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빛과 그림자

by 산이

빛이 그리는 수묵화가 아침을 밝힌다.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실물과는 전혀 다른 피사체로 왜곡이 주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분명 그림자일 뿐인데 밝고 어두움으로 대비되어 형상을 만든다.

태양의 남중고도가 낮은 겨울에 창으로 들어오는 그림자의 수묵화가 최고이다. 비스듬히 비스듬히 기울고 기울어 사물의 그림자는 실제보다 길게 왜곡되어 바닥에 드러눕는다. 빛이 오는 방향과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양을 한다.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빛의 향연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자의 명암에서 밝은 섬광이 은은하게 퍼져 그림자가 돋보인다. 빛과 빛을 받은 사물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듯이 보인다. 교감은 생명체들 간의 나눔인가 생각했는데, 무생물 간에도 교감이 가능한 것 같아 자연현상이 주는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감탄한다.

빛과 그림자! 동전의 양면은 하나이다. 빛이 없는 날은 그림자가 오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날은 비가 내린다. 하염없이 내린다. 빛과 그림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다. 그림자 그늘에서 속삭인다. 빛이 만든 또 다른 존재인 그림자는 빛의 잔영이라고. 그림자는 사물의 반사가 낳은 빛의 희미한 분신이다.

빛과 그림자는 둘이 아닌 하나로 사물의 허상이다. 그림자, 그늘은 빛이 만든 허상이다. 빛과 사물이 서로 마주치면서 사물의 이면에 드러내는 빛의 얼굴이 그림자이다. 얼굴 없는 빛이 사물을 통해 그 형상을 그려내기에 실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허상이다. 고로 빛이 없으면, 동시에 사물의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는 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의 어느 날, 아침에 창으로 만난 수묵화는 매일 만나는 것이 아니라서 더 신비하고 아름답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물의 측면으로 기울어 비추는 빛이 허상을 더욱 왜곡시켜 나타난다. 때로 정직함보다 살짝 왜곡된 모습이 더 인간미 넘친다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이다. 허상이 아무리 왜곡되어도 실체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는 아름다운 수묵화인 것이다.


2025. 12. 14. 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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