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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05. 2023

너의 정신, 감각, 영혼, 신체의
연동부터 이해하렴.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1


다소 긴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첫글로 선택한 이유


첫째, 성인이 되면서부터 대부분 거창한 계획들을 세우지만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주체인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계획은 계획일 뿐, 따라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이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성큼 발돋움을 할 너라는 위대한 존재를 먼저 인지하길 바라기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 자신이 어떤 구성요소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에 따라 너는 너를 온전히 사용하는 삶을 살수도, 그렇지 못한 삶으로 자신을 쳐박을 수도 있기 때문에 너 스스로가 네 정신을 통제하고 감각을 열고, 감정을 배제시킬 수 있는, 그렇게 네 몸을 운용할 수 있다면 인생을 자기답게 자기를 사랑하며 제대로 살 수 있는 큰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 


이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엄마가 이 세상에 있든 없든 너라는 존재의 위대한 정신을 꼭 스스로 발견하고 키워나가 세상에 커다란 쓰임이 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엄마를 통해 태어난 너에게 줘야 할, 주고 싶은 위대한 정신이며 이 정신으로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될 너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엄마의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이야. 


지금 엄마가 걱정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미숙한 글솜씨로 네게 전해주려는 '사유의 길'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해, 또는 사용하는 단어들이 낯설고 진부해서 네가 읽기를 중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히면 어쩌나 하는 것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엄마가 알려주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중요하고 네게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기에 엄마는 지금 엄마의 수준에서 최대한 정성껏 능력껏 써보려니 너 역시 이 글을 저한 시작점에서부터 너의 정신을 네게 집중시키는 힘을 최대한 발휘해 이해하고 해석하여 삶에서 증명해주길 바란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 알지? 이미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 

육체의 힘보다 정신의 힘이 더 세고 중요하다는 사실 말야. 육체가 어떤 질병에 시달리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애를 쓰지. 그런데 정신이 아프면 죽으려고 하거든. 


물론, 육체보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많은 삶을 통해 육체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간접경험들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리고 또 하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어. 우리가 너무 쉽게 뱉는 말 중에 '정신을 못차리겠네.', '정신차려!'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정신은 진리를 찾아 머무르기보다 이리저리 방황하길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야.


너는 살아있는 한 잠을 자든 깨어 있든 어떤 공간에 머물를 수밖에 없어. 

집에서 지하철로, 또 학교나 직장으로 이동하는 것, 집안에서도, 간혹 여행을 할 때도, 주말을 즐길 때도,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어떤 공간을 찾아 늘 이동하지. 작은 방안에서도 침대에 들어갔다가 책상앞에 앉았다가 때론 방바닥에 몸을 뉘여주기도 하는 등 항상 어떤 공간에 의지하게 돼. 


그런데 내 육체를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는 주체가 뭘까? 네 정신이야. 정신이 방황하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여기저기로 너를 움직여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시키지. 미술관에도, 연주회장도, 군중속으로 들어가기도, 자연을 찾아나서기도 하는거야. 이로써 너는 충분히 네 정신의 상태를 육체가 가는 길을 통해 가늠할 수 있고 네 육체는 정신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거야.


정신이 육체를 이동시켜 뭘 얻고자 하는 것일까? 

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렴. 푸른 초원에서 활짝 웃는 모습. 그 때 네 정신은 왜 널 그리로 이동시켰지? 그리고 무엇이 널 활짝 웃게 했지? 네 눈에 비친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떤 연유로 정신이 그 곳에 널 데려다놓았든 너는 초원을 보며, 초원의 향기를 맡으며 탁트인 곳의 맑은 공기를 느끼는 너의 모든 감각을 통해 정신은 환기되었을거야. 그 공간으로 인해 너는 활짝 웃는 것이니 정신이 널 이동시키는 이유는 결국 환기를 원해서인거지. 환기란 외부의 것을 진입시켜 내부의 일부를 빼내고 새롭게 섞는 상태를 의미하지? 즉, 정신이 환기를 원할 때 우리는 공간을 이동시키려 한단다.


자, 이쯤에서 너는 분명하게 이해했을거야. 

자신이 주말마다, 또는 더 자주 여기저기로 바람쐬러 가고 싶다는 것은 네 정신이 더 자주 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정신에서 빼내야 하거나 투입시켜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야. 한마디로 네 정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지. 그러한데도 정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육체만 여기저기 다니며 감정만 즐긴다면 계속 정신은 육체를 더 바쁘게 이동시킬거야.


반면, 굳이 육체에게 여기저기 다니라 명령하지 않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을 네 주변에서 찾아봐. 분명이 있어. 그들은 성향상 다니기를 싫어하는 경우일수도 있지만 굳이 환기시킬 것이 없거나 실컷 환기가 되어 자신의 정신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함을 느끼는 이들인거야. 이런 정신은 스스로 정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질서잡힌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방황하지 않고 자기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여기저기 육체를 옮겨가며 이런저런 감각들을 요구하지 않는거야. 강한 정신인지는 더 두고볼 일이지만 질서잡힌 정신인 것은 분명하지. 정신의 질서, 정신의 체계는 네 삶의 중요한 핵심을 담당하게 되니 항상 정신에 집중하렴.


이제 조금 더 디테일한 얘기로 들어가볼까? 

우리의 육체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정신과 연관된 것임을 알았으니 이제 정신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해. 자주 경험하겠지만 복잡한 지하철안에서 너는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있었던 경험이 있을거야. 또 이런 경험도 있겠지. 조용한 방안에 잘 정돈된 책상앞에서 책을 펼쳤지만 책과 내 눈사이 그 짧은 거리조차 네 정신은 제대로 책을 보지 못하고 어디로 도망쳐버린. 분명 책상이라는 공간, 눈앞에 펼쳐진 모든 감각은 책을 볼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도 말이야. 


이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정신은 외부적 공간과 너를 단절시킬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외부의 공간과는 무관하게 너를 외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정신은 이렇게 외부적으로 네게 주어진 공간과 너의 감각을 외면하거나 버려두고 자기가 갈 곳을 가버리는, 육체적 감각과 환경 모두를 맘대로 이탈하는 자유로운 습성이 있어. 결국,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에 언급했듯 방황하는 정신의 본성자체 때문인데 그 자유로운 녀석에게 늘 네가 진다는거야. 하지만,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정신을 한 곳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그 빠진 곳이 어디든간에) 어떤 환경에서도 이탈한 정신은 다시 네게로 데려올 수 있어. 다시 말해,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정신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무엇이 네 정신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풀어주기도 하는거지?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해. 왜냐면, 정신을 구속시켜야 할 그것이 정신의 이탈을 잡아준다면 정신이 네 신체에 명령하고 신체가 이동한 그 곳의 모든 감각으로 다시 정신을 환기시킬 수 있으니까. 자, 이미 눈치챘겠지만, 정신을 제자리로 앉혀주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정신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근원이 되겠지? 그것은 인간에겐 누구나 존재하는 의식(consciousness)이야. 


'정신차려!'라는 말, '정신을 차리게 명령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니겠니? 그 주체가 '의식'이야.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게 의식이라는 거지. 의식이 그걸 알아채는거야. '아. 정신이 또 엉뚱한 곳으로 갔군. 정신 데려와야겠다.'라고 의식하는 순간 너는 너에게 말할거야. '정신 차려야겠다'라고. 그런데 여기서 의식하지 않는 의식, 즉 '무의식'은 그냥 네가 평소에 하는대로 널 냅두게 돼. 게임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경우가 그런 경우야. 그냥 늘 하던대로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하는 거, '무의식적으로 그랬어'라는 말처럼. 하지만 의식은 늘 무의식과 싸우라고 정신에게 지시하지. '게임 그만하라고!'하면서. 의식이 이겨야겠니? 무의식이 이겨야겠니? 의식과 무의식의 밀당, 여기서 항상 의식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해. 단단한 정신을 소유하려면 말야.


이쯤에서, 슬슬 골치가 아프지? 아니면, 신나고 재밌나? 

잠시 쉬었다가 읽어도 괜찮아...


여하튼 엄마는 너의 삶을 위해 너의 몸이 어떻게 연쇄적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하게 말해줘야 할 이 작업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여기서 짧게 말하려거나 대충 넘어가지는 않을거야. 그러니 너도 네 정신을 잘 부여잡고 잘 따라와주길 바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나'와 '삶'.

삶은 나를 주체로 내가 만들어가는 길이야.

나를 모른 채 지식만 아는 것은 어쩌면 도구는 있지만 사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지

네가 앎과 삶을 제대로 연결지어 너의 모든 잠재된 능력을 꺼내쓸 수 있길 바래. 

이는 너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너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영향력의 범주에 귀한 존재로서

너를 나누는 선(善)이기에 엄마는 이 정신의 유산에 조금도 소홀하고 싶지 않단다.


자, 조금 쉬었으면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갈까?


그런데 이상한 게 또 있어.

의식이 '게임 그만하라고!'하며 명령하게 하는 또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결론짓기엔 뭔가 찜찜하지?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대충 찾다가 '없어'하고 뒤돌아서는 느낌? 그것은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네 감정이 편해지길 바라는 치사한 변명? 우리는 그 욕망의 반대편,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쾌락의 욕망쪽으로 좀 더 가보자. 


자, 의식이 알아채게끔 지시하는 그 무언가는 바로 잠재의식이야. 

쉽게 말해서, 잠자고 있는 의식이지. 잠재의식은 늘 자고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거나 네가 알 수가 없어. 좀 전 언급했던 '의식'은 너의 행동으로 표현이 돼. '아, 정신차려야지!'와 같이 네가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의식은 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잠재의식은 계속 잠자느라 그러지 않아. 하지만, 자면서도 깨어있는 요상한 잠재의식은 너의 의식이 일을 하지 않을 때, 게으를 때 느닷없이 의식에게 출동을 명령해. 이런 잠재의식이 가진 힘이 '잠재력'이야. 잠재력을 키우려면 잠재의식에 대해서도 조금 알 필요가 있겠지?


잠재의식은 한마디로 바보

무조건 네가 시키는대로 한다는거지. 네가 '계속 게임해도 돼', '나는 게임밖에 못해'라고 스스로에게 한 명령을 결코 거르거나 판단하거나 축소시키거나 반박하지 않고 '아! 나의 주인은 계속 게임해도 되는, 게임밖에 모르는구나'라고 받아들여. 반면,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네가 시키면 '아! 우리 주인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명을 받고 그 방향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그래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정신을 움직이는 뿌리가 잠재의식이고 잠재의식을 키우는, 즉, 먹이를 주는 존재가 처음에 말했던 너의 정신이란 말이지. 정신의 힘이 곧 잠재의식의 힘이라는 사실이야. 바른 정신이든 그릇된 정신이든 이는 또 다른 논제니까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까지 말했던 논리에 따라 정신의 힘이 곧 잠재의식, 잠재력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


다시 정신에 대한 대화로 돌아가보자. 


정신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어. 자연은 모든 곳에 '공간'이라는 것을 마련해두고 무언가로 채워넣기 때문이야. 채워질 수 없다면 우리는 공간이라 부르지 않아. 우주라는 공간안에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이, 또 그 안에 다시 작은 공간들이 구성되어 있고 모든 것에는 그에 합당한 무언가가 채워져 있지. 그 채워진 것들의 종류나 범위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고. 


네 정신도 무언가로 채워져 있어.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정신없어'라는 것은 '채워져야 할 것이 채워지지 않은' 또는 '채워진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말하지 비어있다는 의미가 아니야. 


그럼 정신을 채우고 있는 것은 뭘까? 

우선,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이야. 

'이성'의 수준정도나 밀도에 따라 '사고'하는 수준이 달라지지.

그리고 이러한 '이성'을 구성하는 몸체가 바로 관념이야. 좀 쉽게 말하자면 관성화된 생각덩어리라는 거야.

이 덩어리들이 쪼개어지거나 섞여서 나름의 질서가 되어 자리잡힌 것이 '이성'이고.

이를 우리가 흔한 말로 '체계적 사고', '이성적 사고'라고 부르기도 해. 


지금 여기서는 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려고 해. 원석의 덩어리가 어떠냐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발견될 수도, 아니면 그냥 진흙덩어리일수도 있잖아. 관념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의 이성의 수준정도를 알 수 있지. 내 정신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라는 것이 궁금하면 네가 어떤 생각들로 지내왔는지를 연역적으로 거슬러 가보면 알 수 있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원인과 결과, 즉, 인과로 이뤄져 있으니까. 하나씩 거슬러 연역하다 보면 네 정신을 채운 관념의 속성들이 체계적으로 드러날거야. 마치 형사가 탐문수사하듯. 


우선 '관념'은 어떻게 자리잡힌 걸까? 

바로, 네가 겪은 실재적인 경험의 행동이 원인이 되고 그것들이 쌓여 만들어진거야. 우리는 이것을 먼저 취한 행동, '선취행동'이라고 해. 반복된 선취행동이 서서히 굳어지면서 네게 관념으로 자리잡혔고 이 관념이 굳어지고 커지면서 너의 정신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거야.


'난 뭘 해도 안되는 사람이야'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연역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계속된 실패의 경험이 드러날거야. 아까 말했듯이 '난 뭘 해도 안돼'로 관념화된 사람은 잠재의식이 그대로 '내 주인은 뭘 해도 안되는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힘을 키우고 있는거지. 


인간은 본성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어. 

성장이란 '지금'보다 '나중'이 더 나은 것이고 '더 나은 자신'이라는 결과를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변화'가 작용원인이 되어야 해. 자, 여기서부터 조금 더 집중해서 들어줘야 해. 결국, '변화'된 결과를 얻으려면 지금까지 지녀온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는 원인이 필요하겠지? 

즉, 

'더 나은 나'로의 성장을 원하는 사람은 '기존관념'을 잠시 멈추거나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람이지.


지금까지의 거론으로 

정신이 어떻게 연동되는지, 

그리고 정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기본적인 것들을 알았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뭔가를 원한다면, 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변화를 위해 해야 할 첫번째는 네가 경험한 선취행동으로 만들어진 선취관념들을 무시해 보는 거야관념대로 행동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행동을 유발한다면 이제부터는 관념을 무시한, 의식적인 행동을 해보자는 것이지. 그러면, 잠재의식은 의식적 행동의 경험 역시 그대로 흡수해서 저장해. 잠재의식에 새로운 먹이를 줘서 잠재력을 키운거지. 그 때 너는 아마 이렇게 말하게 될거야. '아! 나도 할 수 있구나!', '아!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아!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었구나!'. 뭔가 깨달은 듯한 느낌? 아주 감각적으로 너는 느끼게 될거야. 이 감각 역시 네 세포들이 기억해서 잠재의식이 받아들여. '우리 주인은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구나'라고. 


그런데 여기서 네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어. 반드시 이 점을 기억해주길 바래. 


선취행동으로 만들어진 '관념대로 하지 않는 행동'은 많이 불편해. 안했던 행동이니까 낯설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다'라고 착각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했으면 해. 기어다니던 너는 걸었어. 수없이 넘어졌지만 인간의 본성이 걷는 것이니까 넌 본성대로 걸었던거야. '걷는' 낯선 행위의 반복은 곧 기어다니던 아가의 본성에 있는 '걷고자 하는 욕망'의 힘으로 아가를 걷게 한거지. 


이와 같이 인간은 본성대로, 그리고 욕구대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이미 DNA에 담겨 있어. 네가 변화해서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 역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지? 이미 너의 DNA에 담겨 있단다. 이미 가진 것인데 사용하지 못하면 아깝잖아, 손해잖아. 이를 끄집어낼 수 있는 힘은 이미 너의 정신에 담겨 있어. 단, '낯설다'와 '어렵다'를 구분하고 '낯선'행동을 '반복'해야 성장할 수 있어. 낯선 것의 경험이 네게 그럴싸한 느낌을 줬다면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길 바래.


선취행동의 반복이 관념이라는 명제를 조금 더 쉽게 말해줄께. 

행동이 반복되면 반복된만큼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편해지겠지? 편하면 계속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습관이 되고 이쯤되면 이 행동을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하지. 즉, 처음엔 의식적으로 했던 행동들이 나중에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체화되고 드러나는거야. 행동->정신->감각은 이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정신과 행동, 의식, 감각.

이들이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좀 더 안정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 감각에 대한 얘기를 조금 보탤거야. 우선, 감각에 있어 도달하고자 하는 명제를 먼저 말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어. 바로 감각은 기억의 근원이라는 사실이야. 먼저 결론부터 말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각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야. 감각은 그저 누구나 비슷하게 지니고 있고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지만 감각의 기능을 이해하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거야. 


앞서 말했던 '아!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낯선 경험을 통해 느낀 그 느낌! 성취감일수도 보람일수도 신기함일수도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이 느낌. 이것이 감각이지? 물론 감각에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이 있지만 단순한 기본감각 외에 뭔가 느껴지는 또 다른 감각. 이것을 감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감정'은 '감각을 느끼는 정서상태(각+서)'이니까 보다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자 하는 지금은 감각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것 같아.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이 감각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가에 따라 기억의 우선순위가 정해져. 

잠깐만 네 기억을 한 번 더듬어보렴.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몇가지가 떠오를거야. 맛있었던 순서대로. 또 10명에게 물어보면 다 다른 대답이 나올거야. 각자 느낀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지. 누구는 김치찌개일 수 있지만 누구는 아닐거야. 이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지. 결코 기억은 이성적이거나 객관적이거나 정량적이지 않다는 것을. 김치찌개가 가장 맛있었다고 말한 누구는 그것을 언제 누구랑 어디서 먹었는지, 지금껏 먹어왔던 음식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그리고 기타 수많은 변수들을 다 이기고 김치찌개가 1등이 된거야. 거기에는 분명 미각을 뛰어넘은 복합적인 요소들을 총망라한 그 어떤 감각이 '아! 맛있어!'라고 가장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거든. 그래서, 기억은 감각의 강도에 따른 우선순위로 매겨진다는 것을 우린 이해할 수 있어. 만약 내일, 그 누구가 연인과 엄청난 행복감에 빠져 스파게티를 먹고 그 감각이 최고의 수준까지 도달한다면 이제 스파게티가 1등, 김치찌개가 2등이 되는거지. 다시 말하지만, 결코 기억은 이성적이지 않아. 감각적인 거지. 그래서 기억에 완전한 신뢰를 주면 안돼.


결국, 너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은 네 과거의 기억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어. 즉, 새로운 감각은 기억의 변화를 통해 선취행동이 준 관념도 변화시킬 수 있고 관념이 변한다는 것은 정신이 왕성하게 활동하게끔 네가 네 정신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거야. 즉, 안하던 새로운 행동을 하면서 네 감각을 더 민감하게 키우는 것은 너의 정신에 아주 중요한 기능을 보태는 것이고 질서잡힌 정신을 위해서도 아주 훌륭한 훈련이 되겠지.


그리고, 감각을 키워낸다는 것은 단지 정신의 기능을 위해서만은 아니야. 

더 큰 것을 불러와. 

좀 전 언급한대로 미각을 비롯한 5가지의 감각을 초월한 감각으로 우리 기억의 우선순위가 매겨지고 그 기억들이 선취관념으로 형성되는데 새로운 자극, 즉, 안하던 행동이 주는 감각으로서 너는 초월된 감각을 다시 경험하게 되고 이는 너의 정신을 움직여 너를 성장시키지. 


여기까지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초월된 감각'에 대해 잠깐 언급하려 해. 

감각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감각은 유동적이라는 의미가 되겠지? 또한, 우리는 먼지가 늘 피부에 닿는데도 피부로 느끼지 못해. 감각이란 것이 실재된 모든 것을 느낀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리고 또, '왠지 이럴 줄 알았어', '그런 느낌이 들더라'와 같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느낌이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는 자극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이렇게 감각은 사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개개인이 느끼는 정도가 다르며,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모를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이 가운데 '왠지 이럴 줄 알았어.'와 같은 감각은 도대체 어디서 언제 어떻게 내게 오는 걸까? 엄마는 이것을 '영혼의 자극'이라고 표현해. 


인간은 신체와 정신 외에 영혼을 지닌 생명체야. 

이를 증명해나가는 과정은 너무나 장문이 될 우려가 있어 생략하려 하는데 더 솔직하게는 아직 이를 증명할 정도로 엄마의 사유수준이 미약하기도 하지만 사물의 본성을 다룬 루크레티우스나 이성적 탐구를 중요시 언급한 데카르트, 초절주의의 대가 에머슨과 그가 추앙한 스웨덴보그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 논리적으로 증명해냈으며 엄마의 지성이 이들을 반박할 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이들이 알려준 논리대로 영혼의 존재에 확신을 가지고 었어. 그러니, 이들의 책을 통해 너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네게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네게 아직 영혼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불투명할 수 있을 것을 감안하여 네게 확신을 강요하기보다는 일단 영혼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대화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겠다. 


자,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육체와 정신,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혼이 네게 주는 자극에 민감하기 위해 우리는 안하던 새로운 행동들을 자주 경험하면서 감각을 키워내야 해. 왜냐면, 우주는 '진리'라는 거대한 이치의 힘을 활용해 이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거든. 그래서 영혼은 결코 너를 해로운 방향으로 이끌지 않아. 물론, 가끔 사악한 영혼들이 등장하곤 하지. 이러한 영혼은 우주가 균형을 잡기 위해 일정한 양만큼 등장시킨 것들인데 이 사악한 영혼은 사악한 감각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그 사악함을 느낀 누군가는 그것을 피하거나 또는 흡수하거나 해서 자신의 정신에 그것을 담지. 앞서 논했듯이 선과 악을 논하는 것은 지금 글의 주제와는 별개이니 지금은 영혼이 있다는 것에, 영혼이 주는 자극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자. 이리 말했음에도 한가지, 선한 것이 강하고 오래가고 힘이 있는 것이라는 명제만큼은 기억하길 바란다. 이것이 우주의 이치니까.


영혼의 자극, 엄마는 주로 '섬광같은 자극'이라 표현하는데 이 자극은 정말 민감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어. 

이를 '직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그런거야. 

어떤 강렬한 자극이 자신에게 온 것을 말하지. 

이 직관은 너무나 강렬해서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 뛰쳐나간 것처럼 바로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힘을 지녀.


이렇게 강렬한 영혼의 자극이 네게 스스로, 자주 찾아오지만 너의 정신의 질서가 잡혀있지 않다면 이를 감지해내지 못하거나 무시하게 돼. 직관은 정신의 질서잡힌 체계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어야 딱! 그 질서 속 틈새에 강렬하게 꽂히게 되거든. 그래서, 체계없는 정신이나 관념덩어리로만 자리한 정신은 영혼이 아무리 자극해도 감지할 수 없어. 만약 감지되더라도 그것은 '직관'이 아니라 그냥 야릇하고 엉뚱한 기분처럼 느껴질 뿐이야.


직관은 앞서 말했듯 행동에 강력한 힘을 주는 느낌이야. 그러니 당연히 강력의 정도에 따라 행동의 강도도 강할 수밖에 없지. 질서잡힌 정신이 느낀 영혼의 자극은 강력한 행동을 통해 강력한 '세상의 질서에 부응한' 결과를 창출하고 그렇지 않은 정신이 느낀 영혼의 자극 역시 강력한 행동을 통해 이에 따른 강력한 결과, 말하자면 '세상의 질서에 어긋난' 그것을 창출해. 이 둘의 결과는 아주 상반되겠지. 


감각과 정신의 연결은 현실에 실재화된 결과로 드러나. 

이러한 강렬한 자극, 직관으로 사람은 어느날 느닷없이 번뜩! 아이디어가 솟구치고 

우리는 그것을 '창의적 발상'이라고 하며 

이 발상이 현실화되면 '창조'되었다 하며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우리는 '창발'이라고 해. 

질서잡힌 정신은 선한 창발을, 질서없는 정신은 악한 창발을 창출하지.


지금까지 신체-정신-행동-의식-감각의 순환적인 연결고리에 대해 언급했는데 순환은 선순환이 있고 악순환이 있어. 어떤 한 곳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면 악순환이 되는 것이기에 언급한 모든 내용들 가운데 어느 것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으니 무엇 하나 소홀해선 안될거야. 하지만 핵심은 이들의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이해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확신으로 가.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 너는 '의.식.적.'으로 '행.동.'을 하면 돼. 무엇을? '안하던 짓'을!


자, 정리해보자!


감각을 키우고 정신의 질서를 바로 잡고 이를 위해 안하던 행동으로 선취관념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새로운 관념에 대한 감각이 잠재의식에 힘이 되는 먹이를 넣어주고 

잠재의식은 다시 정신에게 명령하고 이 순환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서

정신은 너를 불편한 곳이지만 낯선 경험으로 안내하며 

이는 초월적 감각을 키워내며 너를 창조하는 인간이 되게 하지. 

바로 지금 이 시대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거야. 


창조가 강력하면 혁명이 되고 

혁명의 결과가 넓게 보편화되면 문화가 되고 

문화는 사회의 수준을 결정하며 

높은 사회적 수준에서 사는 개인은 당연히 

수준높은 성숙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성숙한 개인은 더 성숙한 사회적 문화를 이끌지.

이런 관점에서 

네가 하는 단순한 '안하던 의식적인 행동'은 미약하지만 창대한 것으로 발현되는거야. 


이렇게 자신의 몸을 알고 운용하는 사람이 어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니? 

어찌 이타적이지 않을 수 있겠니? 

어찌 인간적이지 않을 수 있겠니? 

어찌 유발하라리가 말한 '무용인간'일 수 있겠니? 

어찌 쓸모없는 인생을 살겠니?


그러니, 오늘 네가 읽은, 미숙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쓴 이 글을 읽고 또 읽어 일단 네 머리에서부터 먼저 이해하길 바란다. 이해하면 소유할 수 있고 소유하면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된다면 앞으로 너의 모든 판단이 옳고 효율적일 것임을 믿길 바란다.


이 글에 담긴 것들에 대한 이해가 네 삶에 체화되길 바라는 것이 엄마가 네게 주고 싶은 1st 유산이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너를 알아가고 너를 탐구하는 너의 정신의 진동을 느끼는 

엄마는..

아주 설레이고 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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