것이 믿음이다.


내 관념속에 '원하는 나'에 대한 실상을

우리는 의식하지 않을 때, 아니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식조차 없을 때

비로소 믿는다고 할 수 있다.


믿음 전체다.

'원하는 나'에 대한 믿음의 강도는 나의 심장의 요동과 두뇌의 자유로움과 다리의 역동에 기생하는 수많은 덕목들을 주체불가로 흔들어댄다.

내 안에 내재한 부동의 믿음은

굳이 열정을 끄집어내려, 의지를 강하게 하려, 도전을 위해 두려움과 싸우려 하지 않아도

열정과 의지로 도전하고 있는 나를 만나게 하고

될까말까로 망설이며 조바심에 걱정하며 계획을 수정하느라 정신의 혼란을 겪어나가지 않아도

시간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내게 결과로서 보상한다.

포기 앞에서 뒤돌아갈까 주저할 필요도 없다. 

이미 결정된 바를 지나가는 길이니 포기는 이 길에서 마주칠 리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믿음'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다.

비로소 '지금의 나'는 '원하는 나'가 이끄는 힘에 의존하여 수동적으로 복종했음을 알게 된다.


'원하는 나'가 된다고 믿기에

집중하는 그것에서 멀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멀어질 수 없었기에 수없는 반복의 힘이 나의 기능을 탁월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탁월한 수준까지 올라갔으니 그 때부터의 반복은 잉여로서 존재하게 되고

잉여의 힘은 내 삶의 곳곳으로 전파되어 전체를 위해 요소요소를 찾아 그 어떤 것도 헛되이 쓰이지 않 '삶'이라는 통일성을 위해 연결된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는 경이로움이 내 삶에 불쑥 찾아온다.


이렇게 하나에 집중하는 반복의 힘은 믿음에서 온다.

반복을 견뎌내는 인내도,

인내를 유지하는 끈기도,

끈기를 더 높은 차원의 지력으로 승화시키는 초월도,

초월을 기회와 만나게 하는 행운도

모두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집중이 아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노력이나 열정이 아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람이나 의지가 아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실재화된 믿음. 항상 그것이 먼저여야 한다.


믿음이란 주관적인 의지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내게 부여하며

나 스스로 기만했던 나의 지력의 한계를 다른 차원으로 견인한다.

믿음이란 것이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부터 믿어야 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의 신념,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바람, 나의 상대, 나의 관계.

나의 그 무엇인들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매순간 선택으로 이뤄지는 이 삶의 길에서 나를 못믿으면 발아하지 않는 씨앗의 잔재들로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질 것인데 그 진통을 어찌 겪어낼 것인가?


우리 모두는 우주의 소행성이다.

그래서 나를 믿는다는 것은 우주를 믿는 것과 같아야만 한다.

우주는 제 아무리 바다가 요동치고 바람이 거세고 전쟁으로 모두가 죽어나가고 전염병으로 온 세상숨통이 막히더라도

내가 아무리 고열에 시달리고 억울하고 비통하고 굴욕을 당해도

냉정하게 이 모두를 놔둔 채 자기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갈길을 간다.

갈 길을 가는 그 역할만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곁을 주지 않고 틈도 보이지 않으며 알아서 파괴하고 알아서 정리하며 스스로 운동하며 운용한다.


나도 그래야 한다.

우주가 나에게 세상의 조화를 위해 내어준 자리를 지켜낼 것이라는 커다란 우주적 믿음에 따라

나의 신념이, 그 신념에 따른 나의 역할이, 그 역할에 따른 나의 하루가 묵묵히 이어져야 한다.


묵묵한 하루들이 축적되고 압축되면

'원하는 나'로 가는 그 길목 어딘가에서

로욜라 수도사처럼 '25분정도 기도하고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힘이 내게 생길 것이다.

파올로코엘뇨의 글처럼 '안다고 착각하는 얄팍한 지식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예기치 못한 성공'과 마주할 것이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 p.s. : 본 내용에 대한 추가이해가 필요한 독자는 사뮤엘스튜어트의 '자조론' 의 자조(自助),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과 에머슨이 '수상록'에 거론한 자리(自利)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 발췌도서 : 파올로코엘뇨 '아크라문서' / 올더스헉슬리 '영원의 철학' / 데이빗소로우 '월든' / 성아우구스티노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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