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우여곡절을 뚫고 간 첫 수업]
[EP2. 우여곡절을 뚫고 간 첫 수업]
원서접수부터 입학시험까지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군 생활과 대학원 입시를 병행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래도 군 생활을 하며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다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했다. 날씨가 추워질 무렵 시험과 면접을 마치고 이제 후회와 미련 없이 군 생활에만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알짱알장, ROTC 장교의 삶]에서 군 생활에 대한 자세한 에피소드와 심경을 다룬 것처럼, 소위 인사과장 시절의 나는 야근의 연속이었고, 큰 실수가 있었고,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하지만, 오기를 발휘했다. 내가 실패한 그 영역을 가장 잘하는 영역으로 바꾸는 것이 내 가장 최고의 목표가 됐었다.
이 시기가 딱 그랬다. 인사과장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업무에 적응하고, 그것을 넘어 잘 해내는 것이 내 제일의 목표였다. 일에 전념하며 야근을 일삼았다. 매일 아침마다 대대장님 집무실에 노크해 업무를 보고하고 시작했고, 하나하나 일이 머리와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군 생활을 시작한 첫해가 어느덧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나를 맞아주었던 선배 간부들은 하나, 둘 떠나고 새로운 간부들이 전입을 오기도 했다. 선임 인사행정병이 전역을 했고, 일병이 된 인사서무병과 인사과 업무를 도맡게 됐다. 연말이라 급하게 처리하고 마감해야 하는 업무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바쁜 연말이 지나고 나니 또 연초 업무가 주어졌다.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군이라는 환경 속에서 적응하며 몸도 스트레스를 꽤나 받은 듯했다. 새해가 시작되고 머지 않아 탈장 수술을 하게 됐다. 약 2박 3일 입원을 해 수술을 받고 몸을 회복했다. 수술 부위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아 불편했지만 다시 복귀해 업무를 했다.
그렇게 대학원 시험을 본 지도 2개월 가량이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업무에 집중하느라 대학원 입시를 했었다는 것도 기억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이듬해 1월 중순을 지나고 있었다. 연말연시의 급한 업무들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이번 주는 ‘저녁이 있는 날’이 시행되는 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자대로 전입을 오고 ‘저녁이 있는 날’을 온전히 누려본 적이 그때까지는 없었다. 용사들의 일과시간은 마쳤지만 마감해야 하는 업무가 그 시간에 주어지기도 했었다. 아니면 한 주를 마무리하는 ‘소통과 공감의 시간’이 16시를 넘어 끝나 제때 퇴근하지 못했던 적도 꽤 있었다.
그 주에는 기필코 16시에 퇴근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당직이나 비상응급대기 간부로 편성돼 있지도 않았던 터라 주말 휴가를 내고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외할머니댁에서 좀 쉬다 올 심산이었다. 마침 할머니도 인천 집에 가 있으셨던 때라 나 혼자 집에서 쉴 수 있었다. 마침 그날은 16시를 많이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업무가 마무리됐다. 대대장님께서도 간부들 일찍 퇴근하라고 배려를 해주셨다.
아직 해가 밝은 시간에 퇴근을 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영외관사에 가서 샤워를 마치고 방에서 달력을 확인하니 오늘이 대학원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큰 기대를 안 해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합격을 눈으로 확인하면 기분 좋은 이른 퇴근의 설렘을 망칠 것만 같았다. 진주까지 차를 타고 가는 1시간 반 동안만이라도 해방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지 않고 진주로 출발했다.
휴게소에 들려 소시지도 먹고, ‘최애 여행과자’ 참깨스틱과 아메리카노를 사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주로 향했다. 비어 있는 할머니댁에 도착해서 곧장 배달 어플을 켰다. 피자를 배달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합격자 발표를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그간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진주에서의 짧은 휴가도 기쁨의 연속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부대에도 이 소식을 알렸다. 당장 두 달 뒤부터 퇴근 후 대학원 수업을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다시 열심히 일했다. 한창 코로나로 인해 부대 안팎으로 시끄러운 시기였지만 곧 캠퍼스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버티며 주어진 업무를 해 나갔다. 혹한기 훈련도 잘 버텨냈고, 설날 부대 운영 프로그램도 도맡아 진행하고 연휴 간 코로나 PCR검사 인력 지원도 나섰다. 괜찮았다. 곧 퇴근 후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2월 말이 돼 수강신청도 하게 됐다. 원래는 일주일에 4번을 가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부대 업무와 훈련을 고려해 하나는 수강신청을 하지 않았다. 당직 근무도 미리미리 손해를 보며 조정해서 대학원 수업을 갈 준비를 마쳤다. 나는 옷을 내 돈 주고 잘 사지 않는 편이지만 그 무렵에는 캠퍼스 생활의 설렘으로 옷도 샀다. 등록금도 잘 해결됐다. 지난 탈장 수술 비용이 실비 보험으로 적용돼 때마침 보험금이 들어왔다. 도로 등록금으로 다 나가긴 했지만 그것도 기분이 좋았다.
설레는 첫 개강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여단으로부터 공문이 하나 도착했다. 그 공문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나는 부대 여건에 따라 참모로서 임무수행하며 5분전투대기부대 조장으로 임무수행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순번에 따라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투입되게 됐다.
당장 오늘부터 간부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5대기 조장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사다리타기를 돌려 투입 순서를 정했고, 나는 바로 다음 주에 투입되게 됐다. 젠장. 개강 첫 주부터 모든 수업을 빠져야 했다. 5대기 조장으로 임무수행하게 되면 주둔지 안에서 하루종일 대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외에 있는 관사에도 가지 못하고 일주일 동안 갈아입을 옷과 세면 도구를 챙겨서 작은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대기 장소로 투입됐다. 추운 겨울 팔공산 자락에 놓인 작은 컨테이너 안에서 한 주를 보내야 했다.
별 수 없이 내 차례가 와 조장으로 투입됐다. 개강 첫 주 수업은 하는 수 없이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7일 동안 임무수행을 하며 약 4일 차쯤 됐을 때 갑자기 지침이 바뀌었다. 다시 부대별 여건에 맞춰서 계획을 세워 시행할 수 있게 된 것. 그날은 내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지휘관께 허락(?)을 구하고 퇴근 후 학교로 향했다. 우여곡절을 뚫고 처음 간 수업에서 교수님을 비롯해 다른 수강생들의 의아한 눈빛이 나를 조금은 부담스럽게 했지만 그래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마 군복을 입고 수업을 들어오니 의아할 만했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부대에서 경북대학교까지 약 35분이 걸렸다. 퇴근 시간 무렵이어서 학교에 도착할 즈음에는 차와 신호에 막혀 촉박해지기도 했다. 저녁도 먹지 못했고, 수업을 마치고 관사로 돌아가면 9시가 넘기도 했다. 업무가 남아 있으면 수업을 마치고 다시 부대로 가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군 생활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래도. 정말 좋았다.
내 생애 후회 없는 선택은 몇 가지 없지만, 언제든 다시 생각해도 군 생활을 하며 대학원 생활을 병행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다음 화 예고) : EP3. 친해질 수 없는 비주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