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키하바라 B-PUMP 방문기
10년 만에 혼자 떠난 여행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상최대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다. 길을 잃어도 웃음이 낫고 그저 그런 음식을 먹어도 미슐랭 3 스타 음식점의 맛이 느껴졌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는 여고생들에 빙의한 느낌. 아놔 몰랐는데 나란 여자 이렇게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여자였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지만 이 행복감을 절정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료하던 인생에 행복감을 전해준 운동인 클라이밍을 이 여행에서 즐긴다면 그거야 말로 행복의 최대치가 아니겠는가? 행복감 + 행복감이라니 좋아서 미쳐버리는 거 아니야? 이거 생각만 해도 짜릿짜릿한데?
이번 여행에 유일하게 계획하고 온 도쿄 최대 규모의 클라이밍장인 아키하바라 B-pump로 향했다. 이곳을 가기 위해 남들은 텅텅 비워 간다는 캐리어에 암벽화며 초크며 클라이밍 테이프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건 여전한 안 비밀이다. (쓸데없는 TMI를 말하자면 공항에서 초크가 혹 마X으로 걸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양손은 무거웠지만 두 발걸음 가볍다 못해 날아오르는 느낌. 유부녀 유부남들은 공감할 거라 감히 단언합니다.ㅋㅋㅋ
그렇게 드디어 당도한 도쿄 아키하바라 B-pump 점!
두둥! 귀엔 아무것도 꼽지 않았고 이곳은 일반적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런 효과음이 들려왔다. 저 건물 전체가 클라이밍장이라니?! 이곳은 정말 클라이머들의 천국임에 틀림없다. 크나큰 건물에 압도당한 나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건물로 드디어 입성하였다.
B-pump만 그런지 일본 클라이밍 장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입회비가 있다. 무려 하루 입장료와 동일한 금액인 2200엔! 그래서 하루 이용료가 4400엔으로 비싸긴 하지만 (다음번부터는 입회비가 없지만 다음번이란 게 있긴 할까..?) 그런 것 따윈 클친자인 나에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지.
이미 한국에서부터 금액은 검색한 지라 당당하게 손에 4400엔을 쥐고 카운터로 갔는데 돈을 받지 않는다. 읭? 뭘 하라고? 뭔 동의서를 잔뜩 쓰라고 한다. 뭔지 모르지만 열심히 작성하고 돈을 줬는데 또 돈을 안 받아. 왜 또!!! 뭘 이메일로 보냈는데 그걸 알려 달란다. 그래야 등록이 된단다. 아놔. 진짜 이용하기 쉽지 않군.
구석탱이로 가 앉아 메일을 기다리는데 왜 또 메일은 안 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메일이 안 와 열받으려는 찰나 혹시나 하고 스팸함에 가보니 거기 메일이 있네? 참. 인생 쉽지 않죠? 어찌어찌 그 번호를 알려주고 이제 진짜 들어가려는데 뭐임? 이제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네? 네네 안전 중요하죠 암요. 그렇고 말고요. 아하하하하하 나 저 안에 들어갈 수 있긴 한 거지?
심지어 교육은 1:1이 아닌 어느 정도 사람을 모아서 한다.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앉아있는데 자꾸 귀에 들어오는 익숙한 소리. 저 소리는 무엇이더냐? 한국어가 아니더냐? 어허허. 근데 왜 자꾸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많이 들리지? 여기.. 일본 맞지? 나 지금 홍대 클라이밍장 온 거 아니지? 머릿속은 자꾸 물음표로 가득했지만 1도 티 내지 않은 나는야 대한민국의 아줌마.
어찌어찌 병맛 같은 일본의 안전교육까지 다 듣고 드디어 입성한 B-pump.
엄마. 나 드디어 일본 클라이밍 장에 입성했어!!!
탈의실에 들어가 짐을 집어넣고 한국에서부터 고이 가져온 장비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하하하하. 내가 모든 층의 모든 문제들을 정복해 주지. 호기로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맞이한 지구력 벽.
볼더링은 몰라도 지구력이라면 내 주 종목이지! 몸도 아직 안 풀렸으니 젤 쉬운 문제로 풀어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문제의 난이도를 확인하고 벽에 붙었다. 문제 난이도는 5.9! 처음엔 쉽게 쉽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중반쯤 되자 닥쳐온 위기.
음? 이거 뭐지? 분명 발 홀드 엄청 쉬운데.. 동작? 클라이밍의 기초 동작인 인동작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 같은데.. 그런데 홀드가... 홀드가.. 아니 분명 5.9이라고 했거늘 이렇게 다양한 홀드로 만들어진 건 반칙 아닌가요? 5.9이면 좋은 홀드로 주셔야 되는 게 국룰 아니 여긴 일본이니 세계룰 아닙니까?
떨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내 마음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5.9도 못 풀면 클라이밍 한다고 하면 안 되지” (EP.41 참조) 그 소리가 들려오니 차마 떨어질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문제를 풀어나갔고 결국 완등을 했다. 나 4층 모두 정복 가능하겠지...?
겨우 1문제를 풀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 3층과 2층. 제가 로비에서 들었던 한국어는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여긴 분명 도쿄 아키하바라이거늘. 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한국인인 것이냐? 거짓말 조금도 보태지 않고 암장에 있던 사람 중 반 이상은 한국인이었다는 놀라운 사실. 클라이밍이 한국에서 이렇게나 대중적인 운동이었다니! 근데 왜 내 주변엔 클라이밍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이냐?!!!
볼더링 문제만 가득한 그곳들은 총 10단계의 난이도로 이뤄져 있었다. 과연 어느 정도가 나에게 맞을까? 고민 고민하다 풀어본 3단계의 문제. 여기 문제가 어렵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넘나 쉽군. 방금 지구력 벽에서의 좌절은 또 잊은 채 그렇게 또 쉽게 자만한 나란 여자. 단순한 여자.
그렇게 4단계 문제에 도전했다. 응? 이거 뭐지? 내가 색깔을 잘못본거 아니지? (볼더링은 색깔로 난이도를 표시한다) 이렇게 어렵다고? 1단계 차이인데?
문제가 풀리지 않자 오랜만에 혼자 온 해외여행으로 잠자고 있던 경쟁심과 도전 욕구가 꿈틀꿈틀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따른 건 몰라도 너는 꼭 깨고 만다. 안 풀리는 문제를 풀기 위해 수백 번 도전했고 수백 번 떨어졌다. 장작 4시간을 한 끊임없는 도전! 그 결과는... 바로?!!
성공이 중요한가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죠. 전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떨어지는 눈물 좀 닦고요.
그렇게 일본에서 총 4시간 30분 동안 열심히 문제를 풀은 결과 전완근은 터질 것 같았고 손바닥은 아작이 났다. 그래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제 내가 해외 클라이밍 장을 경험해 보겠는가? 언제 내가 한 건물이 통채로 된 암장에 와서 운동을 해보겠는가?
한국에 돌아와 암장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 순천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클라이밍 장이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또 드릉드릉하는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클라이머. 자 이번엔 순천에 한 번 가봐? 이번에 저와 함께 하실 분 팟 모집합니다. ㅋㅋㅋ