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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30만원짜리 정장, 급히 줄인 바짓단, 철물점에 맡긴 카드, 스타벅스 라떼, 돈가스, 시험과 면접]
“30만원짜리 정장, 급히 줄인 바짓단, 철물점에 맡긴 카드, 스타벅스 라떼, 돈가스, 시험과 면접”
의식의 흐름대로 무작위로 나열해놓은 말들 같지만, 내겐 생생하고 급박했던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 된 것이 없었다.
나는 조급한 상황을 싫어한다. 원래 마음이 급한 편이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하지만, 약속된 시간에 임박해 부랴부랴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더라도, 예정된 도착 시간보다 20분 정도는 당겨서 출발한다.
생각해보면 짧은 인생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었던 순간들은, 매번 마음이 조급한 상황에서 나타난 일들이 많았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실수도 많아지고, 잘못도 많아지는 것 같다. 그래서 되도록 조급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계획을 미리 세우는 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계획을 세울 때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싶을 수도 있는 상황을 빼놓지 않으려고 신경 쓴다.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가 화장실이 급해질 수도 있고,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유제품을 먹고 예상치 못하게 배가 아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날도 약 2주 전부터 세워놓은 나의 계획이 있었다. 사실 군 생활을 하며, 특히 참모업무를 하며 그때그때 주어지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 계획과 맞지 않게 흘러가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업무의 요령도 생기고, 예측되는 일들도 많았기 때문에 큰 사건사고가 아니라면 꽤나 계획대로 순조롭게 업무를 처리해 왔었다. 하필이면 이날만 빼고.
이날은 대학원 입학시험과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앞서 우연치 않은 기회로 학점인정을 받아, 잠을 포기하며 원서를 접수했기에 입학시험과 면접을 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이날 휴가를 써놨다. 그날 나에게 걸려 오는 전화도 최대한 없도록 하기 위해 미리 그날 해야 하는 일들을 계획에 맞춰 처리했다. 소위 시절이라 제대로 휴가도 잘 못 썼는데, 그날은 미리부터 휴가 계획에 반영해 승인을 받았다.
처음에는 꽤 순조롭게 흘러갔다. 미리 일을 해놓은 덕분에 일과시간에도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당시에는 매일 같이 야근을 9시까지 했지만 그날은 퇴근하고 정장도 사고, 이발도 하려고 ‘칼퇴’ 하려고 했다. 퇴근을 앞둔 오후 5시쯤이었던가. 평소처럼 일일결산회의가 진행됐다. 평소에도 웃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분위기는 더 심각했다. 중대의 용사들 사이에서 트러블이 있었고, 관련된 징계사항이 있었다. 그 과정속에서 감정 다툼이 있었던 두 용사를 분리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쎄한 분위기가 흘렀다.
결산 회의를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했다. 겨우 결산 회의가 끝났나 싶었지만, 지휘관께서는 작전과장, 인사과장, 중대장은 대대장실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부대의 비상 상황에 내 개인적인 일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게 1시간을 더 이야기했을까. 오랜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은 내가 가해 용사로 지목된 용사를 피해 용사로 파악되는 용사와 분리해 다른 생활관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같이 지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왜 그렇게 낫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계획은 다 무너졌다.
이발도, 정장을 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특히 휴가를 냈던 내일조차도 아침에 출근해서 징계를 빨리 진행하고 휴가를 가라는 지휘관의 지침을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야근을 하며 내일 징계 절차 진행을 위한 문서를 만들었고, 가해 용사로 지목된 용사와 함께 분리된 생활관으로 갔다. 한 시간쯤 지나 해당 생활관에서 자려고 하니 대대장님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법무참모에게 해당 건에 대해 문의하니 인사과장은 징계담당자여서 오히려 가해 용사와 같이 지내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직자에게 해당 내용을 잘 인계해 피해 용사로 파악되는 용사와 분리해 생활할 수 있게 통제하도록 주의를 당부하고 오후 11시반쯤 퇴근을 했다.
이발소나 정장점은 이미 다 문을 닫았을 시간.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 일찍이 징계 절차를 진행하고, 해당 징계 내용을 바탕으로 지휘관 승인을 받아 공문을 처리해놓고 시험과 면접 전까지 빠르게 계획대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대강 내일의 계획을 세워두고, 옅은 잠을 잤다.
아침 일찍 군복을 입고 다시 부대로 올라갔다. 징계 서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징계위원회를 진행했다. 이후 징계 내용을 기록하고 조서를 만들어 지휘관의 승인을 받은 뒤 여단으로 제출, 10시쯤이었나 부대를 나서 휴가(?)에 나섰다. 영외 관사에 잠시 들러 군복을 갈아입고 수험표를 챙겼다. 다시 차를 끌고 팔공산 자락의 도로를 가로질렀다. 팔공산에서 도심 초입으로 가는 길목에 양복전문점 상설매장이 있었다. 따질 것도 없이 바로 들어가서 사장님께 양복을 달라고 했다. 내 급한 모습 때문인지 덩달아 사장님도 급해지신 게 느껴졌다. 곤색 계열로 사이즈만 대충 맞춰서 입어보고 30만원 짜리 양복을 할부로 구매했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도 엉겁결에 샀고, 정장 양말과 벨트는 서비스로 주셨다. 구두는 정복 구두가 트렁크에 다행히 있어서 그것을 신었다.
바로 경북대로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문제는 바짓단이었다. 바짓단을 줄여야 했다. 내 급한 모습 때문에 덩달아 급해진 사장님은 매장을 나와서까지 나를 배웅해주시며 길 건너편을 가리키셨다. 저쪽 세탁소에서 빨리 해주니까 얼른 가서 바짓단을 줄이라고. 다시 차를 끌고 유턴해 사장님이 말씀하신 세탁소로 갔다. 세탁소 사장님께도 굉장히 급한 목소리로 바짓단을 최대한 빨리 줄여달라고 말씀드렸다. 사장님께서는 30분만에 바짓단을 줄여주셨다.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탈의실도 없는 세탁소 한켠에 걸려있는 옷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제발 출발. 차를 타고 나선 순간 불길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대대장님의 전화였다. 혹시라도 아침에 처리한 징계 절차가 잘못됐을까 두려웠다. 혹시라도 다시 부대로 돌아오라고 하는 거면 죄송하다고 말할 심산이었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었다. 전화를 못 받은 척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강철, 전화받았습니다 대대장님”
“이오야, 어디니?”
불길한 예감 그대로였다. 전날 업무를 위해 부대 지휘카드를 수령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내 지갑에 넣어놓은 채로 출발한 것. 사실 지휘카드를 쓸만한 일이 많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날에도 지휘카드를 쓸 일이 있었는 모양인지, 나에게 카드를 가지고 다시 부대로 와줄 수 있냐고 하셨다.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방법은, 내가 방금 바짓단을 줄인 세탁소 바로 근처에 우리 부대에서 자주 이용하는 철물점에 카드를 맡겨놓는 것이었다. 카드를 그곳에 맡겨놓으면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배차를 신청해놓은 간부가 이동하며 잠시 철물점에 들려 카드를 받아 가면 될 것 같았다. 대대장님께 복안을 보고드리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유턴해 철물점으로 갔다. 카드를 맡기고, 이제 정말 경북대로 출발했다.
휴대폰 네비게이션을 따라 경북대로 향하던 중 대대장님께 카톡이 왔다. 또 뭐일지 불안했지만, 미리보기로 보이는 내용은 기프티콘 선물이었다. 시험 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라고 하셨다. 위안이 됐다. 만약 내가 일을 마무리하지 않고 왔다면 시험 중에도 불안해 했을 게 분명했다. 전날과 시험 당일 아침 내가 겪었던 급박한 심정이 카톡 하나에 잔잔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경북대에 도착했다. 차 안에 있는 왁스를 섬세히 바르고, 북문 앞 분식집에 들어가 돈가스를 시켰다. 돈가스를 기다리며 논술 시험에 대비해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며 이슈를 체크했다. 사실 공부가 잘된 상태였다면, 개념을 바탕으로 논술에 임했겠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전략은 ‘첫 문단에서 눈길을 사로잡기’였다. 참신한 도입부를 통해 글을 잘 쓰는 것처럼 둔갑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몇 가지 이슈들을 잠시 체크하는 동안 주문한 돈가스가 나왔다. 옷에 양념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신중히 하면서도, 최대한 빨리 흡입했다.
식사를 마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 문제는 논술형이었고, 6개의 전공 문제 중 2개를 선택해 작성하는 시험이었다. 윤리교육의 세부 분야인 동양사상, 서양사상, 한국사상, 정치사상, 응용윤리, 교과교육론에서 각각 한 문제씩 출제됐던 것 같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공부도 안 된 상태에서 문제를 보니 막막했다. 그래도 6문제 중 딱 2문제는 어떻게든 비벼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문제는,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 축차적 서열, 차등의 원칙의 개념을 사용해 설명할 것’과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민주주의와 연관지어 논하시오.’였다.
당시 내가 정확히 어떻게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날은 소위 ‘글 빨이 먹는 날’이었다. 빈약한 개념을 가지고 꽤 나 그럴듯한 논술을 해낸 것 같았다. 첫 번째 문제는 ‘흑수저론’을 가지고 정의론을 설명했고, 두 번째 문제는 학부 시절 읽었던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와 시장’ 책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이후 바로 면접 대기실로 이동했다. 사범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대기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어떡하나 생각했다. 앞선 면접자들은 굉장히 빨리 면접장에서 나오는 편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학과장 교수님과 1:1면접으로 진행됐다. 교수님께서는 지원서를 보고 군인인데 대학원 다닐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부대장 허락을 맡고 일과 이후 시간에 다니는 거라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철학과나 사범대 출신이 아니라서 이번 시험이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번에 지원율도 높고 문제도 어려워서 혹시 떨어지더라도 상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실상 떨어질 것이 확정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짧은 면접이 끝났다. 그래도 속 시원했다. 걸핏하면 시험조차 보지 못할뻔했지만, 시험장에 무사히 도착해 꽤나 만족스러운 글을 써서 제출했다는 것. 평일 낮에 경북대 캠퍼스에 와서 식사도 하고 잠시나마 캠퍼스의 기운을 느꼈다는 것. 잠시 캠퍼스 생활을 꿈꿨다는 것이 좋았다. 휴가였지만, 다시 남은 일을 위해 돌아가야 했다. 입은 양복이 부끄러워 차에 있는 로카 후리스로 양복을 가리고 일과 시간이 끝나기 전에 부대로 들어갔다. 휴가는 쉬는 날이어야 하는데, 이날은 이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정신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보냈던 하루였다.
이날로부터 약 2년 6개월 뒤 교육대학원 졸업을 일주일 앞둔 지금, 그날을 기분 좋게 회상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다음 화 예고) : EP2. 우여곡절을 뚫고 간 첫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