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 대한 소고
'오늘은 이상(理想)을 주제로 써야지.'라고 결정한 순간부터
나는 계속 떨고 있다.
심장도, 눈빛도, 입술도, 손끝도
계속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목이 이 신호들을 묵직한 덩어리로 뭉쳐 다른 감각을 자극시키니
제일 애살맞은 코끝은 그 감각의 바통을 이어받아 있는 힘껏 얼굴근육을 쥐어짠다.
이내 얼굴에 뚫겨있는 구멍들로 액체가 자신을 드러내며
잠시동안 요란했던 세포들의 릴레이를 마치라고
열오른 내 볼을 쓰다듬는다.
이 릴레이를 환희라 부르련다.
벅차다.
나의 이상,
나의 가치,
나의 꿈,
나의 사명,
나의 길....
이 단어를 입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 왜 나는 떨릴까?
머리로만 알뿐
아직 꿈도 사명도 이상도
현실의 내겐 머나먼 동화속이야기인데
왜 이들은
내게 등장할 때마다 나를 뭉클하게 하는걸까?
마치 빌헬름이 '천상의 끈이 나의 모든 감각을 동여매고 홱 잡아당긴',
그 느낌처럼 나의 모든 감각을 동여매어 버린다.
신들까지도 고통없는 순정한 지복(至福)의 상태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인간이 되어 즐기려 들법한 그 순간들! (중략)
환희의 술잔으로 인한 그 도취경!
우리의 감각을 천상적인 끈으로 친친 동여맨 다음 홱 잡아당겨
이 세상의 모든 규제의 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 도취경을
마치 회상 속에서 다시 살려낼 수 있기나 한 것처럼!
- 괴테,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 단어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진정 내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들이 숨어 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
그 길의 끝에서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줄 '미래의 나'
가는 걸음걸음 박수치며 내 손을 잡아줄 '희망'까지.
이상은, 꿈은,
벅찬 희망이 있는 나의 길이다.
나름의 썰을 풀어내기 전에 이상과 혼용되는 단어들 - 사명, 신념, 가치, 목적, 욕구, 목표 - 을
제 각각이 가진 기초적 의미만이라도 구분하는 절차가 필요해 보인다.
아래 나열된 나름의 분류를 통해 이 지면에서는 이상, 즉 꿈에 대해서만 썰을 풀어보는 게 좋겠다.
이상(꿈)은 궁극(窮極, 더할나위없이 간절함 끝에 얻어낸)에 자리할 미래의 상(想)이다.
사명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다른 관점에선 내가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실체로 구현해내야 할 숙제다. 이 숙제가 형상화된 것이 이상이다.
가치는 이러한 상(想)에 부여한, 또는 부여된 무형의 값이며
신념은 이상에 이르고자 하는 각오와 같은 생각(념,念)이다.
욕구(간절함, 추구)는 이를 원하는, 이루고자 하는, 갖고 싶은 내적 감정이며
목적은 사명으로 주어진 이상을 향해 가야할 방향이고
목표는 목적의 길에 단계적으로 구분된 고지(高地)이자 표지(標識)다.
* 조금 더 첨언하자면
목표를 위해 더 구체적으로 구분지어 놓은 표식(表式)이 계획이며
계획을 실천하고자 시간순으로 나열한 것이 스케쥴이며
스케쥴 가운데 매일 반복하는 것이 루틴이다.
언급했다시피 '이상(理想)'은 마지막에 그려져 있는 상(想)이다.
즉, '나의 이상'은 '나의 지각가능 범주의 가장 끝에 서 있는 나'다.
'지금의 나'를 부풀릴 수 있을만큼 부풀려 만든, '최상의 나'다.
키워낼 수 있는 만큼 키워낸 '최고의 키'이며
뺄거 빼고 보탤 거 보태어 최상으로 빚어놓은, 감히 '우러러보이는 나'다.
이상.. 없는데?
괜찮다. 없으니 만드는거다.
이상.. 너무 욕심아닌가?
그리 생각해도 괜찮다.
이상은 태어나면서부터 어차피 내면에 담겨있는 것이다.
남의 것이 아닌 내 내면에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이 욕심이라면
내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사탕을 사먹는 것도 욕심인 것인가?
이상..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는데?
지금부터 하면 된다.
이상.. 살기도 바쁜데 그런 생각까지?
몸이 바빠 정신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바쁘단 말인가?
이상.. 그런 거 배운 적 없는데?
그러니 내가 먼저 꿈꾸고 내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알려주면 안될까?
꿈꾸는 것도 지식이니까.
꿈꾸는 것도 모방에서 시작되니까.
'이상'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정도 질문과 답으로 그 타당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
그렇다면, 이상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상상부터 해야 한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원하고 상상해야 하며
탐험가가 되려면 탐험하는 그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속에 그려야 한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가 백설공주옷을 입고 마치 공주처럼 행동하고 말하듯
목에 보자기 두르고 '나는 수퍼맨이다!' 하듯이 말이다.
감히 넘지 못하는 그 너머까지 바라보며 '바라는 나'가 바로 '나의 이상'이다.
'분석자나 고고학자보다는 백치, 인디언, 어린아이, 교육받지 못한 농가의 소년이
한층 자연을 독해할 수 있는 광명에 가까이 서 있다'는 에머슨의 말처럼
덧입혀진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상상하고
이상으로 구현해내야 한다.
내가 굳이 나의 한계를 정하고 그 속에서 꿈의 크기를 축소시킬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게 나의 상상을 허락받을 정도로 나약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나의 상상에게 굳이 비정하고 냉정할 필요까지 있을까?
큰 꿈은 깨져도 그 조각이 크다.
누구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어떤 자격도, 한계도 필요없다.
상상은 그런 것이다.
이상을 품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충족되도록 도와준다.
- 제임스앨런, 위대한 생각의 힘
세상은 내가 배팅하는 것을 언제든 허락한다.
'내 꿈의 크기가 이렇게 크니 나에게 배팅하시오!' 라며 세상에 나를 드러내보는 것이다.
미리 문제부터 생각하지 않는 용기와
미리 욕먹을 생각하지 않는 오만과
미리 안될거라 생각하지 않는 뻔뻔함이
내 상상속 세계로 침입하게 하면 안된다.
협상도 타협도 안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는 이상을 품는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목표의 단계에서 필요한 진리지 목표의 상위차원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그 용기와 오만과 뻔뻔함과 덥석 손잡고 크게 꿈꿔야 한다.
가장 큰 나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것과의 타협도 설득도 용납도 허용해선 안된다.
이상을 품는 것에는 유동적일 필요도 없다.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 선택과 판단으로 이뤄진다.
무엇을 위한 선택이고 어디를 향한 판단인가?
매순간 이뤄지는 선택과 판단이 하루를 위한 것인가? 인생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내려진다면
내가 이상을 가져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주요한 완성'이 있다
데카라트는 이렇게 의지와 판단에 관하여 또 그것의 지적 작업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완성인 이상에 연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지적 능력에 국한한 이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적성찰의 필요는 인간의 모든 능력과 업적에 관한 것이다.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의지가 판단을 담보하고
판단이 의지를 다시 견인하고
의지와 판단이 서로 손을 맞잡고 운용되는 과정으로
지적 한계를 넘어서면
더 확장된 나의 지적환경이 기존과 새로움의 결합으로
또 다른 성찰을 도모하고
나의 이상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고
'인간의 가장 위대한 완성'이라고 불리는,
세상이 내게 부여한 그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통쾌하다. 이 연결고리.
명쾌하다. 이 매커니즘.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만든 나의 이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상은 너무나 지금의 나와 거리가 먼데
감히 '상상속의 내'가 된다고?
가슴은 떨리지만 현실은 너무나 초라한데?
배우는 대본을 바꾸지 못한다.
엄격한 감독과 작가일수록
배우는 그 감정까지 고스란히 자기 안에서 끌어내어
자신을 비우고
자신과 자신이 표현해야 할 그 인물을 혼연일체시켜야 한다.
내 인생의 무대에서 주연배우는 나다.
나는 내 인생에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뿐.
그 어떤 것도 바꿔서는 안된다.
그럼 누가 제작을 했고 누가 감독을 했으며 누가 시나리오를 썼나?
나의 확장된 의식이 나의 상상을 통해 잠재된 미래를 써내려간 결과로 탄생한 것이
나의 이상이기에
시나리오는 내가 쓴 것이다.
이제 시나리오를 제작자에게 의뢰하고 투자받고 감독을 선정해야 한다.
감히 말하건데
내가 의뢰한 제작자는 '미래의 나'이며
투자자는 나 이외의 세상 모든 것이며
감독은 나를 태어나게 한 주체자다(종교로서, 영성으로서, 그 외 무엇으로든 나를 태어나게 한 그).
별은 우리를 침실로 유인하고, 밤은 커튼을 끌어닫고, 해는 그것을 열어젖힌다.
음악과 빛은 우리의 머리를 시중들고
만물은
그것이 내려와 존재할 때엔 우리의 육체에 다정하고
올라가 원인이 될 때엔 우리의 마음엔 다정하다.
사람은 많은 하인의 시중을 받으면서 이 많은 시중을 못 느낀다.
사람이 병들어 창백하고 야위어 터벅터벅 걸어갈 때엔 어느 길이나 그를 도와준다.
아 위대한 사랑이여
사람은 한 세계이고
또한
자기를 섬기는 또 한 세계를 갖고 있다.
- 조지허버트의 시, 에머슨수상록에서 발췌
한마디로,
나는 나를 세상에 있게 한 그의 명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투자받아
내가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나의 연출력을 가미하여
나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해내는 배우다.
고로,
나는 없던 인물을 창조해내는 창조자가 된다.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 투자한다는데
못해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상(理想)은 이치(理)에 맞는 상상(想)이니까.
원하면 얻을 것이고 갈망하면 이룰 것이다.
저속하기 짝이 없는 욕망이 충분한 보답을 받고
순결한 열망이 하릴없이 시드는 일이 있겠는가?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상황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 제임스앨런, 위대한 생각의 힘
중요한 것은
이상이 상상만으로 존재하면 그 가치는 허상(虛像)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내내 품지 않은 시간들보다 분명 더 진하게 삶을 살아내도록
이상은 나를 이끌고 돕겠지만
이상이 허상이나 망상과 다른 탁월한 차이는
이상 스스로가 현실로 구현되기 위해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고
먼저 앞서 걸어주려고 미리 준비태세를 갖추고선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상의 현실화, 즉, 꿈을 이루기 위해 2가지의 관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인지하고 인식한 것을 우선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매 순간 내리는 판단은 항상
'오류'와 '현명'이라는 이란성쌍둥이를 잉태한 채 순차적으로 하나씩 세상에 탄생시킨다.
나라는 사람이
의지는 강한데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능력은 출중한데 의지가 약한 것은 아닌지,
능력과 의지는 충분한데 이를 이끌고 갈 자세가 엉망인 것은 아닌지,
이 재단(裁斷)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판단은 오류를 출산할 것이고
이 재단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판단은 현명한 결과를 출산할 것이다.
잉태되어 있기에 무엇이든 무조건 출산한다.
이러한 분명한 이유때문에 아주 많이 냉정하더라도 자신 앞에 거울을 갖다대고 자신의 현실과 직면해야 한다.
판단은 분명 현실의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제대로 재단한 자에게만
크든 작든 현명한 결과를 보상으로 탄생시킨다.
이상을 현실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나폴레온힐이 위대한 연설처럼 '느낌으로 사냥개를 고를 수는 없지 않을까?'
둘째, 공명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공명(共鳴)은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먼저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는데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미립자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 것들끼리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렇게 세상은 자기들끼리의 신호체계로 서로 소통하며 변화하고 진화한다.
에너지는 진공상태를 결코 허용하지 않기에 현실과 이상사이를 분명 무언가로 메꾸려 할 것이며
무엇으로든 메꾸라며 지속적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누구나 생각하던 그 사람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고
'나도 그렇게 하려 했는데' 라며 소름끼치는 일치에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내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항상 응답한다.
이 말을 믿지 않으려는 수고는 하지 않길 바란다.
혹여 이 말을 거부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운’이나 ‘기적’을 결코 바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직관이나 통찰, 창의와 같은 추상적인 능력을 배제한 채
자신의 지식만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자기 오만에 빠진 것이며
자연이 주는 신비한 힘을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없는 각오를 다지는 격이다.
스캇펙 박사의 말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아주 똑같거나 혹은 비슷한 꿈을 꾸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학적으로 볼 때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벌은 무엇인가.
그들이 현재 처한 처지가 바로 그들에 대한 벌이다. (중략)
어떤 사람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에게는 바로 그 곳이 감옥이다.
-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이상과 현실,
즉,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실과 추상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이상.
세상은 항상 이 양극의 공백을 메꾸려 지속적으로 내게 신호를 보낸다.
이상이 현실화되는 것이 가능하기에 세상은 자신의 운용시스템으로
항상 나를 주시하며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현실에서의 나와 세상이 투자하는 모든 자원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 이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양극을 전체로 인식할 수 있는 나의 의식의 폭과 깊이에 대한 정신적인 성장과 함께 힘차게 땅을 밟고 걷는 자들만이 알아챌 수 있다.
꽃길만 걷겠다는 허상이 아니라
꽃길을 걸으려면 내 발은 흙을 밟고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진리를 아는 자에게 세상은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 키케로는 우리에게 포도나무가 되라고 명확하게 알려준다.
인간이란 잠시만 짬이 나도 축축 늘어지고 뚝뚝 끊어지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기에
무엇이든 잡고 어디에든 매달리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가라고 한다.
무화과의 그토록 작은 씨앗에서, 또는 포도씨에서, 또 그 밖의 온갖 과일과 식물의 작디작은 좁쌀 같은 씨앗에서 그토록 큰 줄기와 가지를 자라게 하는 그 힘에 대해서는 더 말해 뭐하겠는가?(중략)
포도나무는 원래 가지가 늘어지는 성질이 있어서 받쳐주지 않으면 땅에 닿게 되는데,
그래도 똑바로 서 있으려고 덩굴손으로 뭐든지 닿기만 하면 껴안고 올라간다네.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기어 올라가는..
- 키케로 인생론
우리는 포도나무여야 한다.
아니, 포도나무보다 못한 내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연은 분명 그 자체의 힘으로 내게 심어준 씨앗의 열매를 탄생시킨다.
나의 이상이 바로 그 열매다.
이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나는 포도나무와 같아야 한다.
우리의 이상은,
우리의 꿈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네가 뭔데 그런 꿈을 꿔?"
"그게 아무나 하는 건줄 알아?"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이런 말들이 내 귀에 들린다면 그것은 무조건 자신 탓이다.
꿈이 없는, 아니면 꿈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나의 소중한 꿈을 의논한 자신의 탓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노력과 성숙이 긍정적 공명을 만든다.
한 사람이 꿈꾸면 그것이 꿈으로 남지만
여러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유명한 격언과 같이
공동의 진동을 통해 장이 형성되고 진동하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장이 강화된다.
또한 장에 존재하는 의식의 에너지에 의해서도 장이 강화된다.
- 뤼디거달케, 운명의 법칙
꿈이 있는, 또는 꿈을 꾸는 사람은 결코 이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
"송충이가 다른 것을 먹으려면 솔잎부터 뱉어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가랑이부터 찢어야지!"
"간절히 쳐다보기라도 해야 떨어지는 감을 잡지!"
라고 한다.
꿈이 작든 크든 꿈을 꾸거나 꿈을 이룬 자는 누군가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에 무조건 꿈을 응원한다.
절대로 지지 말라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밥을 사주면서까지 도와주려 할 것이다.
언제든 찾아오라고 할 것이며 뭐든 다 내줄 태세로 나를 대할 것이다.
꿈이 간절한 자는
이상이 분명한 사람은
자연의 이치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에 나를 맡긴 사람은
자신이 꿈을 이룬다는 것이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이 자신을 넘어서 더 큰 꿈을 꾸는 자에 의해 세상이 재창조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꿈을 이룬 사람이 더 많아지도록 꿈을 가진 자를 돕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자 옆에는 항상 꿈을 꾸는 사람이 탄생한다.
꿈은 모방되고 꿈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절대로 나의 이상, 꿈이라고 불리는 이 단어는 소멸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소멸되지 않는 것을
나의 내면에서 없애버리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이치를 굳이 거스르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결코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으며
자연이 허락한 세상에서
세상이 내게 투자하기로 한 모든 것으로
나의 이상, 나의 꿈을 실현시켜내는 것은
엄연히 내가 누려야 할 권리이다.
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 지금 현실의 나는 포도나무여야 한다.
우리가 이상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살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이상을 품고 그것이 현실로 이뤄지는 과정은 자연이 알아서 할 자연의 몫이며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믿고
내 안의 꿈을 찾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포도나무로서의 역할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한 유명한 세계적 부호가 던진 한마디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Find your dream, Focus your dream!'
p.s. : 지담의 글 '원하는 나에게 복종할 것' 가운데 '관념의 형상화'를 함께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45)
[발췌도서]
에머슨, 수상록, 1984, 서문문고
괴테,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999, 민음사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2014, 김영사
제임스앨런, 위대한 생각의 힘, 2013, 문예출판사
스캇펙, 아직도 가야할 길, 2004, 열음사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철학, 2004, 세종
뤼디거달케, 운명의 법칙, 2012, 블루엘리펀트
키케로, 인생론, 2009, 동서문화사
나폴레온힐, 위대한 연설, 2017, 포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