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끔찍한 나를 발견했다.
세상 사람들 나의 편견 그 끝에 보이는 그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친구랑 얘기를 나눴다.
나와 정반대인 성격을 가진 친구는 그 끔찍한 편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현실적인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SNS 안에서의 다른 사람들의 자기 과시적(단어 선택이 너무 격한 것을 안다)인 모습들이 너무 싫다.
하지만 이는 내 안에 무의식, 남에게 거절 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며 그 무서움에 의해 나를 숨기는 그 끔찍한 행동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구적인 관찰적인 성격이 끝에 도착해서 이제는 나를 탐구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지금 중요한 것은 나의 탐구보다는 타인에 대한 공감일지 언데 말이다.
나는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한다. 타인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타인에게 거절당할 것 같으면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 안에서 나는 또 하나의 끔찍한 편견을 생성해 낸다. 그런 사람들은 별로일 것이라는 끔찍한 편견말이다.
사실 어쩌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끔찍한 두려움에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본래적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프롬은 확신했다. 그 방법은 순서대로 나의 고통의 인식, 고통의 이유, 극복의 가능성, 변화시켜야 함이다.
나는 요즘 나의 고통의 인식, 이유에 대하여 고찰 중이다.
무엇인가 나의 무의식에서 끔찍하다고 소리쳐대는 탓에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러다가는 광인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편협한 사고에 잡아먹혀 끔찍한 나라는 존재가 되어 버릴 거 같다.
나의 청년기가 끝난다면
나는 나에게 광인이 되지 않았음을 또한, 사랑을 이루어냈구나 라는 말이 듣고 싶다.
아니 사실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