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길에 만나는 것들
날이 차다. 귓가에 맴도는 바람이 소리 없이 차다. 몸에 한기가 서린다. 뽀송뽀송 솜털 부드러운 내의라도 입어야 하나?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나왔는데, 몸이 움츠린다. 마음은 여유를 빼앗기고 그만 빨리 돌아가라며 재촉한다. 여유를 즐기며 마실 나온 산책은 어쩔 수 없이 짧은 외출로 끝이 나고 만다.
마당 넓은 집이 아니고, 성냥갑처럼 네모나게 각져서 층층이 쌓인 아파트라는 집에서 살다 보면 산책 나오는 길도 거쳐야 하는 순서가 많다. 귀찮은 마음이라도 생기면 방바닥에 주저앉기 일쑤이다. 모처럼 마음먹고 나오더라도 개별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 공동현관을 지나야 비로소 땅을 밟을 수 있다. 아니 아니야. 때로 아스팔트 혹은 시멘트로 된 길을 벗어나 차를 타고 산기슭으로 가야 흙을 밟고 걸을 수 있다. 그러니 땅을 밟는 산책은 아주 가끔이고, 일상의 산책 혹은 마실 나들이는 아스팔트, 시멘트, 보도블록 등 포장길에서 이루어진다. 비가 와도 흙 묻지 않아 좋긴 하지만.
조경이 잘 된 아파트 산책로에서 가을의 선물을 만난다. 붉게 또는 노랗게 물든, 시차를 두고 다르게 염색되고 있는 자연을 만난다. 빠알간 산수유 열매가 탐스럽다. 푸른 잎과 대비를 이룬 먼나무 열매도 조롱조롱 많이 달렸다. 너무나 곱고 이뻐서 뭔 나문가? 하고 묻기에, 먼나무라 했는데 그 이름이 그 이름이란다. 참 신통도 하지. 이상 기후 탓인가? 종종 때 이른 꽃이 핀다. 가을에 영산홍이 피고, 개나리도 꽃망울을 터뜨린다. 아름다운데 마음이 아린 것은 왜일까?
아파트 단지의 문주를 벗어나 찻길로 접어들면 이팝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먼나무, 홍가시, 꽃댕강, 남천 등등 구간마다 다른 가로수길을 만난다. 오월이면 하얀 이밥처럼 탐스럽게 핀 이팝 거리를 만나고 시월이면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황금빛으로 꾸며 놓는다. 아주 작은 종이 달려 있는 듯한 꽃댕강은 꺾으면 댕강하는 소리가 난다나? 산책 길에 차가 많아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느림의 미학을 담고 천천히 다가가고, 또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면 가로수가 주는 선물이 있어서 일상이 그리 무료하고 심심하지는 않다.
찻길을 돌아 낡고 허물어진 집들이 있는 주택가로 접어들면
정돈되지 않은 길에, 또 굽이굽이 돌고 도는 골목길을 걷게 된다. 옛 생각에 잠겨 무심코 우두커니 서성거리기도 하고, 담장 밑 모퉁이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오동나무, 제비꽃을 만나기도 한다. 생명의 끈질김? 아니 질긴 인연의 끈을 보는 듯하다. 전봇대 옆에 모아 둔 쓰레기 봉지를 부리로 물어 뜯는 까치, 까마귀를 만나면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산책하는 길이 그래서 늘 즐겁지는 않다. 함께 살아야 함에 서로 나눔이 순탄하지 않아 쓰레기를 뒤져야 하는 생명, 누군가의 생각지 않은 편리성 추구로 인해 변해버린 기후로 때를 놓치고 꽃을 피우고 시들어버리는 식물,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 싹을 틔우는 씨앗 등을 바라보면서 싱싱한 잎과 빠알간 열매, 그리고 제철에 피는 꽃과 단풍에 매료되어 웃기엔 참 시리게 가슴 아픈 건 왜인가? 흙을 밟고 산으로 가는 산책, 자연과 함께 하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삶이 그립다.
산책 길에 만나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2025. 11. 22. 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