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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14. 2022

부(富), 그 사유와 실천18

하루를 ‘0(zero)’으로!

* 본 글 '부, 그 사유와 실천'은 현재 '글로벌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담의 컬럼입니다.


몇 년전부터 나는 책 속에 푹, 정말 푹 빠져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읽기가 아닌, ‘지독한 책읽기’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실 ‘명확한 계기가 있었나?’ 싶지만 굳이 몇 가지를 말해보자면.


첫째,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내 미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사까지 공부했고 사회적으로 불리는 이름도 나름 괜찮고(대부분 나를 교수님,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능력면에서도 꽤 쓸만하고 아들 딸 충분히 멋지게 교육시키며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나의 미래는 준비되었나?’라는 질문에 내 고개는 갸우뚱했다.


둘째, 내가 바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몰랐었다. 경영학박사이면서 국가와 기업의 관계, 기업과 개인의 관계를 그저 책으로만 이해했고 딱히 이 거대한 세상의 틀 안에서 그저 ‘이렇게 살면 되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모르면 안 되었고 ‘전체의 부’를 위해 ‘개인의 부’를 외면해서도 안 되었다. 나는 그저 열심히만 살았던 똑똑한 바보였던 것이다.


셋째, 인생에 대한 성찰이라고 하면 좀 거창하려나 모르겠지만 내 나이 50이 되면서 그간 내가 ‘세월’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뿌려온 ‘짓’들을 점검해봐야겠다는 강렬한 이끌림때문이다. 거둬낼 건 거둬내고 지켜야 할 건 지켜내어 100세 인생, 남은 50년은 제대로 된 것들을 내 ‘세월의 바구니’에 담고 싶어졌다.


나의 지독한 책읽기는 새벽 4시 시작되었고 짧게는 2시간, 어떤 날은 하루종일 책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24시간 가운데 생물학적(ex, 잠)으로, 사회적(ex. 강의)인 기능을 하느라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우선순위가 책이었다. 그것도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미치 호로위츠’가 '윤리적 가치', '삶의 성공'을 거론하며 제발 이렇게 좀 하라고 강조하는 대목에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도덕경부터 소로우의 월든, 아우렐리우스, 빅터프랭클, 나폴레온힐을 읽고 9개월간 미친듯이 꼬박 열정’을 쏟으라고 했다. ‘어? 다 내가 읽은 책들이네? 나 잘하고 있네!’ 게다가 나는 애덤스미스, 세네카, 몽테뉴, 소크라테스, 발타자르그라시안, 쇼펜하우어, 귀곡자, 공자, 노자의 인간사상부터 찰스해낼, 린그라본, 그렉브레이든, 제인로버츠, 톨스토이, 앤서니로빈슨, 월레스와틀스, 제임스알랜, 오리슨스웨트마든등의 성공저술가, 리차드파인만, 유발하라리, 니콜라스나심탈레브, 말콤글래드웰, 조던피터슨 등의 학자, 톨스토이, 올더스헉슬리, 알랭드보통, 파올료코엘뇨, 오그만디노 등의 영성소설가, 뤼디거달케, 데이빗갓맨, 네빌고다드를 비롯한 영성학자 등등 다 거론하지 못할 정도의 인물들과 3년 이상 지속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지.독.한. 그리고 체.계.적.인, 읽.어.야..할.책. 우선 읽기에 집중한 몇 년이 지나 내가 알게 된 것을 한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면 ’성공이란 내 하루를 0으로 만드는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자야 할 시간과 깨어있어야 할 시간

흡수(육체와 정신, 영혼의 먹거리)할 것과 배출해야 할 것들의 양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의 경계

똑바로 봐야 할 곳과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시선의 수위

표현(말과 행동)해야 할 것과 침묵해야 할 사고의 단계


이런 상반된 것들을 균형있게 활용, 하루총량을 각각 +,-로 계산하여 0으로 만드는 게임이다. 


물론, 이들을 ’균형‘있게 활용하는 것도, 0으로 만드는 것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일만 죽도록 한 날도, 또 어떤 날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을 정하고 해내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진정한 성공으로 몰고 가는 길임을 깨닫고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 ’하루‘를 계산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루하루 나의 모든 에너지가 흡수되고 배출되도록 생활하고 잠들기 전 ’0‘이 됨을 나름 인정하는 그 ’성공한 하루‘가 주는 느낌, 그 순간 그 느낌에 사로잡혀 그 경지의 맛을 봤다고 하면 과언일까? 여하튼 이 게임은 황홀하고 경이롭고 나에 대한 자신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하루를 0으로‘. 물론, 산술적 숫자로는 계산은 불가능하다. 스캇펙 박사의 말처럼 ’비본능적인 것으로 비본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 구체화되지 않는 비정량적인 숫자로 정량화된 사고체계를 잡고 그것으로 나의 부를 축적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비본능적인,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나의 사고의 틀로 정립하여 정량화시키고 물질화시킬 수 있는 내재된 능력,지난 수년간 지독한 책읽기가 내게 준 거대한 선물이다.


이를 통해 나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습관은 반복과 훈련으로 이뤄진다.‘, ’인간의 본성은 가치실현이다‘, ’책에 길이 있다.‘ 등의 진부한 글귀 속에 담긴 깊은 속내를 이해하게 됐다고 하면 건방질까? 이왕 건방떤 김에 조금 더 건방을 부려보면,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실현해내지 못하는 그것들에 있어 ’나는 해볼까?(도전, 의심)‘에서 ’나라도 해야지(각오, 결심)‘, ’나는 증명해 내야 한다(결단, 의무)‘고 나는 나를 몰아갔고 심지어 지금은 여기에 ’책임‘이라는 단어도 얹혀버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험난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감정적이었고 급했으며 무지했던 나였기에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단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가는 건 비겁하고 비굴하고 억울하다. 그래서 또 반복하며 전진한다. 이 시간은 분명 나에게 더 큰 기적을 만들어낼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내 인생의 목표와 내 하루 행동을 연결시켜주는 새벽독서‘에 나를 앉혀버린다.


하루를 0으로 만들어 오로지 내가 태어난 그 이유를 실현하고 가는 삶. 내 삶의 프로다운, 아름다운 길이지 않은가? 이 먼 길을 가야 해서인지 오늘도 할 일이 아주 많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해내야 할 양은 계속 넘친다. ’어떤 업무를 끝마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업무량이 계속 늘어간다‘는 파킨슨(Parkinson)의 법칙은 어김없이 나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5337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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