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8
50에 나를 키우는 글을 쓰기 위해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내 기억의 근저에서 출렁대는 것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마음이 영 맑지는 않다. 참 못난 나인데, 미숙하고 나약하고 미련하기도 어리석기도 한 나인데, 이렇게 언어로 표현해도 괜찮을까. 지금 나름 괜찮은데 여기에 혹여나 못난 내가 얹혀져 다시 못나지면 어쩌나 싶은 우려도 있지만 그건 잠시, 무뇌아답게 아무 생각도 없고 감정은 감정대로 할일하고 나가는 정체라는 명제가 이제 뼈 속까지 들어와 있으니 오늘도 그냥 써보련다.
못난 나를 드러내면 잘나진다는 명제는 늘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인데 못난 나를 그대로 노출했지만 잘 나질지 아니면 더 못나질지는 나는 모르는 걸로 하겠다.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나를 들춰내고 드러내고 포장을 걷어내는 이 시간에는 어떤 용기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용기는 계산하면 저절로 생긴다. 본성적으로 내재된 정체라기보다 ‘이로울 때 발생’하는 그 기운에 ‘용기’라 이름붙인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나를 드러내며 나를 키운다고 발언하는 것에는 ‘이롭다 해롭다’의 계산조차가 없다. 아!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저 30일간 목차를 잡았고(잡혔고) 30일간 써보자. 했던 시도에 진실되게,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이로움이라면 그 자체에 이미 용기란 녀석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로운 것은 맞겠지.
모르는데 아는 척도 했고
아는데 모르는 척도 했으며
할 줄 아는데 못하는 척
못하면서 할 줄 아는 척
아픈데 괜찮은 척
괜찮은데 아픈 척
강한데 약한척
약한데 강한척
그른 것을 알면서도 주장 못하고
옳은 것을 알면서도 멈춰 섰던,
감정이고 이성이고 참으로 못났던 내가 글 한줄 쓸 때마다 도처에서 출몰한다.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 바보니까 피해라.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단순하니까 가르쳐 주어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고 있으니 깨우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 현명한 사람이니 따르라.
유명한 아라비아 속담처럼 나는 바보였고 단순하니까 배워야 했고 어떤 측면에선 너무 푹 잠들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바보인데 조금 깨우치려 하고 단순해서 배우려 하고 푹 잠들어 있지는 않으니 깨우면 벌떡 일어날 정도까지는 날 키운 듯하다.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까지 안다고, 그렇게 못난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나 역시 그렇게 못난 나를 드러내어 현명해지는 잘난 내가 되고 싶다. 결국, 이 속담이야말로 ‘못난 나를 드러내면 잘나진다’를 풀어 설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면 바보도 잘나질 수 있고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살며 부대끼면 현명한 자로 거듭날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4년간 겹겹이 화장, 분장, 치장, 포장까지 덧입힌 날 ‘김주원자체’로 변화시키기 위해 마인드와 행동을 때론 치열하고 지독하게 때론 신기하고 신비롭게 때론 심심하게 때론 재미나게 참으로 매일이 변화였고 매일이 성장이었고 매일이 아픔이었고 매일이 감사였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앞으로도 이리 반복될 듯 싶다.
그런데 나 뭐가 못났다는 거지?
해야 할 말 참고, 하고 싶은 말 삼키고,
부당한데 그냥 걸었고,
억울하지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멍든데 또 멍들어도 감추며 살아왔던 시간들.
규율이나 법을 지키지 않거나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맘으로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했고 이성이 부족했던 내 탓인줄 알면서도 상대의 탓으로 원망하기도 여러번이었고 분명 내 잘못인 걸 아는데도 많이 우겼었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회피를 택해왔던 시간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잘못이다. 이에 대한 계산서를 지난 4년간 치르려니 나는 분주했고 조급했고 열심이었다. 아직 치러야 할 계산서가 남아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치러야 할 것을 먼저 치르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에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았던 나였다. 혹여 잘못이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주석참고)' 성모마리아에게 기도드리며 맡기련다.
인식 속에 갇혀 나를 옭죄어 놓고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 이런 말은 저 사람이 싫어하니까, 저렇게 말하면 남들이 이렇게 생각할까 봐서... 이런 것들이 나는 예의고 도리고 잘 살고 있는 나인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만약, 예의고 도리였으면 갈등이 없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포장보다 내실을 중요시하고 겉보다 안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로 소통하며 ‘느낌’으로 상대를 간파할 줄 알기에 어쩌면 지금껏 상대를 속이는 위선자였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개념적, 철학적인 이해에 미치자 참을 수가 없었던 그 당시, 나는 너무 못나서 미운 나를 부여잡고 순수했던 20대를 돌아보며 한참을 울기도 여러번 했다.
진실되게, 진심으로, 진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나
진리가 이치가 섭리가 어떤 것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나
내 사고의 발로(發露)는 내 인생의 행로(行路)이니
나는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짜 나로 살기 위해 진리를 붙잡고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아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간극이 더 벌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로 했고
내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여 자연스레 드러나는 나로서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아주 커다란 행동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냥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하고 싶은 말 하고’
그냥 내가 어떻게 보여지든 ‘감정 그대로 표정짓고’
분명 화를 낼 것을 알면서도 ‘진짜 내 속말을 하고’
예의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선 나에게 자유를 허락했다. 아주 어려운 과정이었다. 지금도 역시나 어렵다.
어쩌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선(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나보다. 너무 비약이라 여겨지는가? 천만에. 우주라는 거대한 시선에서 인간 개개인을 보자. 우주는 ‘조화’로 ‘진화’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우주가 가는 방향은 오로지 그 길뿐이다. ‘조화’란 ‘특화’된 것이나 ‘특별’한 것만을 원한다. ‘특화’된 것이란 독특한 것들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모두가 같은 것들만 존재한다면 ‘조화’의 전제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모든 것이 같다 해도 아주 미세한 염색체 하나로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생기게 되고 제 아무리 같은 말을 듣고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이 사람은 선인이, 저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것은 우주 자체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비슷한 소리와 모양을 가진 듯 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개별적으로는 모두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 채 존재한다.
유일한 것, 독특한 것, 그래서 조화에 이로운 것. ‘나’ 자체가 아닌가?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신이 이유가 있어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 그저 본성에 따르는 것이 조화에 이로운 것 아닌가?
그런데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로써 살지 못한다는 것은 거대한 우주의 시선에서는 조화에 그릇된 삶을 선택한 것이니 삶이 힘겨웠을 수밖에. 거대한 수레바퀴가 성큼성큼 굴러갈 때 작은 수레바퀴는 그 힘에 기대어 비록 미약한 힘으로라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거대한 수레바퀴의 움직임을 애써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작은 힘으로 요리조리 힘을 내며 고달프게 삶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어차피 물리적인 힘 자체에서 결국 거대한 수레바퀴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드러내어 세상의 부침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선으로 향하는 근원이라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이기(利己)’를 강조한다.
자신을 먼저 이롭게 하는 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롭고 전체의 조화에도 이로운,
따라서 이기는 이타인 것이다.
못난 나를 감추려는 자체는 오만이며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내가 남들과 뭐가 다르기에 나는 잘나야만 한단 말인가? 늘 잘해야 하고 늘 이해심이 넓고 착해야 하며 늘 주는 사람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나는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이 알고 저지르는 잘못이 1이면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100이다. 나도 100가지의 잘못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것이 마땅한데 내가 뭐가 그리 잘나서 못난 나를 없애려, 감추려 했단 말인가? 이는 너무나 나에 대해 커다란 환상을 가진 오만이자 나를 기만한 것이다. 나는 남들과 같은, 남들보다 못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그러니까 남들이 항상 나보다 못해야 하고 나보다 못나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살아왔던 오만한 자였다.
못난 나를 드러내는 것에는 또 아주 중요한 이점이 있다. 못나야 잘나질 기회를 얻는다. ‘왜 그렇게 못났니?’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못난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살게 되니 오히려 못났다고 날 욕해주는 이가 고마운 것이다. 앞서 말했든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100배 많으니까. 이 자체가 세상의 부침을 피하지 말고 섞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난 4년 지독하게 책을 읽고, 아니, 책을 파고 파고 또 파면서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어떤 문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바람결에도 아팠고 밝은 빛에는 눈이 감겼고 남들의 웃음에 나는 조롱당하는 듯했으며 숨이 안 쉬어져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큰 숨으로 허파에 공기를 넣어준 적도 여러번이었다. 숨이 안 쉬어지는 증상 때문에 폐검사를 시도했을 땐 어느 정도 숨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 숨자체가 약해서 검사가 불가능했던 적도 있다. 이같은 증상이 심해져 초음파부터 내진을 받곤 했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이 증상은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신체의 이상이 아니라면 정신의 이상이다. 나는 불안하거나 답답하거나 나와 직면하는 어떤 순간이 되면 심각하게 숨이 거칠어지고 목이 붓는 느낌을 갖는다. 신체의 이상이라면 늘 이래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가 어떤 특정한 경우에 그리 되니 진짜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으로 나는 못난 나와 직면할 때마다 이렇게 많이 아프고 괴롭다.
이러한 괴로움에도 이유가 있겠지. 나는 머리가 나빠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한편으론 다행이다. 머리 대신 몸이 이렇게 증상으로 알려주니 숨쉬기가 조금 힘겨울 땐 ‘아, 내가 이렇게 살지 못했구나. 아, 이 문장은 나를 들여다 보라는 의미구나’를 알게 되고 한참을 머물며 그러한 나를 세워두고 변화된 나를 그려본다.
그렇다고, 과거의 내가 아주 밉거나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기에 다그치지는 않는다.
그저 애썼다고...
지금껏 약했다면 이제 강해지자고...
삶을 더 잘 살아보자고...
이제 너로써 살자고...
‘미래의 나’의 중재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의 손을 잡아준다.
과거의 나는 답답했을 것이다. 주원이 자체로서 세상을 살게 해야 하는데 꽁꽁 숨겨놓고 있으니 얼마나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까. 과거의 주원이가 뿔나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뭉치고 뭉쳐서 커다란 덩어리가 된 어느 날 밖으로 뛰쳐 나오겠다고 신호탄을 터뜨린 것이 아마도 2019년 2월 19일부터 날 새벽마다 깨워 책앞에 앉게 한 힘이 아닐까 싶고 너무 단단하고 강하게 뭉친 덩어리가 내 몸 밖으로 나오려 강렬하게 용쓰는 에너지로 인해 내 숨통이 좁아져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아주 간헐적으로 이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많이 빠져나왔고 이제 잔재된 과거의 주원이가 현재의 경험과 만났을 때 조금씩 나오고 있는 중이라고 여긴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아주 어리석거나 아주 엉망이었거나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토록 지난 4년 나를 변화시키고야 말겠다고 나를 이끄는 정신에는 분명 나외에 더 큰 정신이 보태져서일테다. 더 큰 정신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나는 내 범주밖이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이유를 향해 나를 데려갈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보다 더 강력한 의지에 의해 이끌리는 느낌으로 나를 어디에 세워놓든간에 분명 지금 나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내가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다는, 내가 무엇을 해내고 있다는 감이 있으니 이는 내 능력이나 인지밖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걸으면 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지만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나는 하나의 정신을 만났다.
여러번 적은 글이지만 나의 ‘이기론’이다.
잠깐 나를 세워두는 자기의심.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들여다보는 자기부정.
나의 못난 모습을 직시하는 자기인식.
지금의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을 찾는 자기검열.
이를 통해 깨부수어야 할 자기파괴.
파괴된 것을 없애버리는 자기살해.
치열했던 그 시간을 이겨낸 자기극복.
비워진 공간을 새롭게 채우자 다짐하는 자기배양.
배양된 씨앗에 싹을 틔우려는 지난한 과정의 자기정복.
모든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나를 이끌 자기암시.
그리고,
드디어 허물을 벗고 깨끗해진 자기정화.
이러한 연계를 지니기 위해서는 일단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여다봐야만 한다. 못난 나를 그대로 인정해야만 하고 못난 나로 세상에 부딪혀봐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로 인해 정화된 나로 나를 진화시킬 수 있으며 조금은 잘난 나로 거듭 깨어날 수 있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주석참고)이고
이렇게 자신의 변화, 정화, 진화의 과정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닮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정한 선한 영향력이며
이렇게 ‘함께’ 삶을 다져가는 것이 나 자체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힘이자
전체안의 부분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삶이 된다.
시작은 못난 나를 직시하고 못났지만 드러내며 사는 것부터다.
50에도 이렇게 못났지만 나는 나를 키워간다.
참고>
용기는 계산하면 드러난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653
환장하겠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667
주> 성모송 가운데 한구절.
주>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