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세 번 넘는 여행의 시작

그 한심한 승객이 나일 줄이야

by 인사신해

22시까지 풀근무인 오늘, 출국시간을 맞추기 위해 조퇴결재가 수리된 즉시 입국장 근무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출국장 라운지에서 밥을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번 여행은 조금 특별했다. 낯선 도시들을 넘나들며 국경을 세 번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간이 여유롭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페이징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아차 싶어 서둘러 게이트로 향했다. 출국장에서 근무하며 황급히 승객을 찾아다니는 항공사 직원들을 보면서 어느 한심한 승객이 탑승시간도 모르고 있을까 했는데 그게 나였다. 그 와중에도 샤넬 립스틱을 살까 말까 고민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탑승 후 좌석에 앉았을 땐 이미 배가 부를 대로 불러 있었다. 풀서비스 항공사였다는 사실은 짧은 비행임에도 간식과 음료가 나왔을 때에서야 실감 났다. 동방항공은 연착이 많고 스케줄도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다지만, 13만 원으로 나를 한국에서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지역으로 가는 난닝까지 데려다주는 이 비행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만, 기내에서 보조배터리 충전을 못 한다는 건 살짝 불편했다. 보안 규정이 강화됐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 비행기는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후텁지근한 공기와 낯선 냄새가 확 들어왔다.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공기. 그리고 다른 냄새. 나라가 바뀌면 공기조차 표정이 다르다. 복도를 빠르게 걸어 입국장을 향했다.


출입국 공무원은 말을 아낍니다 (저도요)

잠깐 멈춰 섰다. 여긴 중국. 입국 심사대. 문제는 나였다. 중국 입국은 했는데, 출국은 베트남 육로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중국 출입국 공무원이 까다롭다는 건 다 안다. 게다가 그들은 대화를 길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을 아낀다. 에너지를 지킨다.(… 어쩌면 나랑 같은 이유일지도.) 그래서 꺼냈다. 파파고. 그리고 입국신고서. 한 글자씩, 조심스럽게.

“내일 난닝에 도착해서, 핑샹 가는 버스를 타고, 베트남 랑선으로 육로 출국 예정입니다.”

삐뚤빼뚤한 중국어로, 나는 귀하의 국가를 존중하며 영어로 쓸 수 있음에도 부족하지만 중국어로 씁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시고 질문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못 알아 들어요..ㅠㅠ..라는 심정으로 입국심사관이 읽기엔 적당한 명료함으로 적어 내려갔다.

이건 요령이다. 말은 줄이고, 정보는 정확하게. 눈빛은 당당하게. 출입국 공무원끼리는 그런 거, 눈치로 통한다. 역시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와 곧장 마그레브를 탔다. 자기 부상열차. 그날 비행기 탑승권을 보여주면 20% 할인이 된다. 단, 인터넷예약은 안 된다. 티켓 카운터로 직접 가야 했다. 약간 번거롭긴 해도 전통적인 방식이 가끔은 신뢰를 준다. 알리페이 결제는 다행히 잘 작동했다.

마그레브에서 내려 과기관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처음엔 평범한 쇼핑몰 같았다. 하지만 불빛이 환한 쪽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씩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가방? 명품?" 명료한 한국어 발음으로 빠르게 반응하는 상인의 목소리. 손짓을 따라 조용한 가게로 들어섰다. 비밀스러운 분위기. 흡사 영화 세트장처럼. 사진을 보여주면 가방을 꺼내 보여줬다. 스트랩 하나 바꾸는 데도 다른 가방을 뜯어 부품을 맞춰주는 정성. 기묘한 세심함. 신기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시장 전체가 소등되며 문 닫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급히 가방 가격을 흥정해 보았고, 예상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수락이 돌아왔다. 그 순간 알았다. 여기서는 흥정이 예술이다. 구입은 잠시 미루기로 하고 시장을 나왔다.

길가에는 상해의 야경이 펼쳐졌다. 반짝이는 불빛,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붉은색 네온 아래 사람들의 움직임. 택시를 타려다 띠디 앱을 써봤다. 예상보다 훨씬 진보된 시스템. 소비자가 금액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 때문인지 택시 기사는 오지 않았고, 나는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살짝 무서운 뒷골목. 그러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따종띠엔핑 앱에서 미리 주문해 둔 게살볶음면을 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긴장한 탓에 맛을 잘 느끼지 못했다. 식사 후에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방은 생각보다 좁았지만 깔끔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하루가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한국에서 출근을 위해 맞추어 두었던 4시 20분 알람이 울렸다. 한국은 5시 20분이니까 1시간 더 자고 나니 시차이익을 보았다.


나는 여행지에서 이른 새벽의 도시를 걷는 걸 좋아한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도시의 본래 선을 볼 수 있는 시간.

그건 오직 일찍 일어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건물의 외곽선이 드러나고, 그림자가 얇게 드리우고, 공기가 묘하게 차분해진다. 그 시간에만 도시를 완성시키는 존재들이 보인다.

청소부, 물 뿌리는 트럭, 첫 배송을 시작하는 택배 차량. 이 도시의 리듬은 그들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 선을 따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상해의 동방명주에 도착했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상해의 고층 빌딩들은 안개사이로 묘한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길을 걷다 호텔의 정찬사진을 발견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저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루이신커피. 브라질 테마의 인테리어, 벽에 걸린 유화. 상해에서 맞는 첫 커피. 작지만 생생한 순간들이 여행을 만든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렇게 1일 차의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낯섦 속에서도 익숙함을 찾아가는 시간. 긴 하루였지만 마음은 가볍고 단단해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심천의 아침, 시더우드의 향기를 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