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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14. 2022

부(富), 그 사유와 실천10

정신의 임신과 출산

* 본글 '부, 그 사유와 실천'은 현재 '글로벌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담의 컬럼입니다.


올봄에 빈 화분에 이것저것 씨를 잔뜩 뿌려봤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내게 식물과의 관계는 부끄럽지만 그저 아이들 키우며 심어본 상추, 고추 등 작은 텃밭 가꾸기 정도에 불과하고 선물받은 화분의 꽃들은 마냥 키우다 죽이기가 반복된, 초보 중에 초보이다. 그런데 무슨 마음에서인지 올 봄엔 이것저것 씨를 심어봤는데 신기하게 때가 되니 싹이 나고 때가 되니 꽃이 핀다. 채송화 씨를 심은 곳엔 채송화가, 나팔꽃 씨를 심은 곳엔 나팔꽃이, 설악초 씨를 심은 곳엔 설악초가 핀다. 


당연한 결과인데도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수많은 씨를 뿌렸는데 씨의 숫자만큼 싹이 나지 않았고 싹이 난 만큼 꽃이 피지도 않았다. 뿌릿 씨앗수보다 더 싹이 나는 경우는 결코 없었으며 씨->씨앗->잎->꽃의 수는 단계가 진행될수록 적어졌다. 씨앗에서 생을 다한 녀석들, 싹을 틔우다 마는 녀석들, 꽃까지 피우 녀석들... 이 중에 과연 어떤 녀석이 꽃을 떨구며 자기 씨를 뿌려줄까?.


여하튼 옛말 그대로였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나고... 일단 땅에 심어지니 자기를 세상에 드러낸다. 가만 가만.... 잠시 생각해보니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그랬다. 작은 씨앗이 내 뱃속에 머물머 심장이 뛰고 팔다리가 생기면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이는 이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일궈가는 세상의 창조물로서 기능과 역할을 다하겠지.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 무언가를 심으면 반드시 심은 그것이 난다. 인간도, 꽃도, 세상 모든 것이 심은 그것을 세상에 드러낸다. 


내 정신에는 무엇이 심겨 있을까?


나 역시 내 정신에 심어놓은 그것으로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것이겠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어느 지나간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걱정을 심으면 걱정이 불안을 심으면 불안이, 안 좋은 예감을 심으면 그 예감대로 일이 터지는 경우를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왜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했는지 이 말의 깊은 의미는 내 정신에 ‘된다’는 생각을 심으면 ‘되기’때문일 것이다. 내 정신에는 무엇이 심겨 있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심었을까?’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나몰라라 식의 회피와 ‘이대로 살다 죽지 뭐’와 같은 푸념, 넋두리, 포기가 심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된다는 확신과 용기와 희망, 기대도 심겨져 있긴 하겠지? 무엇을 심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다시 심으면 된다. 걱정과 불안을 심으면 그것이 창조되고 꿈과 비전을 심으면 마치 꽃씨처럼 여러 개 중에 반드시 하나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창조된다.


‘관념의 물질화’란 이런 것이다. 

내가 나의 정신에 심은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더더 깊게 의식의 중심까지 심어놓으면 그 씨앗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나오려 한다.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관념의 씨앗을 심는 것!!! 그리고 지금부터 언급할 3가지 정도다.


첫째, 믿어야 한다.

채송화를 심어놓고 수국이 피길 기대하지 않듯이 채송화는 채송화를, 성경에 등장한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는 겨자를 세상에 창조한다. 사람이 임신을 하면 사람을, 개가 임신을 하면 강아지를, 말은 망아지를, 소는 송아지를 낳는다. 일단 심으면 심은 그것이 창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내 정신에 ‘원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씨앗을 심으면 된다. 채송화꽃을 상상하며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씨앗을 심듯이 말이다. ‘지금의 나(실재, 채송화 씨앗)’와 ‘원하는 나(미래, 채송화 꽃)’의 차이를 잇는 다리는 ‘믿음’이다. 심고자 하는 관념이 반드시 현실화됨을 믿.어.야. 한다.


둘째, 잘 가꿔야 한다.

나의 작은 경험으로 씨을 뿌리고는 매일 물을 주고 매일 들여다보고 매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흙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쳐다보며 묻기도 했다. ‘언제 나오니?’라고.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그랬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배를 만지며 수많은 대화를 하고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며 아이의 물건들을 하나둘 장만하며 기다렸었다. 내 정신에 심은 씨앗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될까?’ ‘안될 것 같은데’ ‘안되면 어쩌지’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자꾸만 의심을 한다. 심지어 씨앗이 잘 심어졌나? 하며 자꾸만 흙을 파헤쳐 확인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물을 주고 싹이 나면 기뻐해주고 싹이 제대로 자라도록 진딧물도 없애주고 그늘도 만들어주고 날이 좋을 땐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옮겨도 주고...그렇게 믿고 가꾸고 기다리면 될 것을.


결과를 믿고, 씨앗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씨앗은 스스로 힘을 지니고 있고 그 힘으로 싹에서 꽃까지 긴 시간을 이겨낼 것을 믿어야 한다. 내 정신에 심은 씨앗 역시 ‘믿음’이라는 다리를 건너며 ‘의식’의 중심으로 옮겨간다. 의식의 중심에 옮겨진 씨앗은 잠재의식의 속성대로 심어진 대로 세상에 드러난다. 내 힘은 중요치 않다. 그저 씨앗은 스스로의 자생력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무의식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괴물과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순간에 인간의 정신이 최고 수준으로 기능하는 뜻밖의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베르나르베르베르상상력사전 발췌). 인생이라는 역사는 뜻밖에 벌어진 일들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니콜라스나심탈레브의 ’블랙스완‘ 이론으로도 충분히 검증됐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로 인해 인생이 많이 바뀌었다. 이뤄질 것 같지 않은 무형의 관념이 내 의식의 중앙에 심겨 있으면 그것은 그 자체의 힘으로 반드시 세상에 뜻.밖.의. 시간에 탄생된다. 


셋째, 토양이 중요하다.

같은 씨앗을 두 개의 화분에 뿌렸는데 두 화분의 그것들이 자라는 속도와 질이 다르다. 토양이 문제다. 환경이 같다면 그 환경의 중심이 되는 기본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관념의 기본토양은 바로 나다. ’나‘라는 토양을 가꾸는 것이 가장 우선이고 기본이다. 씨앗이 자라길 바라며 물을 줄 때 내 정신에도 힘을 주자. 내 마음도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고 내 다리도 한 번 더 움직여 ’나‘라는 토양을 질좋게 유지시켜야 한다.


정신의 임신. 일단 의식에 임신시키면 반드시 싹이 난다. 과거에 발목 잡혀 정신을 온통 어지럽히지 말고 미래로 시선을 옮겨 '원하는 나'를 의식에 임신시키자! ’우주에서 단 한번도 시험해본 적이 없는 고유한 유전적 배열을 가진(이일화교수의 생물학산책에서 발췌)‘ 나이기에 분명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유일무이한 존재이기에 지금 정신에 심어놓은 ’경험하지 못한 원하는 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무장된 사람은 ’정신적, 경제적, 정서적, 관계적,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부자‘가 된다.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7533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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