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너와 나가 될 때,
우지직
깨지는 소리가
세상을 울린다
우리는 적어지고
너와 내가 많아지는 탓에
하루 하루가 왁자지껄하다
균열이 고요를 깨는 일이라면
난 세상이 고즈넉하기를 바란다
인연으로 기워 낸 내가
그대들 없이 어찌 살아가랴
벽을 허물어야
그대가 들어선다
벽을 허물어야
내가 들어선다
벽은 허물어도
소리가 나지 않아
무성의 붕괴를 꿈꾼다
인간(人間)은 사람의 사이(間)를 품는다는 것,
사람은 틈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틈이 사납게 들썩인다
게걸스러운 아가리를 벌리려고 하는
저 놈의 숨통을 끊자
인간인(人間人)은 무너지고
인인(人人)이 도래한다
틈 틈 인간은 죽고
관계 관계 인간이 도래한다
호모 렐라티오 렐라티오,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이름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개인이 존중받고 있는 사회입니다. 완벽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이 대화를 거듭하며 서로를 보다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 세류에선 개인의 정체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를 나이도록 만드는 것을 찾고 지키죠. 나의 본질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는 말이 이제는 당연한 말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을 고수하는 것은 때로는 괴로운 일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꿈, 취미,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할 적에 선뜻 말하기 어려운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누군가는 자신을 흥분시켰던 일을 떠벌리고, 자신에겐 거창한 꿈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 사람을 보며 불쾌함을 느끼더라도, 그 불쾌함은 나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비롯된 불쾌함보단 덜합니다. 나를 나이도록 하는 것을 모른다면, 나의 존재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염치없지만 제가 시를 쓰게 된 계기에 대해 짧게 말해보려고 합니다. 이전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책을 아예 읽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책도 안 읽는 제가 앞으로 시를 쓸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모의고사 공부를 하기 위해 문학 지문을 풀고 있던 날은 제겐 기적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문학 문제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갑갑하여 여백의 공간을 이용하여 낙서를 끄적거렸습니다. 낙서하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내가 시를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에 피가 나도록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며 문제를 풀어라."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은 탓입니다. 내심 기대하며 생애 첫 시를 써봤습니다.
<가시의 여인>
그대라는 덤불 위에
난 살며시 내려 앉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시 위에
난 가벼이 내려 앉는다.
자그마한 그대의 가시들은
무기력한 내 살을 뚫고
쉬이 속삭인다
난 비록 가시이나
가시이고 싶지 않습니다
난 비록 그댈 위할 수는 없으나
그댈 위할 존재이고 싶습니다
장미의 가시가 좋은 이유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미꽃을 위해 가시 따위야
내 가는 길에 널리 뿌려주시옵소서
무슨 생각으로 이 시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봤을 뿐입니다. 당시의 전 이 시에 만족했습니다. 지나치게 만족한 나머지, 담임 선생님께 자랑하러 교무실까지 갔습니다. 자상하신 담임 선생님께선 제 시를 보시곤, 잘 썼으니 한 번 저희 반 친구들에게 발표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돌연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까진 생각지 못했습니다. 과연 아이들이 안 웃고 들어줄지 걱정되기도 했고, 제 시가 남들에게 보여 줄 정도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선생님께서 한참을 고민하는 제 모습을 보시다가, "이럴 땐 발표하는 거야" 말씀하시곤 교실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날 조례 시간, 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시를 발표하게 됩니다. 시를 인쇄해 온 종이를 보며, 제 시를 또박또박 낭독했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박수를 쳐줬습니다만, 그것이 감탄인지 조롱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좌우지간, 저의 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결과입니다. 이후에 국어 담당 선생님께 상투적이고, 저만의 단어가 없고, 쓸데없는 수식어구가 많다며 비난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존심이 제대로 긁혔습니다. 더 나은 시를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 까닭에 공부가 막힐 적마다 시를 끄적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 블로그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네요.
이 일화의 요지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연히 하다 알게 되는 것이고, 나의 존재성은 제가 맺고 끊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시 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연히 시를 써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시를 꾸준히 쓰게 된 것은 '문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던 것', '여백에 낙서를 한 것'. '시를 써보면 어떨지 생각해 본 것', '직접 시를 써본 것', '담임 선생님께 자랑한 것', '담임 선생님이 제게 발표를 시킨 것', '국어 선생님의 신랄한 비판'처럼 많은 것들이 관계를 맺고, 또 그들이 저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이를 '인연'이라고 말하죠. 신기한 우연이자 행운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연은 어떠신가요.
제 정체성을 고집할 때, 그 순간이 가장 부질없는 시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원래 저인 것은 없더군요. 살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 원래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생각을 연장하면, 앞으로 제가 무엇이 되든 잘못된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에 갇히지 않은 채로 세상의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나와 너로 갈라서지 않고, 서로에게 삼투되는 '우리'로 살아보려 합니다. 이 앎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실천은 앎에서 비롯되지 않고, 앎은 실천에서 비롯되는 세상이기에 이 글을 쓰는 것처럼 그냥 행해봅니다.
그저께부터 최진석 작가의 <건너가는 자>를 읽고 있습니다. 불교의 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탁월함으로 나아갈지 말해주는 훌륭한 책입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불교에 대한 상식이 뒤틀리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낡아버린 뇌가 그동안 쌓였던 먼지를 털어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책에 대한 제 생각을 요약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시를 창작해 봤습니다. 저만의 것이 결합했다면 다행이지만, 최진석 작가님, 붓다, 그리고 제가 이 시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모든 존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혹여나 글에서 거만함과 오만함이 느껴지신다면, 심심한 죄송함을 표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나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여담으로 이 분의 저서인 <탁월한 사유의 시선> 도 추천해 드립니다. 인문학에 대해 몰랐던 저도 술술 읽을 수 있던 책이랍니다. 최진석 작가님은 탁월함의 인문학자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탁월함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글 하단에 도서 구매처를 적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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