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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정하고 잊어버리라 하고선

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5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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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정하고 잊어버리라 하고선

내가 처음 코칭을 접한 것은 2008년. 벌써 15년 전이다. 국내 처음으로 Co-Active 코칭이 들어왔고 당시 내가 브랜딩한 교육사업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즈음, 나는 아주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었다. 외적으로 보기엔 잘 나가는 사업가에 안정된 가정에, 별로 문제없어 보였을지 몰라도 교육.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갈증과 갈증을 유발한 나의 무지, 게다가 현실에서 만나는 부모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름의 심각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하면 간단한 설명이 되려나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급했던 부분은 나의 무지를 채우는 것이었다. 교육학, 심리학, 가족학 모든 면에서 나는 무지했었고 심지어 사업도 처음이었는데 나의 속도보다 사업이 커나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보니 여러 가지에서 백조처럼 바둥대는 심장과 웃는 얼굴을 가진, 겉과 속이 극에서 극으로 갈라지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갈급했던 나는 국내에 생소했던 코칭으로 나의 성공자마인드, 사람을 성장시키는 스킬과 기술을 익히고 싶었고 당시 1회 참석(3박4일)을 3번 해야 수료증이 발급되는 고급과정을 전체 이수하기에 이르렀다. 연년생을 키우면서 그 시간을 빼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1회 참석시 800여만원에 달하는 교육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에게 더 시급한 것은 나의 무지를, 구멍을 메우는 것었기에 시간도 돈도 모두 투자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교수, 법조인, 정치인이 함께 수강을 했을 정도니 당시 코칭은 아주 수준높은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코칭이라는 단어가 난무하여 다양한 곳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지금까지도 나에게 ‘코칭’이란 처음 접한 그 정도 의식수준으로 그만큼 사람의 잠재력을 끄집어내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나는 코칭덕에 당연히 알아야만 했던 핵심적인 몇가지를 그 젊었던 시절 알게 되었다.

내 안의 것을 찾고 끄집어내는, 이 중요한 공부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는 것과 나와 같이 평범한 부모를 둔 사람은 가정에서도 배울 수가 없었다는 것.

학교에서 왜 안 가르쳐주는지도 알게 되었고

이를 이해하고 알려주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도 소수이겠구나라는 것.

무엇보다 꿈(이상)과 현실, 즉 바라고 원하는 바와 현실의 갭을 메꿀 수 있는 구체적인 플랜을 만드는 것을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배웠던 것이다.


꿈이 왜 중요한지,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성공이란 무엇이며 성공마인드란 어떻게 장착시키는지, 지식의 무용함과 지식을 지혜롭게 승화시키는 것의 연관성, 관계에 대한 본성적 이해 등 지금은 다양한 매체나 자기개발서에서 많이들 거론하고들 있지만 보편적인 정도가 아니라 정말 화룡점정과도 같은 한끗차이를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공했냐고? 아니, 성공이란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완벽한 상태일 것이다. 나의 성공에 대한 개념은 ‘나의 가치실현’이니까. 분명한 것은 10여년 전, 그리고 보다 더 본격적으로 날 변화시키고자 시도했던 새벽독서를 시작한 2019년 2월 이후 지금까지의 나는 더디든 빠르든 계속해서 목적하는 그 길로 나를 쌓아가고 있기에 성공을 위해 성장중이라고는 과감하게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나누고, 전하고 있다. 학문으로도 검증하고 있고(매년 논문을 1편씩 써냈으니까) 실천적으로도 모임을 운영하며 전문 코치들을 양성하고 이 프로그램은 Co-Active 코칭에 내가 만든 ‘실천적지혜’이론인 SSWB모델을 접목시킨 코칭프로그램(주석참조)이다.


나의 삶의 방향은 '교육'이다.

교육이란

보여주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외부의 것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와의 경쟁을 통해 나를 키워내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누군가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을 높여 궁극의 목적을 향하는 길을 찾게 하는 것이지 소유의 양을 늘이게 돕는 도구가 아니다.


나의 길을 가는데 있어 도구는 말(강의 및 토론)과 글이다.

이 속에 담기는 메뉴들은 성공학, 독서모임, 코칭 등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들에 있어 단 하나, 가장 중요한,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핵심이 되는 재료 하나를 꼽으라면 ‘목표!’다.


목표.

너무나 쉽게 말하고 너무나 자주 세워보고 너무나 단순하게 포기하고 마는 그런 단어이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목표라는 단어가 가진 엄청난 위력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행동을 리셋한 결과

목표에 담긴 속성이 무엇인지 너무나 제대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목표는.

'나를 통해 세상이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이다. 따라서, 목표는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명(소명, 목적, 꿈)에 의해 추출된 '해야만 하는’ 의무인 것이며 나의 능력이나 태도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더 큰 존재의 의지가 나의 의지를 넘어설 때 이뤄질 확률이 높기에 나의 ‘순종’과 나의 ‘계획’이 필요없는 것이다. '목표'를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한' 더 큰 존재의 의지가 나의 목표에 대한 결의나 의지를 능가하고 항상 이겨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략을 짜고 계획을 잡고 데이터를 확보하고... 하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 하나. 정말 중요한 행동리셋은 ‘그냥’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표는

미래에 있다. 과거에 없다. 과거경험이 토대가 될까? 방해가 될까? 이는 나도 모른다. 아니, 관심가질 필요조차 없다. 미래, 미지에 있는 그것을 아는 존재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쓰이는 존재일 뿐이다. 목표는 목표자체가 이미 길을 담고 내게로 온 것이다. 마치 씨앗안에 미래의 열매가 맺어질 길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듯이 목표가 세워졌다는 것은 씨앗이 내 손에 들어온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그냥 그런 것이다. 씨앗을 심듯이 목표를 내 정신과 가슴에 심고 매일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행동(루틴)만 하면 된다. 물주고, 영양제 주며 씨앗이 자라길 기다리듯. 대충 언제 열매가 열릴지 감은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미래니까.


목표도 마찬가지다. 3년뒤 이렇게 되게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지만 나의 결의는 무심하다. 아니, 무심할 수밖에 없고 되도록 무심해야만 한다. ‘뜻밖의’, ‘예상밖의’ 결과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운과 기회가 목표와 만나면 그리 된다. 운과 기회도 미래에 있다. 내가 모르는 미래라는 미지의 세계에 목표, 운, 기회가 조우하는 지점이 있을테고 이는 내 머리속, 내 삶속에 없던 것이기에 나는 무심하고 무지하고 무관해야만 한다. 혹여 3년이 아니라 6년이 지나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괜찮다. 때가 되었지만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단 하나의 씨앗만 심지 않듯이 목표도 많이 세울수록 좋은 것이 이러한 이유인 것이며 이 또한 이유가 있어 그리 된 것일테니 이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오로지 관심갖고 집중해야 하는 것은 행동. 그것뿐이다.


목표는. 결국, 나에게 매일매일 해야할 행동(루틴)만 남겨두고 자기 길, 자기 속도, 자기 모양새,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불러들였다 내보냈다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그 지점에 다다르면 나에게 정체를 드러낸다. 단, 루틴을 하고 있어야 드러내 준다. 내가 멈추면 그 목표는 나외에 이 세상 누군가, 같은 목표를 가진 이에게서 드러나겠지. 나는 '불파만 지파참(不怕慢 只怕站-주석참고)'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목표는 내가 세운 것 같지만 아니다. 내가 어느 날 홀연히 씨앗과 인연이 닿았듯이 (화원에서 샀든, 마당에서 주웠든, 길가다가 얻었든) 목표 역시 그렇게 나와 인연맺어져 자신의 열매를 위해 서로에게 기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라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내가 되고자 하는 내가 되기 위해 나는 몇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나에게 주입시키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루틴만 한다.


‘일(목표)는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나는 일에 선택되어진 사람이다.’

‘처음엔 내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듯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목표가 내게로 달려온다’

‘목표는 구체적으로 잡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루하루의 우선순위로 정한 행동, 즉 루틴을 추출한 후 목표는 잊어버린다.’

‘나는 단지 행동할 뿐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이러한 신성한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이 고달팠다. 경영학자답게 전략, 계획, 비전수립.. 이런 단어들과 너무나 친숙하고 갖가지 기법이란 기법을 통달까지는 아니지만 참으로 많이 아는 나이지만 이제는 확연하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원리와 이치를 알게 되었으니 기법을 알고 활용하는 능력보다 더 상위차원의 중요한 ‘목표’의 본원적 속성을 이해하고 나와 목표의 관계에서 이 속성이 그대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기법중의 기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목표를 정할 때는 시간에 근거하여 구체화, 정량화시킨다.

목표를 위한 루틴을 추출하는 과정까지도 아주 디테일해야 한다.

그 다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의 모든 행동은 루틴에 맞춰져 있다.

우선순위로 루틴을 하고 나머지는 자유다. 일을 하든 놀든.


작은 축적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다. 브런치 글을 매일 새벽 5시 발행한 지 13개월(2023.9.18.일이 13개월)이 됐다. 지금 나의 글은 양적으로 많이 쌓였다. 내 글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정량화할 수 없으니 거론하지 못하고 2019년 2월 19일부터 매일매일 새벽 1~2시간 읽은 책의 양도 이제 제법 쌓였다. 이러한 양의 축적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나는 모른다. 목표는 있지만 목표의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거대한 존재가 날 통해서 뭔가를 이루려 날 이렇게 새벽마다 눈 비비고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겠지.


니체(주석참조)가 말한 글귀가 떠오른다.

우리는 낙타였다가 사자였다가 커다란 용이었다가 아이여야 한다고.

고독한 사막에 기꺼이 앞다리를 굽혀 자신의 등에 무거운 짐을 싣고 뚜벅뚜벅 걷는 낙타.

어느 지점에서 낙타는 사자의 정신을 갖는다. 맹수가 되고 목표하는 것은 다 자기먹이감으로 만들 수 있는 용맹한 사자. 하지만 사자에게 커다란 용은 이 모든 것이 너의 능력이 아니라 더 큰 의지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지만 사자는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커다란 용의 메시지, 나아가 본원적인 본능의 자아 그 자체인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자까지는 될 수 있지만 용의 메시지를 아는 사자는 드물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감히 나는 용이 하는 말을 알아듣겠다. 이해하겠다. 지금 뚜벅뚜벅걷는 낙타의 육신에 사자의 정신으로 용맹한 나이지만 이 모든 하루하루는 커다란 용이 던지는 메시지처럼 본원적인 삶, 조화에 유용한 자가 되기 위해 나를 통해 발현코자 하는 어떤 목적하에 나는 걷고 있음을 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더 큰 존재에 의해 없던 나의 능력(잠재력)까지 모두 뽑혀 드러날 것임을 믿는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늘 명한다.

바라지 말고 기대하지도 말고 그냥 해.

안된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징징대지 말고 그냥 해.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더 무엇을 해야 하냐고 갈구하지 말고 그냥 해.


나는 나의 사명에 따라 정한 목표가 세상에 드러남을

믿고.

그냥 하게 하는 정신.

그냥 하고야 마는 신체.

그러면 된다고.

바라지 말고 믿고 행하면 된다고.


그렇게 신성한 무관심으로 목표를 잊고 있으면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그 순간에

‘예상치 못한’ 완벽한 결과로서

반드시 목표하던 그것을 만난다고.

그러면, 그 때 그저 감.사. 하면 된다고.


50의 나는 이렇게 꿈을 꾸며 그 속에서 나를 키운다.


주석> 김주원(2023), ‘경영인의 지혜(Managerial Wisdom)’ 습득을 위한

SSWB-Act 코칭프로그램 개발과 적용 –내러티브 중심으로, 경영교육연구, 제38권 4호

주석> 느리게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중도에 멈추게 될까 그것이 두렵다.(중국속담)

주석>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 2015,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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