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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6. 2022

'이성의 절름발이'가 되면 안되지 않을까?

생각과 이성에 대한 소고

매일 새벽독서를 철저하게 지키는 내가 요즘들어 책을 읽다 말고 나를 덮친 생각때문에 한참을 멍하게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한문장한문장이 내 세포속으로 녹아들어 시간 속에서 나를 거쳐간 경험과 연결되고 그 정체가 자꾸만 내 앞에 거울을 들이밀기 때문이겠지.

생각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는 순간

나는 나를 혼내버린다.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

생각에 빠진 나에게 굳이 혼쭐을 내는 이유는 내가 아닌 녀석에게 침범당했기 때문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현듯, 느닷없이, 나와 무관하게 나를 정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신놓고, 넋을 잃고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어떤 주체가 '나도 모르게' 나를 내 정신에서 분리시켜 자기가 원하는 곳에 나를 버려둔다.

의식하지 못한 채 내 정신을 찾아보니 온통 과거의 기억속을 헤집고 있다.

생각이 많을수록 걱정도, 불안도, 고민도 커지고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지경에 이르는 이유도 이렇게 생각이 나를 데려다 놓는 곳은 거의 과거와 부정이라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떠한 현상과 마주칠 때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은 정확한 사실(fact)과는 거리가 먼데도 말이다. 

지나간 과거의 그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기억은 항상 부정확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몇이 모여도 그들의 말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과연 우리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은 과거와 지금이라는 유한한 시간 속을 유영하면서 들러붙은(또는 갖다붙인) 다양한 요소들과 결합한 채 나의 내면에 질서화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은 나의 '감정의 강도'에 의해 우선순위가 매겨진 채 줄맞춤되어 있는 것이다. 


잠깐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한가지 묻고 싶어졌다.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이 질문에 당신은 스스로가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당신이 경험해 본(직접 먹어봤든, TV에서 봤든, 친구에게 들었든) 그것을 먹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가장' 자신의 오감을 자극한 그 메뉴겠지. 

'어디 가고 싶어?', '어떤 사람이 좋아?', '뭘 하고 싶어?'와 같은 흔한 질문들을 다시 던져보겠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당신은 과거의 기억속에서 자신의 오감을 가장 자극시켰던(맛으로든 누구랑 함께여서든 어떻든 오감자극)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기억은 이렇게 감정에 의해 순서화된 것으로서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이번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조금 더 깊이 내면으로 시선을 이동시켜야 하는 질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과거 기억속에 '언제 내가 가장 행복했지?'라고 스스로를 과거로 옮겨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그 순간을 떠올릴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도 역시나 여기저기서 듣고 읽고 만났던 부러웠던 또는 닮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다. 


나의 지난 수십년의 시간들을 모두 담아두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로 인해 남아있는 몇컷의 기억들 가운데 질문에 간택된 대답은 당시 나라는 사람의 오감에 가장 강한 자극을 남긴 몇 장면이다.


결국,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부정확하며 과거지향적인, 편집된 사실의 총체다.


기억의 속성이 이러니 내 생각이 기억에 근원한다면 

나의 생각 역시 과거에 부정적인, 감정적인, 그리고 사실과 착각의 혼합으로 이뤄진다고 정리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정신과 분리되어 날 데려다놓은 그 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이성에 대한 작은 탐구의 의미

인간이 동물하고 비교되는 기본속성은 '이성적'이라는 것인데 

생각의 속성을 들여다보니 '나는 이성적인가?'라는 질문에 약간 망설여지기도 한다. 

'이성'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성적'이라고 말하려니 뭔가 좀 꺼림직하다. 


'이성'이라는 방대한 담론에 대해 수천년전 철학자들부터 현대의 뇌과학자들까지 그 본질을 파고파고 또 파보지만 나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이유는 인간을 동물과 구분되어지는 경계로서 '이성이라는 정체'를 경계안에 담긴 주요 대상(인간)이 어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의 커다란 원 안에 두 개의 구분된 원이 있다고 치면, 전체 큰 원의 시각에서 보지 않는 한 경계의 양쪽을 대표하는 개체의 시선으로는 다른 개체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행성'이 '우주'를 파악하겠다고 덤비는 격이다.

더 큰 시야만이 시야안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주체자만이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지 개념화할 자격이 있다.


그렇다고 이성이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거나 이성에 대한 탐구를 무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성이란 방대한 담론을 논함에 있어 정확도나 완벽성을 바라거나 자만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나를 '이성적 동물'이라는 틀에 가두고 

'이성'을 탐하는 것에서 자족하려 한다.


A를 정의한다고 하자.
정의내리는 행위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해내는 작업이다.
A가 B나 C가 아니라 바로 A인 이유, 즉 A의 본질을 드러내어 그 본질 속에 A를 가두는 작업이다.
본질을 드러내어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언어행위, 그것이 바로 정의(definition)내리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는 정의는 인간을 '이성'이라는 본질 안에 가둔다.
인간은 이성이라는 본질을 토대로 인간 아닌 다른 것들과 구분된다.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이성(理性)은 다스릴 리 / 본바탕 성. 즉,  '본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글자대로라면 철저히 본능에 의존해 사는 동물이 더 이성적이라고 해도 이견이 없을 법한데

굳이 '이성'을 인간쪽의 능력으로 배치시켰다면 

우리 인간은 본능 외에 분명 숨어있는 또 다른 방향으로의 본능이 자극되며 진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로 훈련되고 그 반복으로 각인되고 그것이 재구조화되고 새로운 형질로 재탄생되며 

거기서부터 또 다시 훈련, 반복, 각인, 재구조화되는 회귀를 통해 진화를 이끄는 무언가가 

굳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기초경계가 되었을 것이고 

이것을 '이성'이라 이름붙인다면, 

조금은 엉뚱하고 무지하고 단순하지만 이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이 가늠은 아주 얇은 거미줄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태풍에도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내구성으로 사고의 맥이 되어줄 것이다. 이 가는 줄 하나가 사방으로 더 넓게 더 촘촘하게 그리고 심지어 입체적으로 줄을 뻗쳐 스스로 달려드는 나방들을 면적으로, 접착력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이성에 대한 작은 탐구의 시작은 나의 사고체계에 외부로부터 투입 내지 흡수되는 진보적 지식들을 기존의 보수적 질서로 짜여진 거미줄에 착착 달라붙게 하고 나름의 촘촘하고 세밀한 신질서로 다시 배열시키는 확장가능한 강한 궤를 만들어줄 중심맥이 될 것이다.


앞서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니 심지어 할 필요도 없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의식'해야 한다. 

이 '의식한다'는 부분에서 '이성'은 작동되어야 한다.

이 작동은 의식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의식의 힘으로 움직이며 

의식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야 '이성'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자격이 주어진다.


'이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식'의 영역 안에서 

보다 삶에 밀착된 개인으로 살게끔 활용되어질 때 비로소 가치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을 '지성'이나 '인식'과 구분지을 필요가 있겠다.

지성은 지적인 면에서, 인식은 지성이 내 사고에 질서화된 것으로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려 하는데 지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기계에 서서히 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이미 지금 우리는 그 전모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대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 속의 작은 칩이 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알고리즘이 나의 뇌를 늘 주시하며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제의 나를 호출해 노트북을 켜자마자 어제 했던 클릭을 오늘 또 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식된다면 나의 의식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지한 것이 인식되는 것은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은 지성과는 다른 또는, 더 큰 차원인 것으로서 

단순히 수치화된, 또는 실험이나 데이터로 검증된 나름 '과학'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보려 하는데 '당신은 어떤 심오한 결정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대부분 성공자들은 자신의 계획이나 지식이 아무리 자신을 설득하더라도 

직관이 이끄는 방향을 따른다고 한다. 


이성의 절름발이가 되지 않으려면

직관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구체화, 정량화, 선형화될 수 없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되는 섬광과도 같은 직관. 

계량화되지 않기에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 직관을 무시한다면 몽테뉴의 말처럼 '이성의 절름발이'요, 니콜라스나심탈레브의 말처럼 '바보지식인'을 스스로 자처하는 꼴이다. 


지식은 변한다. 따라서 인식도 늘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한다.

인간은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기에 매일 새로운 선택을 하며 선택은 판단을 유도하고 기존의 판단은 새로운 판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늘 새롭게 판단해야 하는데 기존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은 오류속에서 헤매겠다는 어리석은 각오를 다지는 격이다. 


그런데, 어제를 산 결과로 오늘 새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면 분명 무언가가 보태지지 않는 한 어제와 같은 판단, 같은 오늘을 살아갈 게 뻔한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늘 낯설고 불안한 판단 앞에 우리는 현명할 수 있을까? 분명히 새로운 판단에 유리한 무언가가 보태졌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을 산 경험이다.

산다는 것은 겪었다는 것이며 겪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체화됐다는 것이며 체화는 온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나의 지식을 너머 오감을 너머 육감이라 불리는 직관에까지 오늘 나의 경험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낯선 새로운 판단을 하면서도 지혜로워질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으며 

그렇기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판단이라는 단어에 국한해서 이성은 '논리'로 작동하기에 우리는 동물과 구분되는 '이성적'이라는 단어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 

경험이 직관으로 연결된 뒤에 이뤄지는 판단은 분명 '의견'이 아닌, '이성의 형식'에 의한 결과를 이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란 지식의 양을 쌓거나 쌓아진 지식을 다듬어 인식을 구조화시키는 작업에 직관이라는 섬광의 옷을 입힌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성은 지식과 경험과 직관의 총체라고 풀이해도 무방할 것이며

이런 이유로, 이성은 지성이나 인식보다 더 광범위한 범주이고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성찬인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우창교수는 '이성은 단순한 방법의 수련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길러진다'고 참으로 명쾌하게 언급했다.

우리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참된 지침을 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섬광처럼 찾아오는 그 직관을 미처 주목해 보지도 않고 습관처럼 지워 버렸던가?
(중략) 이 가르침을 들어라!
"반대편에서 어떤 시끄러운 외침이  들리더라도 따사롭고도 과감하게 자신의 자발적인 신념과 직관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어떤 낯선 이가 다가와 따져 물을 것이다. 그대는 늘 무엇을 생각해 왔고, 무엇을 느껴 왔는가?" 
나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지 않은 이유때문에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는가?"                             
                                                                                                    - 에머슨 자기신뢰철학

생각을 버리는 수고대신 이성을 훈련시키는 수고가 더 낫지 않을까?

인간은 생각하지 말고 의식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신이 내린 '이성'이라는 선물을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은 인간만의 권리다.

그래서 생각을 버리는 수고 대신 이성을 훈련시키는 수고가 더 낫지 않을까?


이 수고로움은 이성이 스스로 이성을 키우는 작업을 돕는다.

이 과정은 지극히 단순하다.


우리는 매일 하루를 산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현상을 겪는다는 것. 

이 현상에 직면할 때 이성을 능동적으로 출동시키면 된다. 

현상에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태도 말고 현상에 능동적으로 내 시선을 머물게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데카라트가 알려준대로 나를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여기서 수많은 질문이 나를 강타하더라도 천천히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그것들과 

나에게 파편으로 떠도는 지식과 경험을 연결시킨다.

즉, 감각과 인식을 연결시킨다는 의미다.

어떻게 연결되든 상관없다. 다시 논리를 만들면 되니까. 


인간은 누구나 감각으로 현상을 느끼기에 

이성도 감각의 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성은 현상과 감각을 통해 나에게 형성되는 나름의 절차를 갖는다.


감각으로 전해진 현상에 대해 감각적 판단이 아닌, 

현상의 이면을 보는 지력으로부터 도출되어 기존의 인식에 새로운 옷을 입힌 논리가 내 사고에 자리하게 되면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 다른 시선, 더 큰 시야를 갖게 된다. 

이로써 나의 지력은 더 강한 힘을 갖추게 되고

이 과정이 이성이 새로운 이성으로 스스로를 키워낸 것이다.


이 회귀와 순환운동이

더 큰 나로, 더 나은 하루로, 더 넓은 의식의 세계로 나를 진입시키는 이성의 역할이다. 


이 역할을 다 하려면 앞서 말했듯이 

내 눈은 보이지 않는 이면을 향해서 날카로워야 할 것이며

날카로움에 아프더라도 굳어진 지성의 파괴를 허락해야 한다.

파괴된 지성은 물러나거나 새로운 지성과 재결합해

다시 과감한 질서의 건설로 내 사고체계를 형성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성이 작동해야, 

이성이 내 삶을 운용해야, 

이성이 나의 감정을 이겨내야

나는 비로소 동물과 구분되는 '이성적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발췌도서]

- 유발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에머슨 자기신뢰철학

-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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