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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려구요.

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2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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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동리셋 10가지 가운데 가장 어려운 항목을 뽑으라고 하면 아마도 지금 언급하는 ‘기다림’일 것이다. 성격적인 부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기다리라고 나 스스로에게 명령하고 수련, 수행, 연마, 훈련.(어떤 단어가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명령을 스스로 거.행.하는 것은 수행수준이었다) 하는 과정은 성격을 너머서는 의지가 필요한 영역이었고 따라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시켰었다.


일단 나는 행동이 상당히 빠른 편이다. 앞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나름 부지런하고 손도 빠르고, 남들시키는니 내가 해버리고 마는, 그런 성향이다. 남들을 못 믿거나 그들보다 내가 하는 게 빨라서인 것도 있지만 내가 해버리고 마는 것에는 나의 천성적인 노예근성(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나에게 늘 노예근성에 젖어있다고 표현한다.) 때문이다.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남들이 하는 것에는 미안한 감이 아주 큰 사람이다. 같이 식사할 때도 내가 차리고 중간에 반찬이 떨어져도 내가 가져와야 하고 설거지랑 뒤처리도 내가 해야 한다. 남들은 그저 즐기고 있으면 좋겠다. 이런 천성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나는 이렇다. 좋고 싫고 어떻고를 따질 필요없이 내가 이렇다.


이는 비단 단순한 식사 시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도 참고 참고 또 참고 속을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인다. 절대 착해서가 아니다. 말을 못해서이고(마인드리셋 1번에서 말부터 가르쳤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상대에게 못할 짓이라는 천성적인 노예근성이 있어서다. 그런데 그렇게 참을 거면 계속 참거나 묻어두거나 잊어버리면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도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일이 계기가 되면 모든 감정이 덩어리가 되어 폭발해버린다. 감정은 그렇게 내 속에서 혼자 자신을 키우고 또 키우다가 바깥 상황이 자신과 딱! 어울린다고 판단될 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 나에게서도 감정이란 녀석은 자기 속성대로 움직인다.


감정이 폭발하면 또 성격대로다. 화를 내고 물건을 때려부수고.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말을 안해버린다. 외면과 회피, 무관심이다. 내 속에서 그것들을 몰아내는 데에 혼자 온갖 내적진통을 겪는다. 참는 것과 외면, 회피, 무관심은 다른 차원이다. 나를 훨씬 더 힘들게 몰아붙인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상대를 보지 못할 정도로, 내 기억속에서 그 모두를 지워버리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는 나에게 놀랄 정도다. 어리석음의 끝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고 스스로를 스스로 안에서 죽여버린다.


일을 할 때도 나는 기다려를 훈련시켰다. 나는 결과주의자, 경험주의자이다. 실천없는 지식은 허영이며 결과가 안 좋으면 과정도 그 수준이었다고 결론내어버린다. 이러한 나의 사고는 어떤 일을 하든 결과를 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친다. 결과가 나지 않으면 천성대로 모든 것은 내 탓으로 돌려 나를 또 못살게 군다. 이 때도 기다리라고 한다. 나를 못살게 굴기 전에 기다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으니 지금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에는 그 일이 가는 길 자체가 그런 것이지 결코 나의 탓은 아닌 것이잖아. 라며 나를 자책하거나 닦달하지 못하도록 나는 나에게 기다리라 명령한다.


관계에 있어서도 이 훈련은 아주 중요했다. 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금방 그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퍼주려 한다. 기다려. 스캇펙 박사(주석참조)의 말대로 사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판단하고 사랑하라‘를, 쇼펜하우어(주석참고)가 알려준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을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도록'을 훈련시킨 것이다. 훈련시킨 것이다. 마구 좋아하고 마구 퍼주고는 항상 뒤에 탈이 나는 경우도 여러번 겪었다. 9개 주고 1개 안주면 1개 주고 9개 안준 사람보다 나를 더 미워하는 것도 여러번 겪었고 주는 사람이 10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은 조금 받았다고 느끼며 섭섭해하는 것도 아주 많이 겪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안주고 받는 쪽이 훨씬 더 관계력이 좋구나 싶은 경우도 여러번 간접적으로 겪었다. 결국, 판단없는 사랑, 기준없는 사랑, 지각없는 사랑이 냉정하거나 이해타산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 상대를 위하고 관계를 멀리까지 이끌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노예근성이라기보다 자기기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착하고 순하고 말도 잘 듣고 곰처럼 말도 잘 안 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나는 나를 없애가고 있었기에 이는 나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도 된다는, 무언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나를 외면해도 된다는 자기파멸적인 기만행위인 것이다. 나는 착하고 순하고 베푸는 존재로 보여져야 하고 내 속에서는 상대를 죽도록 미워하고 나만 손해본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억울해하고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나의 외피를 이쁘게 포장한 채 안전하게 나를 보호하는 자기기만.


이러한 매커니즘에서 나는 나를 더 이상 파멸시키거나 내적살해를 멈추게 하기 위해 대상(인간이든 물건이든)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는 스스로 나를 몰아가던 방향에서 강제로 멈추게 되는, 어쩌면 신이 나를 도와 나를 살려두는 것이라는 사고에 이르렀다. 나에게서 일어난 많은 일들은 내가 나를 돌보거나 아끼지 않는 기만행위를 멈추게 하기 위해, 이러한 매커니즘이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는지에 대해 깨닫게 하기 위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책이 나에게 알려줬고 삶이 날 키워줬다.


여하튼 이러한 나의 성향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행동리셋 첫 번째로 나에게 ‘기다려’를 훈련시킨 것이다. 앞서 거론한 예를 들자면 식사시 반찬이 더 필요할 때 나에게 ‘기다려’한다. 다른 누군가가 반찬을 가져와도 못본척 기다리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기다려.’하며 참지 않는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내가 할말이 있는데’라고 운을 띄운다.


행동을 리셋한다는 것은 포괄적이다. 꼭 신체를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 표현 역시 행동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주 힘들었다. 그저 말 안 하고 말지. 하면서 침묵했던 나는 이제 나의 오래된 관성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하고는 안 하던 방향으로 나를 표현해본다. ‘나 화났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할 말이 있어’, ‘나 좀 억울한데’, ‘난 싫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오히려 나를 드러내고 (물론 처음엔 엄청 어설퍼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었다.) 드러내는 나를 그저 잘했다고 칭찬만 해줬다.


일단

거둬내야 이면이 드러나고

드러내야 정체를 알게되니

거둬내고 드러낸 다음은 그 다음에 할 일이기에

관성대로 하려는 나를 기다리게 하고 관성대로 하지 않는 나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give and give가 옳은 줄 알았는데 take and take도 옳을 수 있구나를 알게 되었고 참는 것이 능사인 줄 알았는데 참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큰 화가 오지 않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쪽 면만 보고 있었던 나의 이분화된 사고를 전체를 보는 사고로 서서히 확장시켜 나가는 진통은 아주아주 힘들었지만 의외의 쾌감도 있었다. ‘어? 이래도 되는구나!’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뒤를 돌아보면 나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당시엔 왜 그러한 눈이 없었는지 왜 그리 무지했는지 책은 그래서 나에게 스승이다.

사랑을 주더라도 지각있는 사랑을,

정성을 쏟더라도 나를 지켜내는 정성을,

동정을 갖더라도 혜택을 권리로 착각하지 않는 선까지만,

이러한 기준자체가 나에겐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 나는 나를 변화시켜야만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주고 싶은 많은 것들을 더 많이 줄 수 있도록

나눌 수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변화시켜 대상, 대물, 대인 모든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본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관계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것이어서 내가 변하면 관계된 대상도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이 훈련은 지속된다. 상당히 어렵고 상당한 수준의 의식을 요한다. 지각있는 사랑. 이건 정말 어렵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오래된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기에 ‘사랑’에 대한 지각을 갖는 것은 어려웠다. 원수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의 ‘뱀처럼 지혜(주석참조)’롭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자매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에게 대접하기 위해 주방에서 분주한 언니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무릎 밑에서 얘기를 나누려 앉아있는 동생이 훨씬 더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 그러한 ‘지각있는’ 사랑을 나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혜롭지 못했던 나는 진정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 수 없고 상대를 위한다는 외피를 걸쳐 입은 채 나에 대한 기만에 빠져 오히려 관계를 선하게 이끌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의 나는 나를 키워보련다.


주> 스캇펙, 아직도 가야할 길, 신승철역, 2002, 열음사

주> 쇼펜하우어, 인생론, 박현석역, 2010, 나래북

주> 뱀처럼 지혜로워라. 는 성경의 말씀은 뱀이 자신의 일부분을 단단한 껍데기로 만들고 그것보다 몸집이 커져 껍데기를 던져버리는 행동 때문에 뱀을 ‘끝없는 성장’과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힘’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껍데기, 자신의 환경을 던져버리는 방법을 배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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