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문틈으로 밀어 넣은 서류 두 장
[Prologue. 문틈으로 밀어 넣은 서류 두 장]
‘안되면 말지...’
점심시간 굳게 닫힌 과 사무실 문틈으로 봉투에도 채 담지 못한 학점인정서 두 장을 밀어 넣었다. 점심 식사를 거르고 어렵사리 지휘관의 허락을 받아 산골짜기 부대 앞으로 콜택시를 불러 12시 전에 겨우 대학교에 도착했지만, 교직원들의 점심시간도 군인과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무실 불은 꺼져있었고,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전화도 받을 리 없었다. 1시 전엔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여기서 택시를 잡아서 가는 시간을 얼추 계산해도 40분 이상. 과사무실 근로자가 점심을 빨리 먹고 와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기에는 불확실성만 가득했다. 그날은 학점인정서 제출 마지막 날이었다.
결국엔 체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대 싸지방에서 흑백으로 출력한 학점인정서를 굳게 닫힌 과사무실 문틈 사이로 넣는 일밖에 없었다. 남길 수 있는 쪽지도 없었다. 될 테면 되겠지. 안되면 말고. 실망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소위’ 주제에 점심 시간에 잠시 나와 캠퍼스의 공기를 마셨다는 것을 약간의 일탈로 승화시켜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택시를 불러 다시 위병소로 도착했다. 우리 대대 막사가 위치했던 곳은 팔공산 자락으로 향하는 언덕의 맨 윗부분이었다. 언덕을 뛰다시피 올라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인사과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먹고 갈걸. 이미 취사장은 ‘짬처리’가 다 된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헤프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부대 안에 없었다. 내가 대학원 진학을 준비한다는 것도 대대장님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했다. 그냥 나 혼자만의 일화로 기억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뭐, 원래 처음부터 부대생활하며 대학원을 병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될 일이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안되면 사이버대학원이라도 접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학점인정서를 접수(?)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 만큼 서류를 던져놓은 뒤로 약 일주일. 평소처럼 일과시간에 바쁘게 업무를 보다가 잠시 PX에 음료수를 사러 갔다.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인사과장이 된 후 내 휴대전화는 업무 전화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댔다. 밤, 낮, 새벽도 가리지 않는 업무 전화가 PX에서 잠시 쉬고 있다고 나를 배려해 울리지 않을 일은 없었다. 지역번호 053으로 시작하는 번호. 뭐 부대의 유관기관이나 상급 부대의 사무실 전화일거라 생각하고 받았다.
“전화받았습니다.”
누가 들어도 군인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으며 수화기 넘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 예상과 달랐다. 평소에는 나보다 더 딱딱하고 군인같은 목소리로 위압감을 주는 업무 전화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꽤나 상냥한 여성분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다, 나, 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안소위님” 혹은 “6대대 인사과장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안이오 선생님이신가요? 경북대학교 윤리교육과인데요~”
문틈으로 던져놓은 서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금새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경북대학교 윤리교육과라는 소속을 밝힌 그 전화 소리에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억, 그보다 갑자기 부푼 소망이 내 마음에 가득 찼다. 던져진 내 서류가 접수가 됐다는 것을 서류 접수 마지막 날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난 그날 알게 됐다. 문틈에 밀어 넣은 학점인정서 두 장, 서류봉투에도 담지 못했고, 과사무실에 추가적으로 전화해보지도 못했던 그 서류의 행방을 알게 됐다. 내가 이곳 대구에서 캠퍼스 생활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 그 기대감을 굳게 닫힌 사무실 문 앞에서 채 몇 분도 고민하지 않고 체념해버리는 결정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처사였다. 간절함을 담아야 했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야 하는데 문틈으로 대충 밀어놓고 ‘될 테면 되라지’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의 배짱은 뭐였을까.
아무튼. 학점인정이 됐다고 했다. 합격 소식이 아니었음에도 설렜다. 이미 합격한 것처럼 기뻤다. 사실 아직 원서 접수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원서를 접수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확인을 받은 것일 뿐. 그래도 좋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또 원서접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있었다. 문틈으로 던진 서류를 극적으로 인정받았던 기억보다, 부대에서 그때그때 처리해야 하는 일에 치여 살아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주 전 점심시간에 부대를 나갔다 왔기 때문에 지휘관께 이번 원서접수때도 그렇게 하겠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낸 것은, 당직을 바꿔서 다음날 근무취침을 대신해 원서접수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원서접수 마지막 날로부터 하루 전, 나는 원래 동원자원관리관으로 편성돼 있던 당직을 양해를 구해 내가 서겠다고 했다. 밤을 꼴딱 샜다. 그리고 당직 교대를 하고서도 해야할 일이 남아 10시쯤 퇴근. 영외숙소로 가서 찬물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차를 가지고 경북대로 향했다.
피곤은 몰려오고, 근무취침은 고려해주지 않는 상급부대로부터의 전화는 계속 울려댔다. 오늘은 기필코 일찍 원서접수를 하고 점심을 먹고 쉬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북대 근처 PC방에서 원서접수 프로그램에 접속해 경북대학교 윤리교육과 석사 원서를 접수했지만, 뽑아놓고 보니 일반대학원 원서였다. 쌩돈 5만원만 더 날린셈이다. 결국 다시 PC방으로 돌아가 새로 원서접수를 했다.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윤리교육전공. 원서를 뽑아들고,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1시에 과 사무실로 찾아가 원서를 제출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부대에서 오는 전화는 나를 근무취침으로 휴식중이어야 하는 나의 사정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원서를 접수했다는 그 만족감으로 위로가 됐다. 문틈으로 밀어 넣은 학점인정서 두 장과 잠을 포기하고 접수한 원서. 그 안에 다시 한 번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내 소망이 담겼다.
(다음 화 예고) : EP1. 30만원짜리 정장, 급히 줄인 바짓단, 철물점에 맡긴 카드, 돈가스, 스타벅스 라떼, 시험과 면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