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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ug 12. 2024

여행자의 필요 (2024)

이자벨 위페르에게 홍상수가 건네준 선물



홍상수 감독의 최근 영화이자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여행자의 필요>를 극장에서 봤다. 한국에 놀러 온 김에, 이 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영화공간 주안이라는 이름의 독립 영화관을 자주 다녔으므로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영화공간 주안을 가 보려고 했지만, 거리도 멀고 해야될 일들이 있어서 그냥 집 근처에 있는,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가박스에서 관람했다.


건물에 막 들어가려고 할 때 어떤 작은 어린이가 유리문 앞에 세워져 또는 방치되어 있던 자전거 두 대를 밀어서 (고의 없이) 넘어뜨렸다. 그래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지만, 때마침 내가 그 유리문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자전거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메가박스가 있는 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아무도 없는 스크린으로 들어왔다. 평일 대낮에 일부러 홍상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나 같은 관광객 말고는 없다. 메가박스라서 그렇듯이 정보값이 없는 광고가 한바탕 지나가고 난 뒤에, 전원사 고유의 필기체 로고가 보이고 나서 곧바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라는 공간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중간에 프랑스어를 배우는 젊은 여성이 연주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Liebestraum)이었다. 왜 이게 반가웠냐면, 리스트의 사랑의 꿈은 내가 몇 년 전에 즐겁게 플레이한 나스 키노코의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가 언젠가는 존재했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다)인 <마법사의 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밤>과 <여행자의 필요>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랄 게 있다면, 사랑의 꿈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 외에는, 두 작품의 서사가 남성들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걸 공통점으로 놓고 썰을 풀기에는, 둘은 너무나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블로그에는 <마법사의 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을 하지 않고, 사용한 음악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아마도 이 영화를 두고 형편없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다. 영화평론가는 대체로 호평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상수의 이번 영화에는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를 말하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여자들(이혜영, 김승윤)도, 변호사 역으로 나온 남자(권해효)도, 이자벨 위페르와 같이 살고 있다고 묘사되는 '인규'라는 인물도,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묶여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특별히 나의 관점에서 스테레오타입같이 뻔하면서도 유쾌하지 않았던 장면은, 이자벨 위페르가 '인규'의 집에서 잠시 나간 다음에, '인규'와 '인규의 어머니'가 동거하는 프랑스인 여자를 놓고 아주 중요하다는 듯 벌이는 십분 간의 대화였다. 나름대로 '인규'는 프랑스인 여자를 변호하기 위해서 여러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렇게 삶에 진지한 사람이 없으며,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추구하는 사람이 없고(나는 여기서 로티의 철학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 좋게 말해준 사람이라고. 여기에 대한 '인규의 어머니'의 맞대응은 매우 강렬하다. 분명히 명시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둘은 '인규'가 어렸던 시절 같이 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규의 어머니'가 보기에는, '인규'와 프랑스인 여자의 조합은 마음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울리지도 않는 조합이다. '인규의 어머니'는 '인규'에게 그 여자가 돌아오면 예전에 어디서 뭘 했고,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하게 물어볼 것을 주문한다. 그러자 '인규'는 갑자기 순종적인 막내아들이 된 것처럼 "알았어요, 엄마." 하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인규'는 김치된장찌개를 얻어먹는다.

나는 <여행자의 필요>에서 그 '필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고 영화를 보는 동안에, 그것이 영화에 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홍상수는 내가 그런 생각에 도달하게끔 도와주었다. 오히려 그런 퍼즐보다 중요한 것들이 눈에 보였다. 이자벨 위페르가 정말 오래간만에, <다른나라에서> 이후로 오랜 시간에 지나서 한국에 와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 그리고 <소설가의 영화>나 <탑>과는 달리, 홍상수가 흑백 모노크롬이 아닌 컬러를 선택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자벨 위페르의 단독 숏이 영화 속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 이런 세부적이고 겉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이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을 보려고 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답이 나왔다. 이자벨 위페르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한국에서 그녀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풍경을 담기 위해서 홍상수는 이 영화를 찍었을 것이다. 제목의 여행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영화 바깥에서 영화 내부로 자발적으로 들어온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우리는 이자벨 위페르가 무엇을 필요로 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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