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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28. 2024

남의 불행이 부끄러운 경우

[누구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 데이비드 고긴스

잘 나가던 때를 떠벌리라는 게 아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남의 불행은 분명히 위안이 된다. 실제가 아닌 가상의 스토리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햄릿 같은 비극에 감동받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의 불행이나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불행을 보면서 우리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신의 상태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렇듯 인간이란 참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물론 동정심이란 것도 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위기에 처한 아기를 구하고자 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부차적이거나 예외적인 상태이므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진 못한다.


남의 불행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면, 우리는 마냥 이기적이고 우매한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남의 불행을 보며 부끄러워 반성하고 영감을 얻고 감동하는 그런 좋은 경우가 있다. 그건 바로 불행을 겪은 사람이 불행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다.


헬렌켈러, 이순신 같은 위인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인생을 보자. 그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진 장면들은 이제 흰머리와 주름살로 남았지만, 부모님들은 인생의 불행한 위기들을 모두 극복하고 우리 곁에 계신 위인들과 다름이 없다. 분명 우리는 불행을 극복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우리가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끔찍한 가정폭력을 극복하고 이 시대 진정한 철인으로 거듭난 저자의 삶을 통해 내 인생을 채찍질하게 하는 책이다.


데이비드 고긴스의 '누구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는 꽤 오래전에 사두고 애써 외면해 왔던 책 중의 하나다. 희망적인 밝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고, 지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충 읽어보니 책 내용이 어둡기 그지없고, 저자가 훈련교관처럼 독자를 강하게 질책할 것 같은 책에 손이 안 갔던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래도 요즘 다이어트라는 것도 하고 있고, 정신 좀 바짝 차리고 살아보자고 다짐한 터에 이 책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긴장을 바짝 하고 있는 이등병처럼 책을 읽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끔찍했던 군생활이 떠오르는 독서였다. 데이비드 고긴스의 피폐했던 유년시절을 표현하는 한 문장, 한 문장은 지옥 같았던 유격훈련의  PT동작을 생각나게 할 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저자의 네이비씰에 입대하기 위한 훈련과정은 거의 인간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고문과 같았다. 사지를 결박하고 물에 빠뜨리고, 1m가 넘는 파도 너울을 헤치고 1km를 수영하게 하고, 통나무를 들고 개고생 하는 장면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에 전사한 동료 자녀들의 대학교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울트라마라톤(100km를 뛰는 미친 마라톤 경기)을 뛰는 데이비드 고긴스를 보며 일종의 경외심마저 들었다.


데이비드 고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참 군인, 진정한 철인으로 등극한 이 시대의 위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호되게 질책하며 독자에게 쏘아붙이듯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채찍질처럼 몸에 박힌다. '게으르고 썩어빠진 정신상태는 던져버려라.', '당신이 생각하는 고통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징징거리지 말고, 남 원망하지 말고 거울 속에 비친 멍청한 나에게 욕한 바가지를 쏟아내라.' 이런 말들이 계속 반복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지옥 같은 삶을 살았고,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던 저자의 말이기에 내게 변명거리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저자에 비하면 태평하게 잘 살아왔기 때문이다. 전우의 자식들을 위해 고통을 사서 하는 희생적인 저자의 행동에 비해 내가 하고 있는 게으른 행동들은 비루하고 볼품없었다. 너무 부끄러워 숨을 곳을 찾게 만들었다. 불행을 극복한 영웅적인 삶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인간은 부끄러워지는 법인가 보다.


자, 침대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이불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밀린 설거지를 하자. 더러운 방을 정리하고 깔끔하게 옷을 세탁하자.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달리기를 시작하자. 밀린 책들을 꺼내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읽어보자. 졸리더라도 참아라. 지금까지 잠은 많이 잤으니 이제 좀 졸려도 된다. 이제껏 게으르게 살아왔으니 이제부터는 고통스럽게 전력질주를 해야 할 때이다. 고통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고통을 극복하고 황홀한 아드레날린의 축복을 느껴보자. 이제 그럴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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