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시부모님을 대함에 있어 결심한 것이 있다. 며느리도 자식이니 우리 부모님처럼 잘해드리자. 대신에 우리 부모님께 할 수 없는 건 하지 말자. 평생을 낳고 길러주신 내 부모님께 할 수 없는걸 시부모님께 한다는건 진심이 아닌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 부모님께도 너무 죄송한 일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부모님께 대단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꽤 잘한다. 맛있는 걸 먹으면 항상 부모님이 생각나고, 좋은 데에 가도 항상 부모님이 생각나서 다음에 꼭 함께 먹거나, 함께 가려고 한다. 편리한 가전제품(물걸레 청소기, 세탁건조기, 무선청소기 등)을 사용해 보면 힘들게 일하는 엄마가 생각나서 꼭 사드리려고 한다[적어놓고 보니 이게 무슨 효도인가 싶기도 한데, 아무튼 내 주변인들은 나를 효녀라고 하긴 한다].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 그런 건 아니다. 이제 부모님이 나와 함께 계실 날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다 해드리고 싶다. 대신에 내가 잘 못하는 게 있는데 과장스러운 애교와 아양(?) 같은 것이다.
우리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백 프로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시부모님도 최대한 이렇게 대하려 결심했고 노력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종합검진을 받아보지 않은 남편의 어머니 종합 검진을 시켜 드리고, 태풍이 오는 날은 무릎이 아픈 남편 어머니를 대신해 1시간을 달려가 베란다 창문에 테이핑 작업을 해드렸다[남편은 시간이 없었고, 시가는 바닷가에 위치해 태풍이 오면 위험한 구조였다.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는 외국에 계신다].
남편에겐 호주에서 살고 있는 형이 한 명 있는데, 그는 우리 부부보다 1년 정도 먼저 결혼을 했다. 남편 형이 호주에서 살게 되고, 형수를 만나 결혼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좀 길다. 다만, 남편의 형은 우여곡절이 많아 결혼 전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쳤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시부모님은 호주로 떠난 아들을 7~8년째 보지 못하고 있었고, 어떠한 사연으로 앞으로도 그를 볼 가능성이 희박하였으나, 큰아들은 호주에서 시민권자 한국 교포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호주 영주권 취득 자격을 가지고 당당하게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약 1년 정도 한국에서 거주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는데 따라서 형 부부는 한국에 들어와 시가에서 몇 달, 그리고 시가 가까이에서 근 1년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의 어머니는 이런 남편의 형수를 딸처럼 예뻐라 했다.
내가 처음 남편의 형수를 봤을 때 심성이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의 형보다 연상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남편보다 5살이 많아, 남편의 형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어눌한 교포 말투를 썼는데, 처음에는 어린 나이 이민을 가서 그런 줄 알았으나, 나중에 그녀는 다 커서 이민을 갔고 원래 말투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 말투가 귀여워서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상하게 그녀(=남편의 형수) 옆에 있으면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의 형수를 두 번째로 만난 건 가족 식사 자리에서였다. 그 날도 약간의 사건이 있었는데, 일요일 오후 갑자기 남편, 그 때는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그의 아버지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신단다. 나는 ‘일요일 저녁은 최대한 나가지 말자’ 주의이다. 체력이 약한 나에게 일요일 저녁 뭔가 일을 만들어 외출을 했다가 늦게 돌아오는 건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마음에 부담이 컸다[체력을 떠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지 않을까]. 심지어 당시 남자친구의 집은 다른 지역이어서 고속도로 운전을 1시간 넘게 해야만 갈 수 있었고, 돌아올 때는 밤운전을 또한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남자친구에게 매번 내 일정을 묻지 않는 이런 통보식의 약속은 부담스럽다며, 가지 않겠다 얘기를 했다가, 매번 거절하는 게 죄송스러워 다시 마음을 바꿔 남자친구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 나갔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나를 만나자마자 서울에서 있었던 남편 형의 결혼식에 내가 오지 않았던 것과 그 동안 자신들의 갑작스런 부름에 오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언짢음을 나타내셨다. 나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 형의 결혼식, 그것도 서울에서 하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큰 문제였는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적지 않은 축의금도 했다.
당시 우리가 식사를 한 곳은 대게를 판매하는 식당이었는데, 남편의 형수는 그녀의 시어머니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는 내도록 그녀는 그녀의 시어머니에게 “엄마, 이것 좀 드셔보세요.”를 과장을 살짝 보태 100번 정도 했던 것 같다. 거의 한 숟가락 뜰 때마다 “엄마, 이거 드셔보세요.”를 하는 그녀를 보며, 가만히 앉아 밥을 먹는 내가 괜히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과연 그녀가 그녀의 부모님에게도 그렇게 할까. ’시‘부모란 어떤 존재이기에 저토록 본인 밥 한 술 제대로 못 뜨며 게살을 바르고 발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식사 시간 내도록 남편의 어머니는 이런 큰며느리와의 돈독한 관계를 나에게 자랑하셨다. 남편의 어머니는 그녀의 큰며느리, 큰아들과 한 상에 앉았고, 나는 시아버지, 남편과 같은 상에 앉았는데, 시아버지는 하나의 찌개 냄비에 모두의 침이 묻은 숟가락을 담그는 걸 부담스러워하셨다. 마침 나 역시 이를 매우 싫어했기에 우리는 앞접시를 따로 받아서 찌개를 덜어 먹었고, 남편의 어머니는 그게 못마땅스러웠나 보다.
“가족끼리 까다롭기는~. 가족끼리 뭐가 더럽니? 우리는 이렇게 그냥 다같이 떠먹는다. 그렇지, OO아?“
“얘는 나를 엄마라 불러. 진짜 딸 같고 너무 좋다.”
“우리는 말이야~ 어쩌고 저쩌고~”
그럴 때마다 그녀(=남편의 형수)는 그녀의 시어머니에게 “엄마, 엄마”거리며 애교를 떨었고, 이렇게 그들은 밥을 먹는 내도록 마치 일부러 나에게 소외감을 주고 싶은 듯 자신들의 끈끈함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그 때 남편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는 ‘차가운 도시 깍쟁이’였나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를 열심히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큰며느리는 거기에 열심히 협조했다[그 이후로도 그들을 함께 만날 때면 남편의 형수는 그녀의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그렇게 챙겨댔다].
남편의 어머니와 형수가 그러면 그럴수록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내가 처음 겪는 이 자리가 혹여라도 불편할까 나를 챙겼고, 남편의 아버지 역시 아내의 과장된 행동에 한 마디씩 하며 내 눈치를 살피셨다. 이런 모습을 남편의 어머니가 좋아했을 리 없다.
“어머, 엄마 앞에서 지 여자친구 챙기는 것좀 봐라. 너는 좋겠다. 내 아들이 그렇게 챙겨줘서~”
라며 농담처럼 우리에게 눈을 흘겼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시드니 청학동에 사는 게
무척 자랑인 남편의 형수
남편의 형수는 온 가족이 이민을 가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부부와 함께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가족 모임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엄청 보수적이어서 남자가 절대 주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단다. 그래서 매주 가족 모임을 위한 식사 준비는 남편의 형수, 남동생의 아내, 그리고 형수의 어머니가 하는데, 그녀의 남편(=내 남편의 형)이나 남동생이 음식을 나르려고라도 할라치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어디 감히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게 하냐!”
며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결혼 전 남편의 형수, 그리고 남편의 어머니를 한 자리에서 서너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남편의 형수는 이를 자랑하듯 매번 얘기했다. 처음에는 집안 분위기가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이 얘기를 왜 자꾸 하는지 궁금했고, 나중에는 이 불합리한 상황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지 정말 궁금했다. 적어도 두 번째 의문, 그녀가 왜 자꾸 이 얘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얘기로 당신의 아들이 우리 집에서 엄청 대접받는다며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야기가 몹시 불편했다. 너무나도 불합리한 상황을 자랑처럼 얘기하는 남편의 형수와 이를 기쁘게 듣고 있는 남편의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처음에는,
“어머, 우리집은 식사 후 보통 아빠나 남동생이 설거지를 해요.“
라고 나름 시드니 그 집이 너무하다 표현해 봤지만, 두 사람 모두 공감도 못 할뿐더러 큰 관심도 없어 했다[참고로 시가, 남편 형수 집안을 통틀어 우리 아빠 연세가 가장 많으시다. 내일모레 팔순].
도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하면서까지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단 말인가. 우리 셋 모두 여자인데, 왜 나를 제외한 그녀들은 이런 이상한 상황이 그렇게 즐거우냔 말이다. 진심으로 다음에 그녀를 만나 그녀가 또 이런 얘기를 한다면 나는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시드니 청학동에 사는 게 좋으세요?”
내 아들이 돈 못 버는 게 미안할 뿐,
집안일 하지 않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남편의 형은 한국에 있는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의 형수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나는 남자건 여자건 누가 돈을 벌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의 어머니는 그녀의 큰아들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굉장히 부끄럽고 미안해하셨다. 여기까지는 나도 그녀가 옛날 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뜨악했던 것은 남편의 형은 하루 종일 집에 있음에도 집안일에는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았고, 심지어 퇴근 후 밥을 차린 형수의 음식 솜씨를 그의 남동생(=내 남편)에게 형편없다 비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맛없는 자신의 요리를 남편(=내 남편의 형)에게 미안해했다. 남편의 어머니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차리는 며느리의 형편까지 미안해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본인의 아들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음을 미안해하실 뿐. 단 한 번도 집에서 놀면서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아들을 뭐라 하신 적은 없다.
그렇게 남편의 형과 형수는 1년여의 시간을 한국에 머물며 남편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호주로 떠나갔다. 시어머니는 큰며느리의 빈자리가 못내 아쉬운 듯 나에게 날마다 그녀 얘기를 했다.
“OO이가 너무 착하다.”
“OO이가 말을 너무 예쁘게 한다.”
“OO이가 어쩌고 저쩌고~”
이후 내 의사를 묻지 않고 초대된 시가 가족 단톡방에서 종종 그녀(=남편의 형수)는 차마 입에 담기 낯간지러운 온갖 찬사들을 시부모님들께 남기곤 했다.
과연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