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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Apr 11. 2024

나도 말하고 싶다. 맨날 듣는 것 말고.

[우리, 편하게 말해요], 이금희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은 누구입니까?


우리 집에는 나 혼자 정한 철칙이 있다. 그건 '가족들에게 절대로 넋두리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들이 내게 못할 말은 없다.'이다. 나 혼자 정한 철직에 따라 나는 가족들이 감정을 토로하는 최후 방어선이자 삭힌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이다.


밖에서 살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연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사연이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들의 사연을 말한다. 나는 일방적으로 잘 듣는다. 굳이 얘기를 해야 한다면 그들의 사연에 공감하는 추임새를 넣거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부추기는 질문을 할 뿐이다. 열에 여덟, 아홉은 그렇다. 간혹 예외적으로 하나, 둘 쯤은 내 얘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듣는 청자의 입장이다 보니 때론 괴롭다. 나도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을 못 하니 괴롭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건 대화가 아닌 상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괴롭고 말하는 사람은 신이 난다. 이런 관계는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듣는 사람이 아래에 있고 말하는 사람이 밑에 있다. 소위 갑을관계가 대화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나 혼자 철칙을 정한 게 '가족들의 이야기는 무엇이든 내가 다 듣는다.'라는 것이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들어주면서 정작 중요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면 이율배반이 아니겠는가?


사실 나도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라고 언제나 감정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남 험담도 하고 내 자랑도 하며 편하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게 쪽팔리다고 생각한다. 상남자처럼 잔뜩 폼을 잡는 건 아니다. 그저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말하는 게 두려워졌다. 대화에서 마이크를 잡아도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망설임이 생긴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내 인생에서 선천적인 재능을 받은 한 가지 신체 부분이 있다면 '세치 혀'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내가 말하는 게 두렵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두려운 마음으로 책을 찾았다. 말하기 잘하는 법을 검색하고, 온갖 유명한 스피치와 관련된 책들을 두리번거렸다. 빠르게 훑어본 바에 의하면 유명한 스피치 책들은 전부 발표나, 프레젠테이션 같은 전문적인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어떻게 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조리 있게 잘 전달하며, 임팩트 있게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런 내용은 내가 바란 것도 아니었고, 감동도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이금희 아나운서의 책을 집어 들었다. 선택은 쉬웠다. 아내의 최애 프로그램인 '인간극장'에서 무려 10년간 내레이션을 했던 이금희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이미 내게 익숙한 교보재였고 따라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이 사람이라면 진짜로 말을 잘하는 법에 대해 알려줄 것이라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첫 장부터 말하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기가 아니라 되려 잘 듣는 게 제일 중요하단다. 한 순간 기대로 부풀었던 가슴이 축 처지며 맥이 빠졌다. '아니 나는 듣는 건 잘한다니까요. 맨날 듣는 것만 하다 지쳐서 잘 말하는 걸 알고 배우고 싶다니까요.'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천천히 책을 읽다 보니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박진영은 어느 오디션 프로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말하듯 노래하는 가수라 했다. 이런 법칙을 글에 대입하면 어떨까? 가장 글을 잘 쓰는 작가는 말하듯 글을 쓴 작가라고. 이금희 작가의 글이 그랬다. 오디오북이 필요 없었다. 절로 음성지원이 되는 글이었다.


읽는 게 아니라 듣는 독서를 소리 없이 경험하다니 생소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말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진짜 글로 말을 하고 있으니 계속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읽다 보니 듣기를 강조하는 첫 장을 벗어나 어느덧 실용적인 방법론을 말하는 마지막 장까지 쭉 읽게 되었다.


책에서 말하는 것은 이렇다. '잘 말하려면 잘 들어야 해요. 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제대로 말하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해요.', '말을 잘하는 건 빨리 많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신뢰감 있는 말하기는 천천히 느리게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달변의 재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눌변이라고 좌절할 필요는 없어요. 수십 번 연습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말하기는 자연스럽게 늘어요.'


주제만 달랑 적어놓으니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주제만 곰곰이 생각해도 얻는 바가 컸다. 말을 잘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에 크게 공감했다. 만약 내가 듣는 게 괴롭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면, 화자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할 때였으니 말이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됐다. 그때만큼은 듣는 게 즐거웠다.


말 잘하는 법과 관련된 딱딱하고 차가운 실용서를 찾다가 부드럽고 따뜻한 에세이를 만났다. 이금희 작가가 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과 일대일 면담을 했던 일화는 가장 인상 깊다. 대학 수업에서 학생 한 명 한 명과 30분간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던 작가는 훗날 한 학생에게서 재밌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일대일 면담을 할 때 몰래 녹음을 한 것이 있는데, 들어보니 학생 본인이 27분을 이야기하고 이금희 작가는 3분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그랬니?', '대단하다.', '괜찮아.'같은 추임새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화의 10%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말을 하고 싶었던가?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잘 듣는 것을 더 연구하면 되는 것이었고, 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연습을 해야 했던 것이다. 도깨비방망이로 뚝딱하면 보물이 쏟아지는 그런 기적은 없었다. 말하기는 잘 듣는 것의 연장선에 있고, 말하기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듣는 사람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잘해오고 있었고, 지금처럼 잘하면 된다. 굳이 내 감정을 토로해야겠다면 혼자 일기를 쓰면 된다. 굳이 나까지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가족들이 밖에서 대화의 을이 되어 계속 들어주기만 해야 한다면, 집에서는 갑이 되어 실컷 말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대화의 을로 잘 살아왔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대화의 을로 더 잘 살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은 반쪽짜리 인간이지만, 그래도 가족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남편이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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