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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무조건 일어나

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6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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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무조건 일어나]


‘50이지만 나는 나를 키웁니다.’는 나의 지난 4~5년간의 변화를 통해 내가 나의 마인드와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를 서술함으로써 앞으로 살아갈 나의 미래, 나의 삶을 방향대로 제대로 걷겠다는 일종의 기록서이며 나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도,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에 약간의 힌트, 팁 정도라도 되면 참으로 보람있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나의 인생을 딱 2동강 내라고 하면 아마도 2019년 2월 19일일 것이다. 처음으로 새벽독서를 시작한 날이다. 왜 새벽 독서를 시작했는지는 앞서 ‘5, 목표를 정하고 잊어버리라 하고선‘에서 약간의 언지는 했었지만 ’나는 상당히 열심히 살았고 원하는 것의 결과들을 이뤄내며 살아온 듯하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과 내면에서 소리치는 나의 갭과 ‘100세 인생, 미래가 준비되었냐’는 보편적 질문에 확실하게 yes라고 답할 수 없는 현실 직시, 무지가 이렇게 심한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떤 공부를 해야할 지 모르는 막막함' 정도가 아마도 나에게 새벽독서를 결단하게 했을 것이다.


그냥 독서는 늘 해왔던 터라 가만 생각해보면 ‘독서’에 대한 의미보다 ‘새벽’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명확하다. ‘나의 성장’에 있고 ‘나의 가치실현’이라는 꿈으로 가고 싶다. 이를 위해 앞서 언급한 목표를 행하는 루틴을 ‘그냥’ 매일매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는 종착역, 가는 길목, 골목, 어느 지점에서라도 나는 나를 도와줄, 내가 혹 놓치고 지나칠 지도 모를 나의 감지 밖의 영역에서 내게 올 모든 것들을 내가 놓치기 싫고 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잡고 싶다. 그래서 나의 오감 밖의 더 나은 어떤 기운을 구하여 청하고 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불사신이 되고 싶었다. 냉정해야 할 땐 냉정하고 울고 싶을 때 울고 맘껏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할 줄 아는, 그렇게 삶의 불쾌한 사건이나 타인의 무례함, 돌아볼 가치도 없이 치부해야 할 상황, 나를 언짢게 하는 자잘한 것들(주석포함)은 쉽게 발로 걷어찰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을 지니고 싶었다. 이러한 강인함을 40이 넘도록 배우고 키우지 못했다면 이는 인간세상에서가 아니라 더 큰 세상에서 배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기에 새벽은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시간이다. 흔한 유행처럼 미라클모닝을 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나만이 있는, 컴컴한 그 시간 나에게 집중하고자 택한 시간이 새벽이다. 처음엔 새벽 4시, 물론 몇 달은 바뀐 아침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새벽독서였기에 포기할 수 없었고 ‘읽어내야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다짐 역시 아주 단호했기에 새벽을 지키는 것은 내 인생에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태양을 마중나가고

새들에게 인사하고

컴컴한 새벽 하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는 별과 대화나누고

긴 들숨 날숨으로 자연의 기운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성호를 긋고 주모경을 외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이것저것 묻고

오늘의 나를 부탁도 하고

미래의 점괘를 혼자 꿰기도 하고

여하튼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1시간여의 시간은 혼자만의 놀이,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현실의 나와 내 안의 내가 만나서 신나게 대화하는 시간이었고 지금까지 그렇다.


눈뜨면 목표를 적고 태양마중나가 컴컴한 테라스에 잠깐 서 있기도 하고 그렇게 들어와 커피한잔하며 책을 읽고 읽은 구절들은 카페(지담북살롱)에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그렇게 6시나 7시까지 나의 시간은 지속되었고 1년여전쯤 함께 하는 이들의 등장으로 이제 ‘zoom’을 켜고 모두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각자의 세계로 빠져드는 커뮤니티도 만들게 되었다.


새벽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라는 것 외에 너무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한두가지로 일축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바대로 태양과 나와 자연이 만나 엄청난 자연의 기운을 주는 것, 둘째, 하루를 2번 사는 효과를 준다. 이 역시 너무나 경이로운 경험인데 4시에 하루를 시작하니 오후 2시까지 10시간, 나머지 10시간, 나머지 4시간. 잠을 4~5시간정도 잔다고 볼 때 내 하루는 10시간씩 2번이나 있는 것이다. 남들은 일어나서 직장에서 8~9시간 근무하면 하루가 다 간다고 하는데 나는 10시간이나 보내도 겨우 낮 2시 밖에 안된다.


그러다가 하루를 3번으로 쪼개볼까? 싶어 그렇게도 살아보고 다시 2번으로 쪼개도 보고. 결국, 나는 1일을 2번 사는 것에 이제 아주 익숙하다. 5년째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4시 전후로 일어나 오전까지 1일, 그리고 오후에 덤으로 받은 1일, 저녁은 내 맘대로. 뭐, 이렇게 아주아주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 1일을 2~3번으로 나눠 각 시간마다 가장 중점을 두고 해야 할 루틴을 정하고 그 외에는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싶은대로 산다. 얼마나 감사한지..


새벽이 나에게 준 선물같은 일상의 세 번째는 창조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글들(아래 링크 참조)을 썼는데 잠에서 깨고 싶어 깨는 것이 아니라 ‘이거 얼른 써!’라고 등떠밀려 벌떡 일어나 글을 쓴 경우는 물론 태양이 뜨기 전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것들을 다 뱉어내지 못해 혼자 분주했던 적이 어디 한두번인가? 아이디어와 글, 모든 창조가 새벽에 나를 덮치기 시작하면 나는 너무나 바쁘게 정신없는 새벽을 보내게 된다. 책상 앞에 꼼짝 못하고 앉아 내 안에서 마구 쏟아지는 그것들을 받아적고 정리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그리고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나와야 할 것들이라는 관점은 무조건 감사로 향한다. 제인로버츠의 ‘육체는 없지만 나는 이 글을 쓴다(주석참고)’라는 제목처럼 나 역시 내가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마구 적고 있었던 적이 너무 많았다.


그저 나를 변화시키고 싶어 택한 시간이었다. 뭐든 오래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냥 새벽에 일어나자. 몇시? 4시. 해서 그리 한 것이라 별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지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에 의해 나는 지금껏 그 시간에 눈을 뜨고 내 자리를 지켜왔나보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방향은 있다.

잘 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잘가려는 의지는 강하다.

언제쯤 도달할지 나는 모른다. 물론 도달지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어떤 모양새로 그 자리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만의 반석위에 서 있을 것임은 안다.


이러한 4년을 보내며 나를 믿지 않게 되었다.

나를 의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보다 더 믿음을 주는 존재가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나는 무조건 새벽에 눈을 뜬다. 전날 어쨌든 중요하지 않다.

새벽의 기운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무조건 느낌이 오면 바로 행동한다.

새벽에 주는 영혼의 자극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판단을 믿지 않는다.

무언가로 나를 쓰기 위해 판단하려는 나의 의지보다 더 큰 의지를 따르기 때문이다.


새벽은.

내 하루의 정수이며

새벽독서는

내 인생의 정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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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쇼펜하우어, 인생론, 박현석역, 2010, 나래북

주> 원제 : Seth S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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