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4
참 재미난 놀이였다.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멀리하는 것, 아니 사용하지 않으려는 행동리셋은.
내 입을 틀어막기도 하고 실수로 입밖으로 튀어나오면 허겁지겁 ‘취소취소!!!’ 손을 휘젓거나 후루룩 입속으로 도로 집어넣는 시늉도 하고. 말이 하고 싶은데 꾹 참느라 애궂은 한숨만 푹푹 내쉬기도 하고 괜히 얼굴만 울그락불그락대기도 했던, 정말 재미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참 요긴했던 행동리셋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어리셋이라고나 할까.
불평, 불만, 변명, 비난, 비겁, 비참, 바보, 비굴, 비웃음, 부정..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들 가운데 내 언어습관에 이러한 표현이나 표정, 말투, 말이 묻어있으면 금지시키기로 했다. 우선 나는 불만을 토로하는 여러 가지 감탄사를 많이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IC~~’라든가 ‘어휴~~’, ‘나원참’, ‘뭐???????’ , ‘쳇!’, ‘치~’와 같은 쉽게 터져나오는 이 단어들에는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상대가 한심하다는, 어이없다는 의미가 묻어 있는 것이다.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서 뭐 대수겠냐 싶긴 하겠지만 리셋을 하겠다고 한 것이니 대충 넘어가는 것없이 깔끔하게 고쳐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나의 오래된 습관, 잘 삐친다. 감정의 근육이 약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삐치면 말은 안하면서 괜히 흘려보거나 표정을 굳혀 '나 삐쳤으니까 나한테 관심가져'라고 은근히 자꾸만 티를 낸다. 얼마나 비굴한가?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행동리셋에서 삐치기 금지!!! 일상에서 화내기는 좀 그렇지만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는 다반사, 삐치지 않는 방법은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지? 고민하려다가 그냥 이렇게 말해버린다. '나 삐쳤어!'라고. 그러니 상대는 '왜?'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이렇게 지금까지 슬슬 삐치는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삐치는 건 사실 좀 많이 비굴하다. 말 안하면서 표정으로 은근히 상대를 굴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데다가 상대가 나에게 관심가져주길 바라는 욕구에다가 만약 상대가 이를 무시하거나 못알아채면 애초의 삐친 이유보다 그 못알아주는 게 더 섭섭해져서 맥락없는 그냥 떼쓰기가 되어버리는, 아무튼 투정같은 건 이제 안부린다.
또 습관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변명이 많았다. 변명인지 상식선에서 아는 것들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았는데 변명같지 않은 변명, 그러니까 변명인지도 몰랐던 변명, 그것도 비겁한 변명이 있었다.
‘난 몰랐는데!’다.
모른다는 것은 어쩌면 그럴싸한 정당성의 포장을 하고 있더라도 상당히 비겁한 변명이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몰랐다는 커튼 뒤에 숨어 자신의 안정만을 보장받는 비겁중에서도 상당한 비겁한 태도였다. 물론,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럴 땐 ‘몰랐어.’라고 말하지 않고 ‘몰랐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알려주면 내 역할을 하겠다.’라고 뒤에 한 문장을 더 말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변명은 단지 언어뿐만 아니라 나의 여러 가지 성향에서 아주 자주 사용하던 방패막이었다. 사람을 만나거나 통화를 잘 하지 않는 나의 성향으로 인해 만나자고 하거나 전화가 걸려오면 어김없이 변명을 했었다. ‘미안, --하느라 못 받았어’, ‘아, 그 날은 내가 —가 있는데 미안해’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 만나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귀찮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이럴 땐 상당히 난처하다. 약간 곤란한 관계에서는 더더욱 통화를 피한다. 나의 회피성향은 아주 독하다. 그럴 땐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내 귀에 안 들리도록 꺼놓기도 하는데.. 물론, 그냥 안 받으면 그만인 것인데 나는 그 자체가 무지하게 신경이 쓰인다. 부재중전화가 들어와 있으면 당연히 전화를 해야 하는데 어쩌지? 하며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변명하는 것대신 문자를 보낸다. ‘내가 전화가능할 때 할게’라고. 이 말은 변명도 아니고 통화하기 싫다는 말도 아니고..
사실,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향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며 또 굳이 이렇게 혼자를 좋아하는 내가 성향을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고... 요즘엔 미리 얘기한다.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만나는 것도 별로 선호하지 않고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아요. 필요하실 경우 문자 주시면 무조건 답장을 드립니다.’라고. 이렇게 미리 나를 드러내니 대부분의 경우 나를 배려해주어서 변명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다행이다.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 가운데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을 단 하나 꼽으라고 하면 나는 ‘비겁’을 택하겠다. 비겁한 거 정말 싫다. 비겁하면 비굴해지고 비굴해지면 비참해진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고 나 자신에게 비겁하게 굴거나 나에게 비겁이 들킨 경우 용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내가 싫어진다.
나라는 나약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것도 아니기에 커다란 비굴이야 별게 있겠냐마는 내가 나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키는 것 자체가 비겁한 것이다. 어떠한 결의가 있고 도전도 했지만 응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태만과 나약, 변명따위에 저당잡혀서 결의도 희미해지고 도전도 무색해지는, 이럴 때 나는 비겁하다고 여긴다. 이는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기에 정말 비겁한 정신이다. 세상은 다 속여도 나 스스로는 안다. 내가 비겁한지 그렇지 않은지. 남들은 내 변명에 속을지 몰라도 나는 안다. 나의 태도가 변명인지 진실인지. 그걸 눈감아주는 그 처사자체가 너무 비겁해서 정말 그러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변명따위를 늘어놓으면서 비겁해지는 나를 가만냅두면 비굴해지고
비굴은 나 자신을 비참하게 하지만
비참을 들키기 싫으니 또 다른 변명으로 이를 정당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세상 모두가 나를 비웃어도 내가 나를 아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만은 정당해야 하리라.
신독(愼獨)이어야 하리라.
사실 모든 시작은 감정의 근육이 약한 것에서 기인한다.
한때 '냉혈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지나치게 감정이 없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내면의 부실함을 단단하게 잡아줄 지식과 에너지가 내겐 절실했다.
내면의 강인함은 정신의 부(富)와 연관되고 이는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반응에 민감하게 떨지 않고 내 안의 깊숙이에서 우러나와 드러나는 자존감.
이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삼가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비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실, ‘ㅂ’으로 시작되는 부정적인 언행, 표현은 다 연결된다. 상황이나 현상에 불안해지면 이에 대한 방어기제로 현상을 부정하게 되고 부정은 불평이나 불만으로 드러나며 이는 사실을 왜곡, 오류화시킬 가능성을 높여 결국, 자신의 안전한 공간으로 비겁하지만 숨겨줄 수 있는 변명을 하게 된다. 변명은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것이기에 옳게 포장되기 위해서 현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관계란 정당성의 대립이니까 대상을 비난하면 자신의 정당이 상승하는 것이다. 비난은 변명의 몸집을 더 강하게 키우며 수습이 안될 정도의 비굴한 아첨꾼으로 자신을 내몰고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되면서 결국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과 인과, 상관관계로 인해 애초에 시작은 사실을 사실로 인지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정과 수용, 진실에 기준하되 진실을 표현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그저 침묵, 침묵이 아니라면 불평이든 비난이든 남들이 뭐라고 욕을 하고 오해를 할 각오를 안고서 나의 말을 하면 된다. 남들은 불평처럼 비난처럼 변명처럼 들을지 몰라도 나에게 그것이 진실이면 되는 것이다.
원래가 진실이란, 나아가 진짜 사랑하는 이에게 깊은 내면의 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며 비난과 칭찬은 동시에 따라오는 법이다. 오래된, 농익은 관계일수록, 난해한 현상일수록 이러하다.
결국, ‘ㅂ’을 사용하지 않는 행동으로 리셋하기 위해서는 ‘ㅂ’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에너지를 투자하기보다 –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습관처럼 나오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으려는, 뒷담화에 가담하지 않는 정도-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쏟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같이 동조해주지 않으면 나만 소외되겠지?
뭐 어때, 이 한마디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이번 한번쯤이야,
이런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내가 ‘ㅂ’으로 시작되는 그 한마디 안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애초에 세상을 바꿀 위인이 못되는지라 나는 나라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내가 점만큼만 바뀌어도 내 옆사람이 점만큼 바뀌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이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엄청 탁월한 누군가가 이 점을 거대한 구(球)로 변화시킬지 모르는 일이다.
나만 지키면 되고
나라도 지키면 되고
나니까 지켜야 하고
나만이라도 지켜보자.
그러면 된다.
50의 나는 나를 이렇게 키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