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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ug 10. 2024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고

왜 자연 속 사람들은 악인이 아닐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올해 4월, 시부야에 있는 독립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초대권이 당첨되어서 내 손에 2장의 티켓이 주어졌고, 나는 일본에서 알게 된 친근한 지인을 초대했다. 내 기억으로는 함께 영화를 시청한 지인은 영화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삶의 방식을 스크린 안에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의도를 감안한다면,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평범한 삶'을 반성하게끔 만들기 위해서 그러한 평범한 삶을 안 보여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이 영화는, 평범한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진 유니크한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 본다.


도쿄에서 차로 두 시간쯤 걸리는 곳에 공기도 좋고 물도 좋은 산골 마을이 있다. 도쿄에 있는 연예 기획사, 좋게 말하면 연예 기획사이지만 직원도 두세 명밖에 없는 작은 회사는 정부의 코로나19 지원금을 수령하기 위해 글램핑장을 지으려고 한다. 글램핑장을 짓기 위해서는 지역 원주민의 허가가 필요하다. 원주민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 회사는 다카하시와 마유즈미라는 두 명의 직원을 보낸다. 작은 마을회관을 빌려서 주민 공청회를 열고, 이들에게 글램핑장을 지으면 어떤 장점이 있을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마을 주민의 반론을 듣고 다카하시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도쿄에 돌아와서 사장에게 글램핑장을 짓지 말자고 설득을 해 보지만, 돈이 급한 사장님은 무조건 글램핑장을 지어야 한다면서 컨설턴트의 말을 믿을 뿐이다.

이에 두 명의 직원은 접근 방법을 바꾼다. 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타쿠미라는 이혼 남성이 있는데, 이 남성과 딸과 함께 친분을 쌓는다. 타쿠미와 장작을 패고, 맛있는 우동을 먹으면서 관계가 깊어지는 와중에 타쿠미의 딸 하나가 숲 속으로 놀러갔다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 타쿠미는 실종됐다는 사실을 마을에 전달하고, 이에 따라서 온 마을 주민이 하나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워낙 넓은 마을이라 저녁이 깊어질 때까지 하나를 찾지 못한다. 이후, 타쿠미와 다카하시는 사슴과 함께 있는 하나를 발견한다. 다카하시는 하나에게 다가가려고 몇 걸음 옮기는데, 바로 그 순간 다카하시는 타쿠미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가장 뜬금없어할 장면일 것이다...) 영화는 타쿠미가 하나를 업고 목적지도 없이 어두컴컴한 숲 속을 달려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두 개의 질문을 떠올렸다.

이런 질문이 바로 떠오른 것은 아니고, 영화를 곱씹다 보니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들었다.


1) 사람의 악(惡)이 언제 영화속에서 현실태로 출현하는가?

2) 왜 자연 속 사람들은 선인도, 악인도 아닌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있어 사람의 '악'은 사물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비사물적인 것,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악이 언제 출현하는지 물어볼 수 있으며, 이 질문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윤리적인 규범, 인간이라면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규범 윤리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자연 속에 들어와 사는 마을 주민이 특별히 선한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마을 주민들은 글램핑장을 위한 공청회 장소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한다. 그 중에서 마을 주민의 입장을 대표하는 문장은 "상류에서 벌어진 일은 하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이다. 이건 직접적인 표현으로도, 은유적인 표현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을 주민이 거주하는 곳은 지방 중에서도 지방으로, 결정들이 내려지는 곳은 도쿄다. 도쿄를 상류로, 지방을 하류로 은유한다면 "상류에서 벌어진 일은 하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은, 도쿄에서 벌어진 일이 지방에도 막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게 되며, 이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 갖는 암묵적인 의미를 무척이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악'이 출현하는 순간은 정확히 어느 시점인가? 각자의 관점과 착상이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악은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타쿠미가 다카하시를 목 졸라서 죽이는 장면에서--모습을 드러낸다. 더불어 영화 속 허무한 '악'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도 제공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감독은 관객이 이 영화에서 어떠한 교훈을 배워서, 우리가 보다 선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마구치 감독에게 있어서, 영화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만남은 다큐멘터리처럼 전시될 만한 가치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관객에게 명쾌한 대답, 받아들일 교훈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예술 영화라면 마땅히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라는 인식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아랫목을 관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앞에서 던졌던 두 번째 질문, 왜 자연 속 사람들이 악인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 보면서 풀어나가 보기로 하자.


마지막 신을 제외하고, 마을 주민은 도쿄에서 온 손님들을 쌀쌀맞게 대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내쫓거나 대놓고 망신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쫓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예의를 다른 어휘를 사용해서 묘사할 수 있다.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예의와 대접(오모테나시)일 것이고, 대조적으로 이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가식적인 태도와 '포장'일 것이다. 이에 대한 지적은 일본 문화론과 에세이에서 제시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치바 마사야가 쓴 아메리카 기행이 있다.


편의점의 상품은 다양한 것들이 고도의 기술로 포장돼 있다. 이 얼마나 벗기기 쉬운가. 얼마나 열기 쉬운가. 멈추는 일 없이 포장을 여는 일이 가능하고, 다음 동작에서도 다시 정성스럽게 포장된 물건과 만난다.
포장된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이 나라는 횡포한 바깥바람에 약하다. 포장의 원 쿠션이 항상 들어가니까, 세계의 횡포한 움직임과는 직접 연동하지 않는다. 포장에서 포장으로. 하나의 포장에서 다른 포장으로 정체 없이 이행한다. (중략) 포장이란 곧 의례다.
치바 마사야 『아메리카 기행』 중에서.


질문에 이미 대답은 주어져 있다. 여기서 문제는, 마을 주민들이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이라는 점과, 자연에는 '인간의 악', 인간적인 악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사실이 혼동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이 잘 어우러져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고작 그런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글램핑장을 강의 상류에 만든다는 계획은 당연히 적이 된다. 만약 그러한 구도를 원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조금 더 분량을 할애해서라도, 글램핑장 개발과 자연보호 사이의 복잡한 결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신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또 남아 있다. 대체 '악'은 어디로 도망가는가? 이다. 타쿠미는 다카하시를 목 졸라 죽이고 나서 딸을 업고서 숨가쁘게 달린다. 산 속에서는 방재(防災) 스피커가 홀로 외롭게, 잃어버린 딸의 행방을 묻고 있다. 타쿠미는 총에 맞은 사슴을 바라보면서,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는 도쿄에서 온 불청객에 대한 '심판'으로도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인간이 내리는 심판 치고는 너무나 밋밋하고, 무책임하고 뒷맛이 나쁘다. 그야말로 질문을 던지기는 던졌으되, 질문에 정성 들여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면 이 지점에서 영화는 명쾌한 대답을 주기보다는 풀기 어려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질문을 제기하고, 주체는 멀리 있는 산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결말을 영화가 줄 수 있는 깊은 여운과 감동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앞에 두고 사라지는 무책임함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둘은 모순되는 사태는 아니므로, 어쩌면 공존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일본의 대접에는 마음이 쉬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 꺼림찍한 긴장감이 있다." (아메리카 기행, p.83)

치바 마사야의 말대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속의 일본인들의 대접 속에는, 꺼림찍한 뭔가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도쿄에서 온 손님 두 명이 대접받는 맛있는 우동에서, 그리고 우동을 먹고 난 뒤 다카하시의 말에 대답하는 비아냥대는 대사에서, 공청회장에서 나타나는 우발적인 질문에서 이 '꺼림찍함'은 자신의 실루엣을 드러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그것은 지진이 벌어지기 전에 대륙 지각판들 사이에 쌓이는 반발력처럼 조금씩 조금씩 쌓여 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폭발한다.

예의바름이 어느 순간에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태세전환을 한다. 일본인이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것에는 윤리도, 규범도, 의미의 논리도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산과 숲을 보여주면서, 그저 현상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에 역으로 물어보고 싶어진다. 이런 질문을.

왜 인간은 자연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나요? 왜 급발진을 하시나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대답을 얻기 위해서 던져지는 질문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도 영화를 향해서 '좋은' 질문을 제기하고 자문자답을 해 본다. 영화에서부터 솟아 난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나가는 동안, 우리가 영화를 보는 관점은 한층 다채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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