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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2. 2022

'의견'을 조심하라

 의견은 무형의 나

대화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장(場)이다.

'의견'은 단순한 생각일 뿐이라 치부하는 것에조차도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

삶이란 사고와 행동방식의 결합이기에 

의견은 자신의 사고에 자리한 무형의 것을 혀와 언어의 조합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제 아무리 '아무 생각없이 뱉은' 의견일지라도 모두가 내 사고체계 어딘가에 자리했던 것이기에 

의견이란 나를 대변하는 언어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가장 자연에 가까울 때, 그 신비에 복종할 때 가장 인간답기에 

자신이 부여받은 '세상의 쓰임'이 있는 자리에 나를 잘 배치시킬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의견은, 

어쩌면 이러한 복종에서, 순종에서, 순리에서, 순진함에서 나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빙빙 돌면서 멀어지기에
매는 주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모든 것 뿔뿔이 흩어지고,
중심은 지탱못하고,
단지 무질서만이 세상에 퍼져,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진의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이 가득하다

- W.B.예이츠 <제 2의 강림> 제 1연,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발췌


신념이란 의견의 의복

의견이 조합되고 굳어지면 나의 신념이 된다.

신념은 내 사고안에 경험의 옷을 입히고 또 입히면서 그 모양새를 갖춰나간 

무형의 입체적 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념은 사소한 '의견'이라고 쉽게 치부한 것들이 축적되어 굳어진 덩어리로

이 신념의 하복(下服)들, 예를 들면 맹세라든가 관점이라든가 지향이라든가의 방향을 이끈다.

그래서 의견은 

때론, 내 안에 미리 자리하고 있던 아름다운 삶의 보물들을 외면하게 만들면서 나의 순진함을 배척해고야 만다.


그래서 예이츠는 '인생의 지혜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의 하나는 의견을 조심하라'는 말로 

의견의 위험성을 일축했나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릇된 신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면

결국, 내가 사소하다고 치부하고 있는 소소한 의견들부터 검열해나가는 장치가 필요하다.

나의 두뇌와 심상을 보호해줄 그러한 장치로 무엇을 비치할 것인가?


나의 경우엔 '책'이다. 

물론, 책 역시 저자들의 의견이겠지만 

나보다 더 긴 세월을 깊은 사고의 거름망을 통해 걸러진 신념들을 만나게 해주는 책은 

나의 '그릇됨'을 방지하는 장치로서 아주 적합하다.

마치, 내 무의식이 나를 저버릴지도 모를 위험, 

가령, 새벽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할까 싶은 걱정에 알람을 두세개 맞춰놓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신념은 공고히 구축해놓았던 내 정신의 질서의 중심축을 서서히 무너뜨리기도 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서운 증오를 낳아 전쟁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는 강력한 관념이기에

신념의 발원지인 의견에 있어서는 용감할 필요가 있겠다.

나의 의견뿐만 아니라 

타인의 의견에 대한 나의 의견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견은 자유롭게 방사되어야 한다.

의견의 제작소인 나의 사고가 정체 내지 고장나지 않고 제대로 숙련된 기능체로서 운용되려면 

나는 충분히 깨질 각오로 서 있어야 하는데

이는 방사없이는 불가능하다.


나의 의견이 타인의 의견과 충돌하고 여기에 이겨먹자고 덤비지 않는 예(禮)를 보탠다면

나의 의견은 충분히 그 '순진한 의식'에 더 가까워지며 

잘못된 옷을 다시 고쳐입거나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을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나를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타인의 의견들에서 나의 정신을 보호하고

나를 순진함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게끔 나의 의견을 지켜주는 연동작용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가 활발하게 기능하는,

나의 사고가 매순간 검열되는 순환과 회귀의 과정.

이것이 공부(工夫)다. 


이 공부는 우리가 심상에 다지는 많은 결심들, 결심으로 이뤄지는 행위들, 행위로 드러나는 결과들, 결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세상의 자리들을 제자리에 서게 할 것이다.


깨지면서 보호되고

보호되면서 다시 깨지는 이 공부가 진정한 삶의 교육이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내 자리에 제대로 서 있기 위해서

깨져야 할 부분을 깨고

깨지 말아야 할 부분은 긴 세월 그대로 보존시키켜 진정한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실재하지 않지만 관념에 형상화된 것이 나의 가치이고 내 삶의 방향이며 내가 전체를 위해 잘 쓰이겠다고 부여받은 의무에 대한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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